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아의 추억에 대한 귀여우나 황당한 오류에 관하여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1931년생 박완서 작가가 자신의 유년과 학창 시절의 정치와 맞물린 서울에서의 추억을 더듬어 쓴 자전적 소설이다. 작가가 이 소설의 제목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로 한 건, “진달래 먹고 물장구치던”에서 보듯 먹는 것이 유년의 추억을 대표하는 놀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1991년에 발표된 이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도, 봄에는 진달래 따고, 삘기를 빼 먹고, 초여름에는 뻐꿈이며, 오돌개와 산딸기를 따 먹고, 밀을 그슬려 먹으며 놀던 한국전쟁 전후 세대와 고향을 잃은 베이비 붐 세대들에게 분단의 비극과 맞물린 “그 많던 싱아” 는 곧 자신의 유년의 추억이었기 때문일 터이다.
“싱아”는 휴전 동이에 시골에서 자란 내게도 생소한 이름이다. 싱아를 두루 검색해서 사진을 보고, 설명을 읽어 난 아직도 싱아를 모른다. 한 번도 보지 못해서, 마치 모르는 사람 사진을 보듯 보아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나무나 풀이름을 꽤 아는 편에 속하지만, 막상 산야로 나서면 아는 것보다 모르는 식물들, 익숙하나 이름을 모르는 식물이 더 많다. 내게 상대적 무식을 실감이 나게 하는 게 식물이다,
싱아로 상징되는 글들의 오류
이렇게 장황하게 “싱아의 추억”을 소환하는 건 “싱아”로 상징되는 글들에는 “얼룩 백기 황소”니 “찔레꽃 붉게 피는” “역마차 길” 같은 사실이 아닌 시어이거나, 낭만적 표현을 넘어서 실소를 금치 못할 황당한 글들이 적지 않아서이다.
이런 오류가 유독 많은 찔레순의 예를 보자, “연한 부분을 잘라먹은 추억의 식량”이니, 배고플 때 꺾어 먹던 찔레순이라고 찔레를 배고픔의 식물로 규정하여 올린 사진들은 거게가 찔레 나뭇가지 끝에서 자라 나온 가느다랗고 붉은 가시가 돋아 있는 세어 버려 먹지 못할 찔레순이다.
물론 그걸 먹으려면 먹을 순 있겠지만, 한국전쟁 전후 세대나, 베이비 부머 세대들이 꺾어 먹던 찔레순은 가지 끝에서 자라난 가는 순이 아니라, 찔레나무의 뿌리나 둥치에서 마치 죽순이 올라오듯 실하게 돋은 움이었다.
더 황당한 것은 이런 식의 글이 학문적인 사전에도 버젓이 실려 있다는 점이다. 국립중앙과학관 야생화 편 찔레나무를 보자. 소제목이 “배고픔을 달래 주던 찔레”인 이 기사는 친절하게 이런 해설을 덧붙였다. “찔레나무의 연한 새순은 먹는 것이 별로 없었던 시절에는 어린이들에게 매우 맛있는 간식거리가 되었다. 그 시절 이것도 중요한 영양원이 되었으며, 자라는 어린이 성장 발육에 큰 도움이 되었다”
찔레순이 중요한 영양원이고 성장발육에 큰 도움이 되었다니
이렇게 찔레를 배고픔을 채워 준 영양식으로 간주해 버린 이 택도 없는 기사는 “찔레꽃 하얀 꽃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하나씩 따먹었다오” 따위의 시골 물정 모르는 도시 사람을 이르는 시골 사람들의 우스갯말로 “서울 촌놈” 식의 노랫말의 영향으로 쓴 책상물림 글이 아니겠는가? 찔레가 지천도 아니고, 대체 찔레순이 얼마나 맛이 좋아 매우 맛있는 간식거리요, 한 해에 잘해야 네댓 개나 먹었을 찔레순이 식량이며, 중요한 영양원이 되고, 성장발육에 큰 도움이 되었단 말인가?
그 시절 아이들은 고픈 배를 채우려고 찔레를 찾아다니며 찔레순을 꺾어 먹은 게 아니다. 지금의 아이들이 게임기나 스마트 폰을 가지고 놀 듯, 놀이로 진달래꽃을 따 먹고, 찔레도 꺾어 먹고, 산딸기 따 먹으러 다니고, 개구리도 잡고 가재도 잡은 거다. 이를테면 그 시절 아이들에게는 진달래 꽃이나 산딸기가 스마트 폰이었던 셈이다.
더군다나 찔레꽃 피고, 찔레순이 돋아나는 때는 춘궁기가 아니다. 찔레꽃이 필무렵은 모내기 철이다. 흔한 뽕나무에 오돌개가 무르익고, 밀보리가 여물 무렵이다. 맛있는 오디를 입과 입성이 검게 물들게 실컷 따먹고, 밀과 쌀보리를 그슬려 먹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툭하면 냇가에서 천렵을 하는 때이다. 왜 진짜 맛있는 오디를 두고 찔레순으로 배를 채우겠으며, 물고기나 개구리, 가재나 메뚜기를 잡아먹던 것이라면 몰라도, 찔레순이 아이들의 영양원이고 성장발육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건 실소를 금치 못할 황당한 이야기이다.
황당한 미듭 새끼 이야기
듣기만 했을 뿐 보지도 경험하지 못했고, 그래서 알아도 실상은 모르는 이야기를 쓰거나, 학자들의 책상 물림식의 글이 이런 웃지 못할 오류를 범한다는 사례 하나를 더 들어 보겠다.
필자의 고향은 유명한 인삼 산지로, 칠십 년대만 해도 인삼 농사를 지으려면 가을에 베어 말려둔 미듭으로 겨울에 새끼를 꼬아야 했다. 미듭은 가는 새끼를 꼬는데 적합할 뿐만 아니라, 매끄러워 습기에 강하여 인삼 발을 매는데 제격이다.
동향인이 반갑게도 이 미듭에 대한 이야기를 올렸는데, 그가 인삼 발을 매던 미듭이라며 올린 사진은 미듭이 아닌 각시 풀로도 불리는 그늘 사초이었던 것이다! 그는 인삼의 고장에서 태어나 미듭을 들어서 알기는 하지만, 한 번도 미듭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인삼 발을 비닐 그늘막이 대신하고 있어서 미듭 새끼가 전설이 되어버린 때에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의 15개의 책장에 차는 장서 중에서 참 잘 샀다고 생각하는 책 중의 하나가, 뿌리 깊은 나무사가 발행한 11권으로 된 「한국의 발견 한반도와 한국 사람」이라는 인문 지리서이다. 이 책 전라북도 편 무주군 기사에 기자는 미듭을 이렇게 썼다. “미듭 새끼는 미듭 나무를 베어다가 껍질을 벗겨서 만든 새끼줄로 150미터 한 타래에 50원쯤 받는데 인삼 발을 역는데 쓰인다”
그러나 미듭은 목木이 아닌 초草본이다. 미듭 나무를 베어다가 껍질을 벗겨 만든 새끼줄 운운은 엉토당토 않다. 나는 이 기사를 읽고 친절하게 미듭은 목이 아니라, 초라고 출판사에 전화를 했다. 여자분이 전화를 받았는데, 이분 대답은 무례를 넘어 황당 그 자체였다. ‘어쩌라고요, 이미 책이 나갔는데’ “기막힌다”는 이런 경우에 쓰는 말일 게다.
왜 이런 귀엽지만 황당한 기사를 썼을까? 분명 그 기자는 나무 해 오듯 산에서 미듭을 해와서 새끼를 꼰다는 주민의 설명을 듣기만 하고, 미듭을 실제로 보지 않았고, 나무해 온다는 말을 장작감을 해오는 것을 알아서, 풀인 미듭을 나무로 오해하여 합리적 상상력을 발휘해 껍질을 벗겨 새끼를 꼰다고 했음이 분명하다, 나무 도감에서 이런 오류가 적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터이다.
베이비 부머 세대가 아닌 이들이 “그 많던 싱아”로 상징되는 이야기를 쓰는 건 이런 웃지 못할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며, 식물이나 나무 도감, 풍속에 대한 글을 쓰거나, 사전을 만드는 이들도 이런 책상물림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이런 오류를 피할 수 없다는 걸 알아 두었으면 한다.
다행인 건, 동심을 자극하는 싱아의 추억에 대한 이런 식의 오류는 개인이나 사회에 해악이 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들은 것과 실제로 아는 것 사이에서 발생하는 오류를 쓰고 전파하는 건 개인과 사회에 심각한 해악을 가져옴을 깊이 유념해야 할 것이다.
소셜 미디어 시대의 정보 홍수에 이런 식의 “카더라 통신”이나, 본의 아니게 가짜 뉴스 생산자의 대열에 들고, 기여하는 불행에서 우린 자신을 구원해야 하지 않을까? 신앙의 세계는 더욱더 그러하다, 무릇 신앙이란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것이 아니라, 들은 바를 읽고 공부하여 자신이 스스로 진리로 확증한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