욥기 강해

우스 사람 욥의 축복

아브라함-la 2024. 6. 25. 10:43

024,6,23, 주일

본문 : 욥1:1-5

말씀 : 라인권목사
하지가 지나고 이번 주에 소서가 있습니다. 장마도 시작되었습니다. 이 여름, 하나님의 사중계획 안에서 낮에 해도 해치 못하고 밤의 달도 상치 못 하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욥기는 형식이 드라마입니다, 모두 일곱 장의 드라마로 짜여 있습니다. 이 욥기를 기록한 사람을 고대 유대인들은 모세라고 하고. 솔로몬이라는 이도 있고, 예례미야라는 이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는 잘 모른다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아무튼 이 욥기의 저자는 욥기라는 드라마의 시나리오를 쓴 사람이자 연출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욥기를 바로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 각본을 쓴 사람의 눈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욥기 제1막의 서막입니다. 이 서막의 첫 장면은 우스 사람 욥이 어떤 사람이냐에 주목합니다. 욥이 어떤 사람이냐를 조명하기 위해서 욥이라는 사람이 받은 축복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있습니다. 이 축복이 욥이라는 사람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빛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욥의 신앙을

우선 욥의 신앙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 떠난 자더라” 이렇게 욥의 소유 중에 욥의 신앙에 주목함은 욥의 이 신앙이 행운 중의 행운이요, 욥이라는 사람을 위대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왜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가진 것이 행운입니까? 신앙이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알리는 계시를 주지 않으면 믿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은혜라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욥은 행운아 중의 행운아입니다.

 

왜냐하면 욥은 족장 시대 사람입니다. 본문에는 욥이 족장 시대 사람이라는 증거들이 있습니다. 욥이 직접 제사를 드렸다는 점입니다. 욥이 제사장이었습니다. 모세부터는 제사는 제사장만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들들이 생일잔치를 한 주간을 하고 제 팔일에 욥이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여기에 안식일 제도가 없습니다. 안식일 제도가 없다는 건, 모세 이전 족장 시대의 특징입니다. 이 족장 시대는 계시가 선택받은 아브라함과 그의 지손들에게 임했습니다. 이들만 여호와 신앙을 가졌고, 그리스도를 언약으로 받았습니다, 욥은 이 아브라함계가 아닌 우스 사람, 흔히 동방으로 일컬어지는 북아라비아 사람입니다. 즉 언약 밖의 사람, 이방인인 셈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 밖의 욥에게 당신을 알게 계시하셨다는 겁니다. 족장 시대에 언약 밖의 사람이 여호와를 알고, 대속자 그리스도를 알았다는 건 기적이요, 행운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건, 욥이 그 누구도 그와 비견할 수 없는 신앙을 가졌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욥기의 연출자는 욥의 신앙을 강조하려고 의도적으로 신앙이라는 동의어를 네 개의 다른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온전하다”는 나뉘어진 마음이 아니라 전부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했다는 거요, “정직”은 생각과 행동이 탈선 없이 옳은 것이 일치된 것이요. 경외함은 모든 것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결정하고 행한다는 거요, 악에서 떠났다는 건 그 결과로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미워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도 욥과 같은 사람이 없다고 욥의 신앙을 인정하셨습니다.(1:8) 이런 말을 쓰신 건 노아, 욥, 다니엘뿐입니다.(겔 14:14)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족장들보다 더 훌륭한 믿음을 가진 겁니다. 우스 사람이 이런 믿음을 가진 건 기적이요, 축복 중에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이 신앙이 욥을 빛나게 했습니다. 욥에게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신앙이 없다면 욥의 다른 축복은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욥기는 이 욥의 신앙이 부러워서, 선망이 되어서 욥의 신앙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춘 겁니다.

 

내가 욥기의 연출자라면, 나는 욥의 소유 중에서 제일 부러운 것, 선망해 마지않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땅의 재벌가를 보며 내가 선망하고, 제일 부러운 것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재벌이 사는 호화주택이나 펜트하우스, 고급 자동차, 권력이 부럽습니까? 재벌이라도 신앙이 없으면 전무입니다. 초막이라도 예수가 계시면 천국입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욥과 같이 이방인인 우리가 신앙에 이른 것은 행운 중의 행운입니다. 욥의 재산이 아닌 욥의 신앙이 그립고, 부럽고, 선망이 되어 욥기처럼 신앙에 먼저 스포트라이트를 비출 수 있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욥의 가정의 다복함에

욥기의 연출자가 욥의 신앙 다음에 조명하는 것은 욥의 가정의 다복함입니다. 일곱 아들에 세 딸입니다. 이 숫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일곱은 완전수이고, 셋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수입니다. 열은 인간 만수입니다. 욥의 자녀들은 이렇게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고 잘나고 귀한 자식이라는 겁니다, 이 자식들은 생일이 지나고 나면 혹시 마음으로라도 하나님을 떠났을까 하여 속죄제를 드릴 정도로 기른 자식입니다. 이렇게 귀한 자식이요. 그리고 욥의 자녀 십 남매는 욥 부부의 금술과 화목과 단란함의 상징 같은 것입니다. 이를 가정적 축복이라고 하지요. 욥의 가정을 보면 욥이라는 사람의 유인됨이 드러났다는 겁니다.

 

왜 욥기가 신앙 다음에 이 욥의 가정에 주목할까요? 욥의 소유 중에 재물은 돈으로 살 수 있지만, 이 가정은 돈으로 살 수 있거나,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정, 즉 아내, 남편, 자녀가 있고, 화목이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 것이며,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고,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는 겁니다. 따라서 가정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 것이며 가정이 있으면 모든 것이 있다는 겁니다. 이 가정이 욥의 축복, 행운이라는 겁니다. 욥의 자녀가 행운이요, 욥의 부부 됨이 축복이라는 겁니다. 욥기는 이걸 선망해 마지않은 겁니다. 이 눈을 가집시다, 가정을 감사합시다. 욥과 같은 가정을 이루시고, 가정을 행운으로 여기시기를 축복합니다.

 

욥의 물질적 부가

이제 연출자는 욥의 물질적 부를 조명합니다. 본문의 욥의 소유에는 부동산이 빠져있습니다. 부동산을 빼고도 욥의 동방 제일의 부자입니다. 욥기의 연출자가 욥의 부에 주목하는 것은 욥 같은 부는 하나님의 은총이요, 사회적 혜택을 입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욥기의 연출자는 욥의 그 엄청난 부가 존경을 받는 부라는 점에 주목합니다. 동방에서 가장 큰 자라는 말은 가장 큰 부자라는 뜻 보다,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게 록펠러의 부와 다른 점입니다. 록펠러의 부는 피가 묻은 부입니다. 그래도 미국인들이 록펠러에게 별 반감이 없는 건, 록펠러는 이 피를 씻으러 록펠러 재단을 만들어 사회에 부를 환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욥의 부는 정직한 부라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게 있습니다. 이 욥의 부가 아니면 욥기의 저자가 욥을 주인공의 삼았겠는냐는 겁니다. 그가 부하면서도 신앙을 가진 것이 완벽한 사람, 완벽한 축복을 보여 준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부가 아니며 욥이 욥 같은 아버지가 되고, 가난한 자들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이 욥의 부가 욥의 위인 됨을 드러내고, 빛나게 하고 있습니다.

 

요즘 신앙에 겉 멋든 바리새인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학자연하며, 물질적 축복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물질적 축복이 기독교적이 아니라는 이들은 자신이 별수 없는 육신임을 망각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빈곤은 고귀한 인간성을 말살합니다. 구속은 인간을 인간다운 삶을 누리게 하는 겁니다. 한 인간으로써 기독자는 적어도 신앙과 인격의 존엄과 봉사를 유지할 정도의 재물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부를 추구합시다. 정직한 부를 존경합시다. 욥처럼 부하면서도 부가 아닌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부를 선용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욥의 경건이

욥기의 연출자가 마지막으로 조명하는 것은 욥의 경건입니다. 욥의 경건을 마지막에 둔 것은 경건이 후순위라는 뜻이 아니라, 경건이 하이라이트라는 겁니다. 마치 연출자가 가장 인기 있는 가수를 엔딩 무대에 세우는 것 같습니다. 욥의 경건을 부각하려고, 욥의 부를 열거했습니다, 사람이란 부할수록 경건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욥은 그 부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경건했느냐? 자식들의 생일잔치가 끝나면 그들의 명수대로 속죄제를 드릴 정도라는 겁니다. “혹시”라는 말은 죄를 지을까 조바심할 필요가 없는 신뢰하는 자식이지만, 욥은 사교에서 흔한 흐트러지는 마음과 농담까지도 사죄받아야 할 죄악으로 알았다는 겁니다. 욥은 행위만이 아닌 성화를 바랐다는 겁니다. 욥이 이 정도로 경건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이 욥의 경건이 축복, 행운이라는 겁니다.

 

경건은 금생과 내생에 유익하지만, 우리가 믿는다고 다 경건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경건은 원하는 만큼 되는 것이 아니지요. 원하는 바 선은 행치 아니라고, 원치 않는 바 악을 행한다는 바울의 고백과 같이 경건은 원한다고 소원만큼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게 우리의 한이지 않습니까? 경건을 추구해도 마음과 달리 실패합니다. 그래서 성인을 동경하는 겁니다. 그런데 욥이라는 사람은 부하면서도 비할 데 없이 경건했으니, 금쟁반에 옥구슬입니다. 이 경건이라는 은혜, 경건이라는 축복이 부러워 선망해 마지않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욥기처럼 경건을 축복으로 압시다. 경건을 선망하고, 부러워하여, 경건을 힘쓰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렇게 욥의 소유, 욥의 축복은 욥의 위인 됨을 드러내 욥을 빛나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욥기의 연출자는 시128편의 시인처럼 이 욥과 욥의 축복을 선망해 마지않고 있는 겁니다. 이 욥기 연출자의 이 가치관을 가집시다. 신앙과 경건을 축복으로 압시다. 그리고 추구합시다. 그래서 욥이 욥기의 저자 선망의 대상이 된 것 같이 우리 은혜로 가족이 이 세상에서 선망과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렇게 되도록 우리를 하나님의 사중계획 안에 두신 것을 확신하고 찬양합시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