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강해

고통이 낳은 고통

아브라함-la 2025. 1. 27. 07:54

025,1,26, 주일

본문 : 욥 19:1-22

말씀 : 라인권목사

 

설 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명절이 하나님의 사중계획안에서 유익하고 행복한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욥 19장은 고난 중의 욥의 신앙이 절정에 이른 곳입니다. 25절에는 살아계신 대속자가 땅에 서신다는 신앙을 고백하고, 26절에는 부활의 소망이 고백되고, 27절에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보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19장 이후에 이런 고백은 없습니다.

 

욥을 절망시킨 고통은

그래서 제 계획은 욥의 이 신앙고백이 어떤 것이며,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데 이르렀나를 밝히는 것으로 19장을 마치려고 했습니다만, 오늘은 그에 앞서서 1-22절까지의 욥이 당한 고난이 낳은 고통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흔히 욥의 고난이라고 하면 재산을 잃은 것과 열 자식을 잃은 재앙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욥은 이 재앙 때문에 절망하여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했습니다. 욥이 생일을 저주한 것은 친구들의 정죄 때문이었습니다. 즉 재앙이 욥을 절망하게 하고 하나님을 원망케 한 것이 아니라 그 재앙이 낳은 고난으로 일컬어지는 고통이 욥을 절망케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하는 시험에 들게 한 겁니다.  

 

이게 고난의 위험입니다. 고난은 고난에서 또 다른 고통을 유발합니다. 고통이 고통을 낳는다는 겁니다. 고난당하는 사람을 못 견디게 만들고 절망과 죽게 하는 건 재앙 자체만이 아니라. 그 재앙에서 나오는 고통인 것입니다.  이 고통이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는 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그러면 고난이 낳은 고난, 욥과 같은 믿음의 사람도 절망케 하는 고통이 낳은 고통은 어떤 고난입니까?

 

가까운 사람의 정죄라는 폭행이

첫째, 가까운 사람들의 비난과  훈계와 정죄라는 폭행이 고통이 낳는 고통입니다. 사람이 큰 고난을 당하면 정죄의 대상이 된다는 거지요. 빌닷은 욥의 고난을 "하나님의 정의"라고 했다가 두 번째 연설에서는 “악인의 집에 임하는 하나님의 형벌의 본보기”라고까지 했습니다. 이 정죄하는 말의 고통을 호소하는 것이 1-6절입니다. 이 정죄가 욥의 마음을 괴롭히며 욥이라는 사람을 짓부수었습니다. (2) 이게 얼마나 아팠던지 이를 욥은  “학대”(3) “폭행”이라고  했고, (7)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했습니다. (21)  이 정죄의 폭행을 하나님처럼 했다고 합니다. (22) 하나님처럼 한다는 건 욥을 자기들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람으로 여겼다는 겁니다. 요즘 우리가 보는 교만한 검사가 피고인 다루듯 했다는 뜻입니다. 이 정죄가 고난이 낳는 고난이며 고통입니다. 

 

한 사람이 큰 고난을 당하면 세상은 그 사람을 나쁘게 봅니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들이 자기는 의롭다는 상대적 의를 느끼고, 이게 자기를 선생으로 알게 해서 선생의 자리에 앉아서 정죄하기를 마지않고, 이 사람들로부터 말이 펴져 나가서 그 사람을 말거리로 삼습니다. 이게 너무 고통스러워서 다윗은 구설의 다툼에서 벗어나기를 기도했고(시 31:20)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의인을 치는 거짓 입술이 벙어리가 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시 31:18) 내가 비둘기같이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서 광야에서 피난처를 찾고, 광야에 거하기를 구한 것도 이 구설의 아픔 때문이었습니다. (시 55:6-9) 사실은 이게 우리 교회가 환난 중일 때 제 심정이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잔인한 존재입니다. 내가 어려워지면 이 취급받습니다, 특히 부르심을 따르는 삶에는 이런 오해가 따른다는 걸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걸 알고 있어야 비난과 정죄라는 고통이 낳은 고통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고난 중에 고통하는 사람을 도와준다면서 이런 비인간적이고, 비기독교적인 태도로 고통 중의 사람을 더 아프게 하고 시험 들게 하는 이 악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악함을 알아야 우리는 고난당하는 사람 앞에서 자기를 사랑의 막대기 아래 둘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의 막대기 아래 두어서 고난당하는 사람을 정죄하고 싶어 하는 이 악에서 자기를 구원하고, 고통하는 사람에게 고통을 더하지 않고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고난의 시험이 만든 상상의 하나님이

둘째, 고난의 시험이 만들어 내는 상상의 하나님이 고통이 낳는 고통입니다. 이 고통을 호소하는 것이 6-12절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억울하게 하시 그물로 나를 에워싸셨다. (6) 내 길을 막고 어둡게 하시고, (8) 영광을 거두어 가시고(9) 죽게 하시고 희망을 나무 뽑듯 하시고(10) 원수처럼 진노하시고(11) 군대처럼 치셨다고 합니다.(12) 내게 원수 같은 하나님입니다. 이런 하나님은 실존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 하나님은 고난이 시험이 만들어 낸 상상 속의 하나님에 불과합니다. 이 상상의 하나님이 의혹과 의심과 회의를 불러일으킵니다. 내게 원수 같은 이 상상의 하나님이 절망이라는 고통에 빠지게 만듭니다.

 

그렇습니다. 이게 큰 환난을 통과한 당한 성도들의 경험입니다.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길을 막고 어둡게 하는 하나님이 되고, 복이 아니라 화를 주는 하나님이 되어버립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진노의 하나님이 되어버립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꼭 하나님이 나무에 올려놓고 흔드시는 것 같고, '내가 너더러 하라고 했냐? ' 이러시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때는 죽을 맛입니다. 왜요? 하나님을 환난 중의 의지이신 저 높은 바위로, 산성으로 방패로 신뢰해 왔습니다. 이렇게 의지하던 하나님이 내게 원수 같으시면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때의 하나님은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 아니라, 시험이 만든 상상 속의 하나님일 뿐입니다. 의혹과 시험이 되는 하나님은 시험이 만든 상상의 하나님일뿐입니다. 이걸 알아 두어야 합니다. 고난이 의혹의 하나님을 만들어 낸다는 걸 알아 두면 나를 억울하게 만드는 하나님, 길을 막고 어둡게 만드는 하나님,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죽게 하는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 아니라, 상상의 하나님으로 여기며 선하신 구원의 하나님을 생각하며  상상의 하나님이 주는 의혹과 절망의 고통과 싸워서 상상의 하나님을 깨고 선하신 구원의 하나님으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게 신앙의 투쟁입니다. 이 상상의 하나님 때문에 느끼는 고통과  의심과 회의에서 이 믿음의 투쟁을 기도로 합시다. 그래서 의심과 회의와 절망을 벗어나 확신과 소망의 빛에 이르시기를 축복합니다.

 

나 혼자라는 절대 고독이

셋째, 나 혼자라는 절대 고독이 고난이 낳는 고통입니다. 이 고통을 보여주는 것이 13-19절입니다. 사람이 고난을 당하면 형제들이 멀어지고,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낯선 사람이 됩니다.(13) 친척과 친지들이 버리고 잊습니다. (14) 심지어 가솔들도 낯선 사람으로 여기고 종도 무시하고, 가족인 아내가 숨결도 싫어하고 자식이 불쌍하게 봅니다. 아이들까지 업신여기고 가까운 친구들이 미워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원수가 됩니다. 즉 모든 사회적인 관계 인간관계가 끊겨서 나를 소외시켜 나 혼자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세상이 인심이 이렇습니다. 이게 고통이 낳은 고통입니다.

 

우리 교회가 환난 중에 있을 때에 제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제일 친하고 가까운 사람들이 모르는 사람같이 낯설게 됩니다. 가난하면 형제도 미워하니 친구는 벌써 없어졌다는 잠언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왜냐면 그냥 부담스럽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부정하게 봅니다. 불행을 불러오는 불길하고 재수 없는 사람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고난은 사람을 소외시킵니다. 나를 혼자로 만듭니다. 이걸 절대 고독이라고 합니다. 이 소외감에서 오는 고독이 카프카의 변신에서 보듯 건강을 잃은 것이나, 재물을 잃은 것보다 더 사람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리므로 이걸 알아 두어야 합니다. 이걸 모르면 환난 중에 사람에게 위로를 구하다가 가까운 사람이 낯선 사람이 되는 쓴맛을 보게 됩니다. 사람에게 위로를 구하면 결국은 실족합니다. 그러므로 큰 고난을 당하면 나 혼자되게 한다는 걸 잊지 맙니다. 이 절대 고독이라는 아픔으로 고독하게 하나님 앞에 섭시다. 이 고독으로 기도합시다. 이 믿음과 기도가 고통의 낳은 고통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아는 신앙에 이르게 할 줄로 믿습니다.

 

은혜로 가족 여러분! 고난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운명 같은 것입니다. 고난이 오면 고난이 나를 정죄의 대상로 만듭니다.  하나님이 내게 원수 같은 하나님이 됩니다. 아는 사람이 소외시켜서 나 혼자로 만듭니다.  이 고통이 낳은 고통이 우리를 회의와 절망에 빠져 죽게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이 고통과 투쟁해 나가는 겁니다. 여기에 맞서 싸워야만 신앙이 실제가 되고 성숙해집니다. 이 투쟁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을 아는데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 오늘의 본문의 결론이자 욥기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있는 이 고통이 낳은 고통을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과 인내와 기도로 욥처럼 싸워나갑시다. 원수 같은 하나님이라는 의심과 회의의 구름이 벗겨져서 구원하시는 선하신 사랑의 하나님이 되시기까지 신뢰와 기도로 싸워나갑시다. 이 거룩한 싸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아는 신앙이 되어 마침내 눈으로 보는 것 같이 하나님을 아는 신앙에 이르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