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강해

빌닷의 또 다른 오류

아브라함-la 2025. 1. 20. 20:31

025,1,19, 주일

본문 : 욥18:1-21

말씀 : 라인권목사

 

하나님의 사중계획 안에 있음을 축하드립니다. 지난 수요일에 우리 헌정사에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체포되고 오늘 구속되었습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가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게 오직 자기 자신만이 자기를 망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분은 누가 망하게 해서 망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내 죄만 나를 망하게 합니다. 내 죄가 아니면 그 누구도 나를 망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죄를 무서워하고 죄에 자신을 방임하지 않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욥, 악인의 집에 임할 형벌의 본보기

오늘의 말씀은 빌닷의 두 번째 연설입니다. 빌닷은 욥이 엘리바스의 두 번째 권고마저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길게 엘리바스의 말을 반박한 것에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말을 그치겠느냐” 는 책망으로 시작하여, 욥이라는 사람의 집이 어떻게 망했는지를 우회적으로 열거한 다음 이렇게 결론을 지었습니다. “참으로 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처소도 이러하니라” 불의한 자는 욥처럼 망한다는 겁니다. 욥이 받은 재앙을 후손들에게 악인의 집은 이렇게 망한다는 하나님의 형벌의 본보기라고 한 겁니다.

 

이 빌닷의 두 번째 연설은 짧지만 강력하고 인상적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무시하는 악인들에게는 이 빌닷의 말보다 유익한 경고는 없을 겁니다. 무엇보다 이 말은 욥을 돕기 위해서 한 말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옳고 유익한 경고가 욥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는 겁니다. 해당 사항이 없는 욥에게 빌닷이 첫 번 연설에서 ”재앙은 하니님의 정의”라는 교리를 섣부르게 욥에게 적용한 것은 그가 도그마티즘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지요. 이 빌닷이 두 번째 연설에서는 욥을 ”악인의 집에 임할 형벌의 본보기“로 단정해 버린 더 큰 오류에 빠졌습니다. 고난 중의 욥을 도우려 했던 빌닷이라는 사람을 이 지경에 이르게 한 빌닷의 또 다른 오류는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이 사람을 고치려는 교만

첫째, 사람이 교리와 지식과 말로 사람을 고치고 바꿀 수 있다는 교만이라는 오류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이 빌닷의 두 번째 연설은 ”악인의 장막은 없지리라“는 첫 번째 연설의 결론을 확대한 겁니다. 빌닷은 첫 번째 연설과 다르게 회개에 따르는 약속은 빼고, 오직 악인의 집에 임할 하나님의 무서운 형벌로 욥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19절이 대표적입니다. 후손도 없고, 후예도 없고 그가 거하던 곳에 남은 자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는 말은 집이 폐허가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지금도 베두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일입니다. 빌닷이 이렇게 악인의 집에 임할 형벌을 가장 무섭게 말한 것은 욥을 두렵게 해서 회개시키기 위해섭니다. 빌닷은 자신의 교리와 지식과 말로 욥을 고치려고 한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을 모르고, 교만하게도 사람을 하나님의 영역에 둔 비기독교적인 오류입니다.

 

사람이 몰라서 자기를 고치지 못합니까?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알기는 해도 행 할 능력은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도 고치지 못하고 타인도 못 고칩니다. 그래서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고치지 못하고, 부모가 자식을 고치지 못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고칠 수 있다면 예수님을 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을 고치는 건 사람이 아닌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의 교리와 지식과 말이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바꾸는 것은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겁니다. 목사가 성경을 강해하고, 제자 훈련하면 되는 줄로 알고 열심히 하다가 진이 빠집니다. 나중에 은혜로 된다는 걸 깨닫습니다. 이걸 인정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람의 지혜나 설득력이 있는 말이 아니라. 오직 성령과 확신으로 한다고 한 겁니다.(고전2:4)

 

그런데 발닷이 자기의 교리와 가르침으로 욥을 바꾸려 하고 한 겁니다. 사람의 자리에 있지 않고 하나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교만에 빠진 겁니다. 이게 빌닷으로 재앙이 없는 자기는 욥보다 의롭다는 상대적 의를 느끼게 했습니다. 이게 자기를 욥을 가르칠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 안 겁니다. 이 교만이 자신은 완전한 자처럼 근엄하게 회개를 강론하는 강론자 같이 교만하게 말했습니다. 이건 완전히 비기독교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을 도우려고 할 때에 믿음은 사람이 사람을 고칠 수 있다는 교만과 착각을 버리는 겁니다. 이때 우리는 겸손히 말하고, 하나님을 의지해서 말해서 사람이 위로받고 변화되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사랑의 영이 없는 교만한 말

둘째, 사랑의 영을 상실한 것이 옳고 아름다운 말로 가장 무서운 독설을 말하게 했습니다. 악의 빛은 꺼진다. 악인의 장막의 빛은 어두워진다. 악인의 발은 그물과 올가미에 걸리고, 그를 잡을 덫과 함정이 그 길목에 있다. 옳고 아름다운 말입니다. 그리고 빌닷은 우회적으로 말할 줄 알았습니다. 질병이 피부를 삼키고, 사망의 장자가 그 지체를 먹는다는 13절은 욥의 질병을 빗댄 겁니다. 의지하는 것들이 장막에서 뽑힌다. 욥의 재산이 날아간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유황이 그 처소에 뿌려진다, 하늘의 불로 우양과 종들이 탄 것을 말합니다. 밑으로 그 뿌리가 마르고, 위로 그 가지가 시들 것이다. 욥의 자식들이 다 죽어 후사가 없게 된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래서 욥을 기념하던 것은 사라지고 욥은 불의한 자의 집에 임할 형벌의 본보기로 남을 것이라고 합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요. 아름답게 말했지만, 사실은 이런 독설이 없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고전13:1-2이 그 답입니다, 천사의 말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예언하는 능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랑 없음이 교만하게 독설을 하게 한 겁니다. 마치 위선자 바리새인이 죄인들에게 말하듯 했습니다. 이 말에 회개할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의 영이 없는 소리는 사람을 고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버지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라고 합니다. 리차드 백스터는 죽어가는 사람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말하듯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죄 중에 있는 사람이나 고난당하는 사람을 도우려고 한다면 고난을 당하는 자 앞에서 상대적 의를 느끼고 가르치고 할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를 사랑의 막대기 아래 두어 사랑의 영이 차오르게 하여 사랑의 막대기 아래서 사랑의 영으로 말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자신을 신학의 종결자와 같이 아는 교만이

셋째, 하나님의 일부를 아는 것을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에 대한 지존으로 아는 교만 때문입니다. 가끔 특정 교리를 아는 걸 자신이 마치 신학의 지존 자이거나 종결자처럼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지금 빌닷이 이렇게 악인과 악인의 집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에 통달한 자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빌닷과 친구들은 이 하나님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우선 그들은 하나님을 악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만으로 알고 악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멸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심이 아니라 구원하시려고 아들을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의인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십니다. 그런데 빌닷은 악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전부인 것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일부를 아는 것을 전부 아는 것으로 아는 교만이 욥을 형벌의 본보기로 단정해 버리게 만든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빌닷은 고난을 하나님의 형벌로만 알았지 고난이 하나님의 사랑이심을 몰랐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욥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은 형벌이 아니라. 자기를 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이신 그리스도에게 이르게 하시려는 의도이십니다. 욥을 온전케 하시려는 겁니다. 이건 형벌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형벌로만 아니 욥을 형벌의 본보기라고 하는 오류에 빠지는 겁니다. 즉 친구들은 고난의 비밀을 아는 전문가처럼 행세하나 고난의 비밀을 모른 겁니다.

 

무엇보다도 빌닷은 하나님께서 욥을 형벌의 본보기로 삼기 위해서가 아니라, 위로와 소망의 본보기가 되게 하시려고 의로운 욥에게 고난을 주신 것을 몰랐습니다. 의로운 욥의 고난이 위로와 소망의 본보기가 되게 함이라는 건 고난 후에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기도를 받게 한 것과 욥이 받은 축복이 증명하는 겁니다. 신약성경도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약5:11)고 하셨습니다. 의로운 고난에서 승리한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후손이 그를 섬길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와서 그의 공의를 태어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시22:30,31) 의인의 고난의 위로와 소망과 구원의 본보기로 삼으셨다는 겁니다.

 

따라서 빌닷은 하나님도 모르고, 고난도 모르고 고난의 비밀도 목적도 몰랐다는 겁니다. 이걸 모르면서도 빌닷을 자기를 하나님 전문가로 신학의 종결자로 아는 교만에 빠져서 선생과 의원이 되어서 욥을 고치려고 한 겁니다. 그래서 고난 중의 욥을 돕는 것이 아니라, 욥을 더 고통하게 만들고 고뇌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꼴이 된 겁니다.

 

자! 여기에 죄 중에 있거나 고난 닥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돕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사람이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교만을 포기하고 겸손히 하나님을 신뢰합시다. 그리고 자기를 사랑의 막대기 아래에 데려갑니다. 사랑의 막대기 아래서 나는 가르치고 훈계할 자가 아니라, 위로할 사랑의 의무 아래 있는 자임을 명심하고, 사랑의 영으로 나갑시다.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다 아는 사람 같이 여기는 교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 예수님과 같이 겸손과 온유로 합시다. 이것이 죄 중에 있거나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을 세우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될 줄로 믿습니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