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강해

중보자를 믿는 믿음에 이른 욥

아브라함-la 2024. 12. 17. 09:35

024,12,15

본문 : 욥16:1-22

말씀 : 라인권목사

 

살아 계신 하나님의 놀라운 심판의 권능을 찬양합시다. 지난 주간 다시 우리 하나님은 그 심판과 구원을 찬란하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꼭 출애굽기가 재현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완악한 자는 바로와 같이 그 완악함과 강퍅함으로 망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중보자를 믿는 믿음에 이른 욥

오늘의 본문은 2회전 첫 주자인 엘리바스의 말에 대한 욥의 반론입니다, 이 첫 번째 욥의 말은 친구들에 대하여 말한 건 1-5까지1-5 뿐이고 다 하나님을 향하여 한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드디어 욥이 중보자를 믿는데 이른 것을 봅니다. 19절은 욥의 신앙고백입니다.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데 계신다며, 이 중보자께서 욥 자신과 하나님 사이와 자신과 친구들 사이를 중재해 주시기를 탄원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욥이 중보자를 믿는 신앙에 이른 겁니다. 이렇게 욥이 중보자를 믿지만, 22절에서 보듯 죽음을 슬퍼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욥이 아직 이 중보자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욥은 이 중보자가 계시므로 자기 죽은 후라도 자기의 무죄를 증명해 주실 거라고 믿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아직 욥의 신앙은 온전하지 못합니다. 욥이 중보자를 믿지만, 마치 마르다가 부활을 믿지만 현재적으로는 믿지 못한 것 같이, 중보자가 현재적으로 자기를 의롭다 하실 것은 믿지 못하고 미래적으로 죽은 후에 자기의 무죄를 인정해 주실 것을 믿은 겁니다. 이렇게 욥의 신앙이 불완전하지만, 욥의 신앙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성장하고 있는 중입니다. 9장에서 중보자의 필요성을 느낀 욥이 이제는 그 중보자가 실제로 하늘에 계심을 믿는데 이르고. 19장에서는 그리스도를 보되 낯선 사람이 아니라 잘 아는 사람을 보듯 할 것이라는 믿음에 이릅니다. 이렇게 욥의 신앙이 중보자 그리스도를 아는 데로 발전하고, 더 가까이 다가서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욥이 어떻게 해서 중보자가 하늘에 계심을 믿게 되었는지를 본문에서 규명해야 합니다.

 

이 작업이 필요한 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서 보듯 신앙은 자동적이거나, 하루아침에 만하늘에 닿는 콩 나무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르에서 떡으로만 살 수 없게 되어 하나님을 찾는 영혼의 순례를 시작하여 하란까지 하나님을 추구해 오다가 하란에서 계시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즉 거듭나므로 믿는 건 순간적이지만 거듭남에 이르는 데는 과정이 있는 겁니다. 이 과정, 이 추구, 투쟁이 필요한 겁니다, 이게 우리가 욥이 어떻게 중보자를 믿는 데에 이르렀는지를 공부해야 할 이유요, 욥기를 공부할 이유인 겁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시간을 두고 세세히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욥은 어떻게 중보자 그리스도가 있으심을 믿는데 이르렀을까요?

 

그것은 욥이 사람에게서 자신의 무죄를 인정받는 것이 불가능함을 절감했기 때문입니다,

이게 1-5절의 내용입니다, 엘리바스의 두 번째 말은 첫 번째 말과 동일하게 악인이라서 형벌을 받고 있으니 회개하라는 건대, 그는 회개의 은혜가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임할 무서운 심판을 첫 번째보다 더 가혹하고, 더 끔찍하게 과장해서 말했습니다. 이 엘리바스의 말은 욥에게 두 가지 확신과 절망을 안겼습니다. 하나는 친구들이 욥 자기의 무죄함을 믿어주지 않는다는 걸 절감케 했고, 또 하나는 욥이 하나님을 상대로 자기의 무죄함을 주장하면, 친구들은 그 욥의 말을 욥 안에 있는 악을 드러내 주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욥은 이런 친구들에게서는 자기의 무죄를 인정받는 것이 불가능함을 확신하고 사람에게 절망한 겁니다. 그래서 욥은 친구들을 재난을 주는 위로자고 하고(2) 끝없는 변론만 계속될 뿐이라고 한 겁니다.(3) 사람에게서는 해결의 실마리가 없는 걸 확신케 되고, 사람에게서는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불가능해진 걸 절감한 겁니다. 사람에 대한 이 절망이 사람과 절연하고 하나님을 향하게 했고, 중보자를 믿게 한 겁니다.

 

중보자를 예비해 두심을 믿음

왜요, 욥은 자신의 무죄를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기를 원하지만, 그 하나님이 욥을 치시고 있기 때문에 그 하나님 앞에 무죄를 입증받고 의롭다고 하심을 받으려면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중보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처지를 아시고 자비를 베풀어-중보자가 중보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탄원(20,21) 한 것은 욥이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 시작한 증거임-서 하나님 당신과 사람 사이를 중보 할 중보자를 준비해 두셨다고 믿은 겁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를 보내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죄를 벌하셔야 하시므로 죄인인 사람을 살리려면 그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보 할 중보자 대속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독생하신 아들을 중보자로 보내셔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지시고 대신 형벌을 받게 하셔서 죄인 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신 겁니다. 이렇게 욥이 중보자의 필요성을 느끼고 하나님이 중보자를 예비하심을 믿은 것이 하나님께서 아들을 중보자로 보내신 것과 일치하는 겁니다. 19장에서 나의 대속자가 살아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에 설 것이라고 대속자를 믿었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사람이 아닌 그리스도께만 의롭다 함이

정리하면 욥은 사람에게서는 무죄를 인정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확신해서 사람에게서 절망했을 때에 비로소 자기를 의롭다고 하실 이는 하늘의 중보자뿐임을 알고 믿었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용서하고 의롭다 하실 이는 오직 예수뿐입니다, 십자가의 보배 피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 외에는 죄인을 의롭다고 할 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예수 앞에 나오려면 사람에게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불가능함을 절감하고 사람에 절망하고 절연해야 합니다. 사람에게서는 죄를 사함 받을 수 없고,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사람에게 절망하지 못하고 절연하지 못해서, 인간석가를 찾고, 모하메드를 찾고, 공자에게 가고, 심지어 허경영의 하늘 궁의 불로수를 찾는 겁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 같이 사람에게 절망하고 절연해야만 오직 예수뿐임을 알고 예수께로 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욥처럼 사람에게 절망하고 절연해서 하나님의 중보자이며 대속자이신 예수께 사죄와 칭의의 소망을 두고 예수께로 나오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렇게 중보자를 믿는 믿음은 사람에 절망하고 절연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겁니다. 따라서 욥의 친구들과 그들의 욥에 대한 불신과 정죄와 조롱은 욥으로 하여금 사람에게 절연하고 중보자 예수께 오게 하시는 은혜인 겁니다. 억울하고 분합니까? 세상에서 신원받을 길이 없습니까? 말하면 더 나쁜 사람이 됩니까? 그건 사람에게서는 사죄와 칭의를 받을 수 없다는 사인입니다. 사람에게 절연하고 중보자 예수께 오라는 하나님의 섭리적 부름입니다. 이 하나님의 부름으로 사람에게 절연하고 하나님의 중보자 예수께 소망을 두고 예수께 오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람에 대한 절망과 절연으로 나를 용서하고 의롭다 하실 이가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확신하고, 인간 종교와 절연하고, 나를 씻어 정하게 하시고 의롭다 하실 중보자 예수께로 나오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