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강해

욥을 지탱한 기둥

아브라함-la 2024. 8. 18. 19:21

024,8,18, 주일

본문 : 욥3:1-26

말씀 : 라인권목사

 

이번 주가 처서인데, 더위가 걷힐지를 모릅니다. 시편에 성전에 나가는 순례의 길에는 눈물 골짜기가 많은 샘의 곳이 되고,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신다고 하신 것 같이, 오늘 예배에 오신 분들에게 이 더위도 은택이 되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지난 시간에 하나님께서 욥을 광야로 만드셔도, 입술로 범죄치 않던 욥이 돌변해서 생일을 저주한 것은 욥의 세 친구들의 말 없는 정죄 때문임을 말씀드렸습니다. 말이 아니라, 눈치로 정죄하는 것이 욥을 비참하게 만들었고, 욥의 화를 발작시켜 생일을 저주하게 한 겁니다.

 

욥을 지탱해 준 자기 의라는 기둥

이렇게 욥이 친구들의 정죄 앞에 발작해서 맥없이 무너졌다는 것은 지금까지 욥을 지탱해 준 기둥, 또는 욥의 최후의 보루가 욥이  “죽어도 놓지 않다는 자기 의”였다는 것입니다.(27:6) 이 자기 의가 욥의 성이었습니다.(30:14) 자기가 옳다는 자부심이 욥의 그 참혹한 재앙을 의연히 버티게 하는 기둥이요, 보루였다는 겁니다. 친구들이 이걸 공격하니 발작해서 생일을 저주한 겁니다. 내가 옳다는 욥의 긍지가 지금까지 욥을 지탱해 준 기둥이었다는 데서 우리가 먼저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칭의 교리의 유익

그게 소위 칭의의 교리의 유익입니다. 우리는 칭의를 구원론적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칭의의 교리와 같이 사람을 강하게 하는 건 없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진술입니다. 조상 아브라함의 사례도 있지만, 시간상 다윗의 사례를 봅시다. 다윗에게는 왕이 되는 것이 소명입니다. 이 하나님의 소명을 순종하는 것은 사울과 그 무리와 무지한 백성들에게 비루한 반역입니다. 저 유명한 시 22편은 이 고통을 배경으로 한 겁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이니다”고 했습니다.(시22:6) 다윗의 이 고통을  인내하고, 이기게 한 것이 칭의의 은혜였습니다. 

 

시편 4편을 봅시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 다윗은 자기 의가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의로 삼았습니다.(1) 내 의의 하나님! 이게 시편의 중심 사상입니다.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2) 여기의 나의 영광은 왕직입니다. 이 영광의 소명을 반역으로 욕되게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왕으로 택하신 것을 알게 할 날이 올 거라고 합니다.(3) 다윗은  이 고난이  의로운 고난이며, 대리적인 고난으로 확신한 겁니다.  이것이 사울의  긴 박해의  고통에서 다윗을 지탱해 준 기둥이었습니다.  이것이 사도바울로 하여금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 나를 누가 정죄할 수 있냐? 환난이나 칼이나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다'.(롬 8:33-36)고 개가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욥은 아직 이 칭의를 모른 사람입니다. 욥의 의는 이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자연법인 도덕적으로 흠이 없고, 의롭다는 자기 확신일 뿐입니다. 이 상대적인 의가 욥으로 하여금 재앙의 날에도 의연하게 예배하고 찬송하게 한 겁니다. 신앙이 아닌 신념과 도덕적 깨끗함도 이런 능이 있음을 충의 지사들에게서 분명히 보지 않습니까? 깨끗함과 옳음이 이렇게 든든한 기둥이요 보루입니다. 따라서 적어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요, 예수의 제자라면, “내 마음이 나의 생애를 비웃지 아니하리라”(욥 27:6)는 욥처럼 내 양심 앞에 부끄러울 것 없고, 나도 나를 정죄할 수 없어야 하고, 만세 반석인 칭의 교리에 확고히 서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동시에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를 지탱하는 기둥이 가장 약한 부분

그게 자기도 자기를 정죄할 수 없는 깨끗함과 의가 그 어떤 고난도 흔들 수 없는 든든하고 견고한 기둥과 보루이지만, 바로 그것이 그 사람의 가장 약한 부분, 약점이라는 겁니다. ‘나는 옳다, 나는 죄 없다, 내가 옳은 건 하늘도 아시는 바다! 이걸 부정당하고. 이걸 공격당하고, 이게 무너지는 걸 못 참고 발작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겁니다. 욥이 그랬습니다. 재산이 날아가고, 자식 열이 죽어도 나는 옳다는 겁니다. 건강을 잃고, 아내가 원수가 되어도 나는 잘못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친구들이 이걸 부정하고, 공격하니 욥이 마치 작살 맞은 뱀장어같이 못 견디고 무너진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에게는 건드리면 큰일 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돈일 수도 있고, 명예일 수도 있고, 자존심일 수도 있지만. 그 핵심은 자기입니다. 자기가 부정당하면 못 견딥니다. 우리 정치인들 중에 서민, 민주, 정직, 청렴이 모토인 분들이 계셨습니다. 정직, 청렴이 이분들 존재의 기반입니다. 이런 분이 뒤로 정치자금 받은 게 드러났습니다. 솔직히 여의도의 다른 국회의원들 수준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만, 아파트에서 몸을 던졌습니다. 스스로 자기 존재를 부정한 것이 되었기 때문에 그 부끄러움을 못 견딘 겁니다. 우리가 이걸 알아야 합니다. 나의 옳은 것, 정의로운 것, 깨끗한 자기라는 것이 사실은 가장 약한 것입니다.

 

이걸 부정당하고, 이걸 공격당하고, 이걸 빼앗으면 발작 안 하는 사람 있습니까? 그러나 도덕인 나, 깨끗한 나, 의롭고 정직한 나, 내가 의로우면 얼마나 의롭습니까? 이게 든든한 기둥 같고 성벽 같지만, 사실은 더러운 옷이요, 마르는 잎사귀 같은 겁니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라고” 이게 선지자의 탄식입니다. (사 64:6) 사람의 정죄 앞에서도 인간의 의는 더러운 옷이 되고 마르는 잎사귀 같다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겠습니까? 그러므로 내 의를 기둥이 아니라, 의지할 수 없는 갈대 지팡이로 압시다. 인간의 의를 견고한 성이 아니라, 무너지는 울타리요, 한낱 검불로 압시다. 이것이 은혜받는 길입니다. 한 줌도 안 되는 인간의 의가 아니라, 예수라는 의를 기둥이 되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교만한 성자임을 폭로

따라서 욥이 친구들의 정죄에 발작해서 생일을 저주하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 것은 자신이 교만한 성자임을 스스로 폭로한 겁니다. 성자는 자기를 거룩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죄인으로 아는 사람입니다. 박해자 사울이 사도가 되었을 때에 바울은 나는 사도들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했습니다. 이 바울이 순교를 앞둔 성 바울이 되었을 때는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지요. 성화될수록 더 크게 죄인이 되는 것이 성자입니다. 오히려 “왜 사람들이 내게 돌을 던지지 않는가?”라고 합니다. 은혜와 믿음, 성화는 이 겸손에 이르게 하는 겁니다.

 

따라서 욥이 자기 친구들의 정죄에 발작해서 생일을 저주한 건, 자기를 정죄에 합당한 죄인이 아니라, 거룩한 사람으로 안 겁니다. 헹그스텐 베르그의 해석같이 욥이 교만한 성자가 된 겁니다. 이걸 폭로한 겁니다. 만약 욥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지킬 것이나 주장 할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요,  애통하는 사람-자기 안에는 선한 것이 아니라, 죄뿐이라서 애통할 것 밖에 없는 사람이었다면, 친구들의 정죄를  달게 여겼을 겁니다. 구렁이도 제 몸 추는 겁니다. 욥이 이렇게 죽지 못한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의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먼 것을 스스로 폭로한 겁니다. 이게 욥이 맞아야 할 이유이고, 하나님의 욥을 황무지로 만드신 이유입니다.

 

자기 의를 이루려 하나님의 의를 대적함

문제는 욥이 이렇게 자신을 옳게 여기는 것이 회심 전 사도바울 같이 하나님의 의를 대적하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자기를 의롭게 하는 이 교만은 헹그스텐 베르그의 말과 설 때리면 안 되고, 예리하게 때려야 치료되는 병이므로 하나님께서 욥을 광야가 되도록 치신 겁니다. 이 매로 자기 의를 버리게 하셔서 믿음에 이르고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게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욥은 그 매를 맞으면서도  자신의 교만을 깨닫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고난에서 자기 의를 세우려고 경배하고 찬송하고 감사한 겁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열정주의로 순교한 것과 똑같은 겁니다. 이게 욥의 예배와 찬송과 감사의 진면목인 겁니다. 이렇게 욥이 하나님의 의를 대적했습니다. 이 욥의 의가 하나님의 의이신 그리스도를 받을 수 없는 상태로 있게 한 겁니다.

 

따라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지금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진단해야 합니다. 이 자기 진단에 사활이 걸려 있습니다. 내가 자기 의를 버리고, 죄인으로 자기가 죽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걸 알지 못하면 영원을 상실할 수도 있습니다. 이걸 분별하는 시금석이 있습니다.  내가 누구냐? 내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를 분별하는 시금석이 무엇일까요? 그게 바로 누가 내게 틀렸다고 하고, 나를 옳지 못하다고 할 때의 나의 반응입니다. 누가 내가 틀렸다고 할 때에 욥처럼 발작하고 방어 태세를 갖추어 받아치려고 한다면,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겁니다. 이게 시금석입니다. 지금 나는 내가 틀렸다고 할 때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이게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해야 할 문제입니다.  누가 나를 틀렸다고 할 때 아파서 못 견디고, 발작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십자가로 가야 할 사람입니다. 십자가 앞에 서면 나는 지킬 것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파산한 가난한 사람이 되고, 내 안에 선한 것은 없고 죄뿐이라서 애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때야 비로소 나의 의로움이 든든한 기둥이나 성벽이 아니라, 더러운 옷과 같고 마르는 잎사귀 같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둥이 되게 할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누가 나를 죄인이라고 하면 아직도 아파하는 우리를 성령께서 십자가 앞으로 데려가셔서, 천국에 이를 때까지 그 십자가 기둥을 의지하고 서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