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신학
024,10,27, 주일
본문 : 욥11:1-20
말씀 : 라인권목사
참 좋은 가을날입니다. 오늘 오후에 광화문에서 한다는 기도회는 성수주일 위반일 뿐만 아니라, 독재 시절 사회 참여는 자유주의라고 비판했던 것의 논리적 모순이며. 예배와 기도를 빙자한 정치 운동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죄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과 사도들의 방법이 아닙니다. 주님은 시위가 아니라, 말씀과 희생으로 하셨습니다. 지금 사회가 교회를 지탄하는 교회 악을 회개치 않으면서, 외인들의 특정 죄를 규탄하는 것은 바리새적 위선입니다. 이런 위선은 보수적인 한국 교회가 바리새인들 같이 도그마티즘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이 도그마티즘의 특징이 인간성 상실입니다.
본문의 욥에 대한 세 번째 공격자로 등장한 소발이 그랬습니다. 소발은 세 사람 중에 가장 젊고, 성급하고 격렬한 성품의 소유자입니다. 소발은 욥이 두 친구들의 권고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무죄한 자기에게 재앙을 내리시는 것은 부당한 처사라는 말에 격분했습니다. 소발은 이 끓어오르는 격분을 누르며 욥을 훈계하지만, 이 소발의 훈계에는 주머니의 송곳이 나오듯 그의 격분이 삐져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소발이 욥을 어떤 말로 훈계했는지를 정리합시다.
소발의 연설
먼저 소발은 욥이 하나님 앞에 말이 많은 것이 지혜롭지 못하고, 어리석고 경건치 못한 일이라고 꾸짖습니다.(11:2-3) 참된 경건은 하나님 앞에 잠잠하고 말을 적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10:1213) 둘째 소발은 욥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는 깨끗하다는 주장을 망령되다고 꾸짖습니다.(4) 셋째, 소발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재앙을 내리신 것이 옳다고 옹호합니다. 욥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 말씀하시고, 자기를 보이시면, 욥의 죄가 드러나 욥이 받은 재앙은 욥의 죄에 비해 너무 가벼운 것임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6) 엘리바스는 욥의 자식들의 죽음을 “인과응보”라고 했고, 빌닷은 “하나님의 정의”라고 연역적으로 말했지만, 소발은 우리 식으로 하면 “맞아도 싸다.”고 한 겁니다.
넷째, 소발은 하나님은 결코 의인에게는 재앙을 내리시지 않는다며, 하나님의 지혜를 찬란하게 설파합니다.(5-11) 하나님의 지혜는 측량할 수 없게 오묘하며, 높이로 하면 하늘보다 높고, 깊이로는 스올보다 깊고, 크기로는 땅과 바다보다 크시니 의인이 재앙을 받을 일은 있을 수가 없다는 거지요. 모든 재앙은 다 하나님의 정의다고 예외를 인정하지 않은 겁니다. 따라서 욥이 하나님 앞에 자기를 의롭게 여기는 것은 허영과 교만에 빠진 허망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허망이라는 말은 텅 비다, 공허, 헛되다는 뜻입니다. 머리에 든 것이 없다는 겁니다. 머리에 든 것이 없는 자는 다시 태어나도 나귀가 새끼를 낳아도 나귀인 것 같이 지각 있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없는 구제 불능이라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소발은 회개의 축복과 악인의 멸망을 아름다운 시적 어휘로 전했습니다. 네가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켜 네 손에 있는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고난 중에서 욥이 바라는 축복을 주실 것이요, 고집하고 회개치 않는다면 멸망이라는 악인의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된다는 엄한 경고로 말을 맺습니다.(13-20)
인간에 대한 이해가 결여됨
이 소발의 강연에는 하나님과 진리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격렬하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옹호하기 위해서 열자식이 죽은 걸 벌이 약했다고 하고, 머리에 든 것이 없다고 할 정도입니다. 소발도 앞의 두사람 같이 탁월한 연설가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회개하면 임할 복과 악인의 피할 수 없는 심판을 이슬 같은 어휘로 인상 깊게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 소발의 연설에는 신학은 있으나, 그 신학에 인격이 없고,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습니다. 고난을 당하는 친구 욥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렇게 인간성, 인격을 상실한 소발의 신학은 해답은 되지 못하며, 도리어 욥의 고뇌와 괴로움을 더하는 쓸데없는 의원이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신학은 왜 생명이 안되고 쓸모없는 의원이 되게 합니까?
첫째, 인간 이해가 없는 신학은 인간을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 심판의 대상으로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하나님과 소발의 차이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아들 예수를 보내신 것은 인간을 이해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어쩔 수 없음을 이해하시기 때문에 심판하시기보다 살리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벌을 주기 위해서 고난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돌이켜서 살도록 고난을 주십니다. 의인에게도 완전케 하시려고 고난을 주십니다. 즉 공의는 구원의 요청인 겁니다.
그런데 소발은 욥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욥의 경건에는 눈을 감고, 욥이 재앙을 받았으니 악인이요. 회개치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는 겁니다. 즉 악인을 구원의 대상이 아닌 심판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게 지금 광화문에 모이는 기독교인들의 특징입니다. 이들은 좌파와 동성애자들을 구령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타도의 대상, 척결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한 영혼, 잃어버린 영혼으로 대하지 않으니, 교리와 신학을 쓸데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처럼 사람을 이해합시다. 우리 신앙과 신학에 인격이 있게 하여 사람을 구원의 대상으로 대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인격을 가진 신학과 전파는 생명을 주고, 전파하는 복음이 효과적이 될 줄로 믿습니다.
둘째, 인간 이해가 없는 신앙과 신학은 사람으로 하여금 인간성을 상실케 하기 때문입니다. 소발은 욥에게 열 자 식이 죽은 걸 ‘너는 맞아도 싸다’고 했습니다. 머리가 텅 비어서 아무리 거듭나도 들나귀 새끼 같은 상태를 면할 수 없는 구제 불능이라고 했습니다. 한 인간에 대한 배려가 없습니다. 이렇게 무자비한 사람이 된 것은 그렇게 말하는 것이 하나님 편을 드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를 의로 알고 신앙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한 인간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욥이 경건하다는 사실에는 눈을 감아버리고 욥을 잡았습니다. 말하자면 너무 신적이고 너무 신령해서 인간성을 잃은 겁니다.
이게 바리새들과 세상 이야기가 아니라, 교회 이야기입니다. 로마에 박해를 받던 교회가 국교가 되자, 진리를 보존한다며 교회가 악마적으로 사람을 고문하고 살해했습니다. 이게 로마교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미국 펜실베니아주의 랭커스터에는 아미시라는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있습니다. 이들은 극단적인 재세례파라서 스위스에서조차 개혁교회가 이들을 화형에 처했습니다. 이 박해를 피해서 아미시들이 미국에 온 겁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교리 논쟁을 할 때에 보수주의자들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이단으로 여기고, 자유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들을 무지한 짐승 취급했습니다. 지금도 광화문에 모이는 이들은 마치 육이오 전후 같은 적의와 증오를 드러내고 있는 중입니다. 이렇게 인간성을 상실한 교리와 신학은 소발의 연설 같이 쓸모없는 것이 됩니다. 신앙, 교리, 신학은 인격적일 때에 생명이 됩니다. 인간성이 없는 신학은 생명이 아니라, 폭력이 됩니다. 믿음은 언제나 인격적인 겁니다. 인간을 이해합시다. 인간을 배려합시다. 그래서 우리 신앙과 신학이 인격적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인간 이해가 없는 신학은 독단적이며, 무례한 기독교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소발은 독단의 전형입니다. 무례하기 짝이 없습니다, 설령 소발의 공의론이 완벽한 것이라도, 여러분이 욥이라면 소발의 말에 아멘 하겠습니까? 싸우려고 할 겁니다. 한 사람의 진리 지식과 신학이 완벽한 것이라 할지라도, 자기를 신학의 지존인 양 행세하며 무례하기 짝이 없고 무자비하다면 누가 그걸 수용하겠습니까? 영화 밀양은 이런 무례한 기독교를 풍자한 겁니다. 무례한 기독교는 거룩한 진리를 만화로 만들고,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할 뿐입니다.
왜 우리 예수님이 세리들과 친구가 되셨습니까? 세리들을 죄인으로 경멸하는 유대인들과 달리 예절이라는 인격으로 대하셨기 때문입니다. 세리를 한 사람으로 이해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예절이 친구가 되게 하여 복음 전파가 효력적이 되게 하신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유대인에게는 유대인 같이 이방인에게는 이방인 같이 된다고 한 겁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신학은 인격적이었다는 겁니다. 교리, 신학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리와 신학은 인격적이여야 합니다. 그래서 저 어거스틴이 자기라는 사람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하신 거지요. 이게 신학에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예절이라는 인격을 잃은 무례한 교리와 신학은 완벽해도 사람을 살리지 못하는 쓸데없는 의원이 되게 한다는 걸 잊지 맙시다.
은혜로 가족 여러분! 우리가 자칫하면 하나님과 진리를 위한다며, 인간성을 상실하고, 비인격적인 일을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가공한 죄를 깨는 것은 오직 하나 죄에 빠진 인간을 이해하여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사렛 시림 예수같이 사람을 아는 진솔한 한 인간이 되는 겁니다. 이 사람은 비록 신학적 소양이나 철학적 소양이 부족해도 이 세상의 고통하는 사람을 치유하고 세우는 목회적인 그리스도인 되게 한다고 믿습니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