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강해

욥을 황무지로 만드심

아브라함-la 2024. 8. 4. 15:35

024,8,4, 주일

본문 : 욥2:1-13

말씀 : 라인권목사

 

평강입니다. 파리 올림픽에서 우리 양궁선수들이 단체전에서 열 번째 금메달을 석권하고 개인전도 금은을 차지했습니다. 이로 오직 실력만으로 공정하게 선수를 선발하는 양궁협회의 리더쉽이 금메달감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공정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공정해서 우리 국민들은 맘껏 기량을 떨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욥도 금메달감입니다. 사탄은 좋은 날에 군대같이 욥의 재산과 자녀를 빼앗았지만, 욥은 입술로 범죄한 것이 아니라, 인격과 이성과 신앙으로 반응해서 멋지게 사탄을 패배시켰기 때문입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으로 왔으니 적신으로 돌아가올지라, 주신이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이다“ 얼마나 멋집니까? 통쾌한 승리입니다. 금메달감입니다. 이제 남은 일은 욥이 시상대에 올라가서 금메달을 받는 일뿐입니다.

 

금메달이 아니라 더 맞아야 할 욥

그런데 이 찬란한 욥의 승리를 조명하던 욥기의 연출자가 장면을 하늘로 바꿉니다. 하늘에서 보니 보이는 욥의 승리가 전부가 아닙니다. 땅에서 본 욥은 고난의 시험에서 승리하여 온전해진 것 같으나, 하늘에서 하나님이 보신 욥은 재산과 자녀들을 거두기 이전의 상태로 그대로 있었다는 겁니다. 재산과 자녀를 거두게 하신 하나님의 시험의 목적이 이루어지 않았다는 거지요, 욥을 시험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면, 욥의 건강을 치는 이 세 번째 시험은 필요치 않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본 욥은 시상대에서 금메달을 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더 호되게 맞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욥기 1장 4막은 세 번째의 큰 고난의 파도가 욥에게 몰려오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겨냥하신 타켓 –자기 의

그러면 우리 하나님께서 욥의 재산과 자녀들을 거두시고, 이제 건강으로 치시는 타켓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무엇을 깨 주시고, 부셔주시려고, 재물과 자녀로 치시다가 이제 건강을 치시냐는 겁니다. 그게 바로 욥이 자기를 옳게 여기는 자기 의라는 겁니다. 욥27:5-6을 봅시다. 욥은 죄를 인정하고 겸손히 회개하라는 친구들의 공박에 ”나는 결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내가 죽기 전에는 나의 온전함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내 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내 마음이 나의 생애를 비웃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자기 의는 욥의 성이었습니다. (30:14) 친구들이 이 성을 부수려고 한다는 겁니다. 내가 의롭다! 이게 욥의 성입니다.

 

자기 의의 치명성

이 자기 의가 왜 문제입니까? 첫째, 자기 의는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자기 자기를 하나님과 비겨서 하나님의 자리로 올리려고 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둘째, 자기 의는 자력적 자존적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자기 의가 있는 한 하나님을 의존할 수 없습니다. 이 자기가 죽어야 하나님이 하실 수가 있습니다. 셋째, 자기 의는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받으려면 자기가 기품 있는 의인이 아니라, 한 사람의 가련한 죄인으로 나와야 합니다. 자기 의는 하나님의 의를 대적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자기 의가 치명적입니다.

 

이게 욥의 문제입니다. 지금 욥은 가련한 죄인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기품있는 의인으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걸 깨닫게 해 주시려고, 재산을 치시고, 자녀를 치셨지만, 욥은 이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사실 욥은 욥의 건강을 치는 사탄의 두 번째 공격에도 자기를 의롭게 여기는 이교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마치 나아만이 나병이면서도 고침 받을 불쌍한 나병환자가 아니라, 아람의 군대 장관으로 오는 것 같이, 욥은 하나님께 맞으면서도 기품있는 의인으로 있습니다. 이 욥이 죽어야 하는 겁니다.

 

여러분! 이게 하늘에서 본 욥입니다. 하늘에서 본 욥은 금메달을 받을 시상대에 오를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시험을 승리한 사람 같으나, 그 시험의 목적에 실패했다는 겁니다,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 진 겁니다. 의로운 욥이 죽어야 하는데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욥은 더 큰 매를 맞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욥을 깨 주시려고 어떻게 때리십니까?

 

욥을 황무지로 만드시는 하나님

헹스텐베르그는 그의 욥기 해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이런 교만은 설 때리면 안 되고 가차 없이 예리하게 때려야 치료되는 병이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입니다. 설 때면 죄를 버리지 않습니다. 고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설 때리면 효과도 없을뿐더러, 더 많이 장기간을 때리게 됩니다. 이건 고치는 데 아니라 더 악화시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리실 때에 설 때리시지 않고 가차 없이 예리하게 때려 주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입니다. 그러면 재산과 자녀를 처도 깨닫지 못한 욥을 어느 정도 때려 주셨습니까? 한 마디로 욥을 황무케 만들어 버리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자기 의를 고집하는 걸 깨닫지 못하는 걸 어떻게 때려 주십니까?

 

건강을 치면 황무해져

그게 건강을 치시는 겁니다. 사탄이 욥을 쳐서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하여 재 속에 앉아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게 만들었습니다. 카일과 델리취는 이 병이 상피병, 즉 코끼리 피부와 같이 되는 문둥병의 일종이라고 했습니다. 어떻든, 피부병은 우선 사람을 추하고 비루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피부병은 사람을 가장 고통스럽게 합니다. 밤에는 더 가렵고 고통스럽니다, 그래서 기왓장으로 긁은 겁니다.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즉 병중에 가장 괴롭고 고통스러운 병으로 치셨습니다.

 

왜 사람을 황무지로 만들 때 건강을 치십니까? 건강과 소유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재산과 자녀는 본래 욥의 소유가 아닌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은 욥에 맡긴 당신의 것을 회수하셨습니다. 따라서 욥은 하나도 잃은 게 없습니다. 그래서 욥도 소유를 상실한 것으로 시험 들어 입술로 범죄 하지 않은 겁니다. 그러나 건강은 다릅니다, 건강은 곧 몸입니다. 가죽을 가죽으로 바꾼다, 건강을 위해서 가죽의 일부를 포기하여 생명을 지킵니다. 이 건강은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이걸 잃으면 다른 모든 게 의미가 없습니다, 건강을 잃을 때 인생은 황무해집니다. 이게 재산이 아니라 건강을 잃으면 신앙에 귀의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때려 주십니다.

 

아내가 사탄의 가시가 되게 하여

아내를 잃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되자 아내가 사탄의 일을 대신합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합니다. 죽는 것이 욥에게 가장 좋은 길이라는 것이지요. 그 어느 때보다 아내가 필요할 때에 아내를 잃습니다. 이것처럼 사람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이 없다는 걸 부부싸움 하신 분은 잘 압니다. 욥이 마치 소크라테스가 악처로 소문난 아내를 대하듯 고상하게 “복도 받았으니 화도 받는다” 했지만, 욥은 삶이 싫었을 겁니다. 배우자가 가시가 되는 것 이것처럼 사람을 황폐케 하는 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아프게 때리십니다. 고난이 오면 배우자가 사탄의 돌이 되는 겁니다. 배우자가 사탄의 돌이 되는 건 비극입니다. 우리가 이걸 알아야 합니다.

 

친구가 정죄자가 되게 하여

이렇게 아내가 가시가 되어도 입술로 범죄치 않는 욥에게 욥이 입술로 범죄하게 하는 결정타가 옵니다. 그게 욥의 친구들입니다. 아내가 사탄의 사자가 되어도 입술로 범죄치 않던 욥이 친구들이 온 후에 생일을 저주했습니다. 입술로 범죄 한 겁니다, 친구는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고, 좋은 친구는 위태할 때를 위해서 있습니다. 이 친구들이 정죄자 되어 쓸모없는 의원이 되어 버렸습니다. 친구를 잃은 겁니다. 친구가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대화가 안 됩니다. 이것처럼 죽을 맛이 없습니다, 이것처럼 사람을 황무하게 하는 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때려주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입니다. 헹스텐베르그의 말처럼 하나님은 가차 없이 예리하게 때려서 욥을 전실케 했습니다. 욥의 인생을 황무지로 만들었다는 거지요. 하나님은 이렇게 욥을 황무지가 되게 때려 주셨습니다, 기품 있는 의인 욥을 이렇게 죽여서 가련한 죄인으로 서게 하셔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 이르게 하려 한 겁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사람이 온 천하를 얻어도 제 생명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오.” 이게 욥에 오실의 고난을 주신 까닭입니다. 이게 욥기의 메시지입니다. 인생은 이렇게 황무해야만 십자가 앞에 나오는 겁니다. 자기 부정이 믿음의 본질인 것입니다.

 

우리 한국의 기독교 작가 중에 정연희 씨가 있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양화진> 등이 이분 작품입니다. 이분은 이대 출신입니다. 이분이 이대를 다닐 때에 이대의 기독교적 분위기가 본능적으로 싫었답니다. 이런 그가 <파류상>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고, 윤동주, 김동리 문학상 등 한국의 문학상들을 섭렵하며 승승장구했습니다. 이런 자기가 지금 민속촌 입구의 시골교회 주일학교에서 아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인생을 황무지로 만들어 세상 명리가 뜬구름인 것을 깨닫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썼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인생을 황무지로 만들어서라도 그리스도에게 이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독생하신 아들을 내주시게 했습니다. 이 십자가는 죄인으로 심히 죄인이 되게 하는 겁니다. 아직도 자기가 죽지 못해서 기품 있는 의인으로 교회 안에 있다면, 이 하나님 사랑의 열심으로 십자자 앞으로 이끌어 주셔서, 십자가 앞에서 크게 죄인이 되어 기품 있는 의인인 나는 죽고 가련한 죄인이 되어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