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강해

중보자를 믿는 믿음에 이른 욥(3)

아브라함-la 2024. 12. 30. 21:00

024,12,29, 주일

본문 : 욥16:18-17:16

말씀 : 라인권목사

 

송년 주일입니다. 한 해 동안 가정과 나라와 교회를 지켜 주신 우리 성도들을 축복하셔서 새해를 복 되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송년 주일이지만 계속해서 욥이 중보자를 믿는 믿음에 이른 것을 공부하려고 합니다. 욥이 사람에게서 무죄를 인정받는 것이 불가능함을 절감했을 때에 중보자를 믿게 되고, 욥의 이중적인 고난이 욥으로 하여금 중보자를 믿게 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런 것을 “하나님의 섭리적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욥이 받은 고난과 그로 인한 사람들의 오해와 멸시가 욥으로 하여금 중보자의 필요성을 느끼게 만들고 중보자를 믿는 믿음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섭리가 욥에게 믿음을 일으켰고, 이 믿음이 중보자 그리스도에게 이르게 한 겁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욥의 신앙이 어떤 것이기에 중보자 그리스도에게 이르게 했는지를 공부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에게서만 의를 획득할 수 있다는 믿음 

첫째, 사람에게서는 의를 획득할 수 없고 하나님께로 서만이 의를 획득할 수 있다는 욥의 신앙이 중보자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이르게 했습니다. 이는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욥이 자기의 무죄를 주장하면 친구들은 그 말을 욥의 유죄의 증거로 보기 때문에 사람에게서 의를 인정받는 것이 불가능함을 확신하고 하나님께서 중보자의 중재를 통해서 자기의 무죄를 인정해 주시기를 바란 겁니다. 이 신앙이 17:3에서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욥이 하나님께 구한 보증물, 보주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죄 사함과 칭의를 받는 신앙입니다. 욥이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만 의를 인정받으려고 한 것 같이, 사람에게서는 사죄와 칭의가 나올 수 없고, 죄를 사하고 의롭다 하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중보자는 오직 예수뿐이십니다. 사람들이 허경영의 하늘 궁의 불로수를 사고, 이만희에게 가는 웃지 못 할 일을 하는 것은 사람에게 절망하지 못해섭니다. 그러므로 욥처럼 사람에게서 돌아서서 내 죄를 씻고 나를 의롭다 하실 이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 오시기를 축복합니다.

 

양심이 아닌 하나님의 인정만이

둘째, 양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의 무죄함을 인정해 주셔야만 자기가 의롭게 된다는 욥의 신앙이 중보자 그리스도에 이르게 한 신앙입니다. 16:17절은 욥의 양심의 소리입니다. 친구들이 자기를 악인으로 오해하고 멸시하지만, 욥의 양심은 내 손에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불의가 없고, 하나님께 대하여도 깨끗하다는 겁니다. 이렇게 욥의 양심이 나는 무죄하다고 외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만약 욥이 친구들의 충고에 굴복하여 죄 있다고 하면 욥은 자기 양심을 부인하고 속이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욥이 계속해서 자기의 양심을 따라서 무죄를 주장하면 친구들은 그걸 욥의 유죄의 증거라고 합니다. 그러면 욥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렇게 자기를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래 다 몰라 주어도 내 양심이 나를 죄 없다고 하니 그걸로 됐다. 나만 깨끗하면 되지’ 이렇게 자기를 위로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오해를 받거나 억울하면 이렇게 하지요. ‘누가 뭐래도 내 양심이 내 증인이다. 나만 깨끗하면 되지, 나는 무죄하고 옳다,’ 이렇게 스스로 자기를 위로합니다. 그러나 욥은 자기 양심이 죄 없다고 외치고 있어도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기의 무죄한 피를 갚아 주시고 인정해 주시기를 호소합니다. (18) 무슨 말이냐면 자기 양심이 아무리 자기를 깨끗하다고 해도,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지 않으면 깨끗하고 의로운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셔야만 무죄도 무죄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욥은 사람들은 조롱하지만, 눈물을 흘리면서 중보자께서 사람과 하나님 사이, 욥 자기와 하나님 사이를 중보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죄 없다고 만천하에 선포해 주시기를 탄원한 겁니다. 이 신앙이 중보자를 믿는 신앙이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는 신앙입니다. 이게 칭의 신앙과 본질이 같기 때문입니다.

 

욥이 양심이 자기를 무죄하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법정에서 죄 없다고 선포해야 무죄가 되고 의롭게 된다고 믿은 것과 같이 칭의는 중보자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를 예수의 대행과 대형을 그 사람의 한 것으로 치부해서 죄를 사하시고 의롭다고 하시는 법정적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양심이 아무리 나를 죄 없다고 해도 그 양심이 나를 의롭게 하지 못하고 깨끗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깨끗하다고 하시고 죄 없다고 하신 때에 비로소 의롭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세상은 양심이 자기를 의롭게 하는 것으로 알지만, 나를 깨끗하게 하고, 의롭게 하는 것은 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은 내가 옳다는 양심의 소리를 부인하고 하나님만 의롭다 하실 이로 믿는 겁니다. 그러므로 나는 도덕적인 사람이다, 나는 양심적인 사람이라는 헛된 위안제를 욥처럼 포기하고, 중보자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시고, 그 믿음으로 하나님께 사죄와 의롭다 함을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럼에도의 신앙이

셋째, 그럼에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중보자를 믿는 신앙이 이르게 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맞는 재앙이라는 고난과 이 고난 때문에 사람들의 오해와 멸시를 당하는 이중적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고난으로 욥은 하나님이 원수와 같이 되고, 사람 중에는 친구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받은 욥이 할 수 있는 일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절망해서 절망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던지, 아니면, 자기에게 원수 같은 하나님이시지만 그럼에도 그 하나님 속에 있을 선하심, 즉 자비와 사랑을 믿고 그 하나님을 향하여 높이 올라가려고 하는 겁니다. 이게 욥의 영혼의 투쟁입니다.

 

지금 욥에게 하나님은 자기를 원수같이 여기는 하나님이며, 자기를 버리는 하나님이고 때리는 하나님이시며 죽이시는 하나님 같습니다. 이게 시험이 만든 상상 속의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은 실존하시는 참 하나님과 대치되는 하나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그 하나님께 자기가 죽기 전에 죄 없다고 판결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건 욥이 원수 같은 하나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배후를 보는 겁니다. 원수 같은 하나님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배후에 있는 자비하신 사랑의 하나님을 보고, 그 선하신 하나님께서 중보자를 예비해 두신 걸 믿습니다. 그 중보자가 중재해서 자기를 죄인처럼 죽게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처럼 죽기 전에 자기를 의롭다고 하시기를 탄원하고 있는 겁니다. 이 그럼에도의 신앙이 욥의 신앙의 특징이고 이 그럼에도의 신앙은 선하신 하나님을 기반으로 한 신앙입니다. 이 신앙의 성격이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는 신앙과 본질적으로 같은 신앙입니다.

 

욥이 하나님이 원수 같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이 선하셔서 자기를 속이거나 버리지 않을 것을 믿은 것 같이, 사죄와 칭의를 받는 신앙은 죄를 심판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을 나를 용서하고 의롭다 하실 자비의 하나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욥이 선하신 자비의 하나님이 중보자를 예비하신 것을 믿은 것 같이 의롭다 함을 받는 신앙은 원수 된 사람에게 아들을 중보자로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믿는 겁니다. 사죄와 칭의를 받는 신앙은 내가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 받음에 합당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고 하실 것을 믿는 겁니다. 이렇게 그럼에도 믿는 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죄인일지라도 그럼에도 의롭게 하실 것을 믿는 겁니다. 이 그럼에도 신앙은 하나님의 선하신 자비와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는 그럼에로의 신앙으로 상상의 하나님을 벗어나시고, 죄인임에도 의롭다 하시는 그리스도를 믿는“그럼에도의 신앙”에 이르시기를 축복합니다.

 

절망속에서도 하나님의 인정만을 바람

넷째, 절망 속에서도 육신적인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실 것만 바라고 그것으로 만족하려는 신앙이 중보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17:12절은 친구들이 회개하면 밤이 대낮이 되고 빛이 밝아온다고 하지만, 욥은 이 어둠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나의 희망이 어디에 있느냐,(15) 내가 희망을 둘 곳은 스올에 내려가는 것뿐이라고 합니다. 희망마저 스올의 문으로 내려갔다고 합니다.(16) 완전한 절망입니다. 중보자를 믿는 욥이 이렇게 절망한 겁니다. 그러나 이 절망은 오히려 욥의 신앙과 기도의 소망을 증언하는 겁니다.

 

친구들은 병든 육신이 회복되고, 이전의 축복이 회복되는 날이 올 거라고 하지만, 욥은 이 세상에서의 축복을 바라지 않는다는 겁니다. 고대 죽게 된 욥에게 육신의 건강이나 축복은 위로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자기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만이 고대 죽을 자의 위로요 소망이라는 겁니다. 육신의 건강과 축복이 자기를 만족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만이 자기를 만족케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병으로 죽어도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해 주셔서 죄인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의인으로 죽게 해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이게 욥의 신앙이요 소망입니다.

 

이 욥의 신앙이 의롭다 함을 받는 신앙이요, 구원에 이르는 신앙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면 건강과 부귀영화가 의미가 없는 겁니다.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것이 죄를 사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의 보배 피로 됩니다. (벧전1:18) 한 사람이 죽음에 직면했을 때에 육신의 것이 위로가 되지 못하고, 의지와 소망이 되지 못합니다, 이 세상이 즐기는 재물로는 근심과 고초를 못 면하고 숨질 때에 위로를 못 얻습니다. 오직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만이 숨질 때에 위로이시고 의지와 소망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욥과 같이 고대 죽을 절망 속에서도 육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받으려는 이 믿음에 이르시기를 축복합니다. 육신의 것으로 사죄와 칭의와 영생을 함을 받을 수 없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사죄와 칭의와 영생을 받을 수 있음을 확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은혜로 가족 여러분! 이게 욥이 받은 갑절의 축복의 의미입니다. 육신의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만으로 만족하려는 신앙을 인쳐 주시려고, 친구들 앞에서 욥이 옳다 해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 의를 받음이 육신의 생명과 축복을 초월하는 축복임을 현재적으로 승인해 주시려고 갑절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게 오늘 송년 주일의 메시지입니다. 우리 인생은 어떤 형태로든 죽음에 이릅니다. 이 죽음 앞에서 의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은 오직 중보자 예수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종신할 때 위로와 의지가 되시고 소망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욥처럼 죽어도 죄인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은 의인으로 죽을 수 있도록 중보자이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에 굳게 서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욥과 같이 금생과 내생을 복되게 할 줄로 믿습니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