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생활의 성별
025,3,5 수요기도회
본문 : 레18:1-30
말씀 : 라인권목사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동성애와 차별금지법 문제로 70년대 미국교회와 같이 진보와 투쟁 중입니다.. 성 문제로 유력한 대권주자와 시장들이 정치 생명을 잃기도 하고, 성을 스포츠나 오락 같이 여겨서 성적 순결이나 혼인의 순결 같은 도덕적 개념이 비웃음 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세상의 이런 가치관에 휩쓸려서 교회 안에 동성애를 축복하는 목사도 있고 교회 안의 성폭력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면에서도 우리는 레위기로 돌아가야 합니다.
거룩의 둘번째 길 성생활의 성별에
본문 레18장은 성생활에서 성별을 규정한 말씀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성욕과 섹스를 거룩하게 하라는 겁니다. 이 성에 대한 규정이 먹는 음식 다음에 성화의 두 번째 규정으로 나왔다는데 주목을 해야 합니다. 왜 성경은 하나님의 거룩에 이르는 방안을 먹는 것 다음에 두셨을까요? 음식은 생존을 위한 겁니다. 즉 먹어야 삽니다. 그래서 우선 의식주에 관심이 있고, 의식주를 해결하는데 정력을 쏟습니다. 이게 생존본능입니다. 이 생존 본능이 채워지고 나면 일어 나는 본능이 자신의 유전자를 보존하려는 생식본능입니다. 이 성적 본능은 자연적입니다. 이 본능에서 나오는 성생활을 거룩하게 할때 거룩한 생활이 이루어 진다는 겁니다.
성은 선하고 창조적인 것
성이 자연적이라는 것은 죄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이성에 대한 성적 본능처럼 창조적이며 생산적인 건 없습니다. 이 본능이 생육하고 번성케 합니다. 이 본능이 사람을 아름답게 가꾸게 합니다. 성은 예술과 문학의 모태이며, 삶을 활력 있게 합니다. 남녀 공학이 성적을 향상한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이것이 성을 내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렇게 성과 성적 본능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을 추한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알아야 합니다.
문제는 죄입니다. 즉 죄는 자연적 본능을 왜곡해서 인간을 육신으로 만듭니다. 이걸 창세기는 생생하게 증거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으로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라고 육신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창 6:1-3) 죄에 충동된 성적 충동만 따르면 인간이 동물 수준이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영이신 하나님. 즉 인격적인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게 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생활을 이방인 같이 하지 말라고 하신 겁니다.
물질적 부가 육신의 정욕을 부추겨
이 죄의 경향을 더욱 부추기는 것이 먹는 겁니다, 우리가 이방인과 다르게 먹는다는 건, 하나님을 섬기는 에너지를 얻을 목적으로 먹것이라고 했지요, 먹어서 에너지지가 충전됩니다. 따라서 잘 먹으면 이 에너지가 주체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죄가 이 에너지를 육욕에 쏟게 만듭니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귀족과 부자들이 음란해지는 것은 너무 잘 먹고 육체적 노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에너지를 성적 욕망을 채우는데 쓴다고 한 겁니다. 무슨 말이냐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짓지 않은 집을 얻고, 파지 않은 우물을 마시고 심지 않은 포도원을 가져 먹어서 배부르면 성적으로 이방인들과 같이 될 위험이 있다는 겁니다.
이건 역사가 증명합니다. 경제적으로 부할수록 성도덕이 문란해집니다. 성적문란은 공통적인 한 문명의 말기적 현상입니다. 현대는 그 어느 때보다 잘 먹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성생활이 문란하고, 성과 관련한 산업은 호황입니다. 따라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육체가 되지 않고. 거룩함을 유지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이루어 하나님과 함께 하려면 먹는 다음에 이 두 번째 본성인 성생활을 이방인들과 다르게 성별해야 한다는 겁니다.
성을 하나님이 규정한 한계 속에 두라
그래서 하나님은 이 레18장에 이방인들이 문란한 성생활의 목록을 길게 나열하고 있습니다. 이 목록을 정리하면 6-18절은 간음의 범주의 근친상간을 금지한 거고, 18-23절은 성도착증적인 문란한 성행위를 금지한 겁니다. 이 본문은 읽기도 민망합니다. 이 본문을 읽으면 인간의 타락한 성적 욕망이 예나 지금이 다름이 없다는 걸 여실히 증거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연적 성적 본능의 한계를 넘어서면 인간이 이런 수준이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고귀한 피조물 인간이 짐승과 같은 수준으로 전락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의 동물 같은 성생활의 목록을 주시고, 그것을 금지시켜서, 자연적 본능의 거룩함을 유지해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게 하신 것이 본문의 취지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 모든 게 다 나와 화목하고 통일됩니다. 성화는 금생과 내생을 복되게 하는 구원입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성과 성생활을 어떻게 이방인과 다르게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까?
금지를 금욕이 아닌 성에 대한 가장 좋은 길로
첫째, 이 금지를 성도덕 정도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한 뜻으로 믿는 것입니다. 1-5은 이 규정을 주시는 분이 여호시고, 이 규례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시며, 이를 행하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성을 도덕적 문제로 접근하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이 됩니다. 아내를 손님에게 주는 풍속도 있고, 아랍사람들은 일부다처를 신의 축복으로 압니다. 천국은 미녀들과 즐기는 곳입니다. 따라서 도덕적으로 보면 간음은 죄가 아니라, 그냥 풍속이고 문화일 뿐입니다. 그래서 성생활에 울타리가 없고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이 되는 겁니다. 성적 금지를 하나님의 규례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규례라는 건 하나님이 주신 자연적 본능을 금지시키는 금욕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 뜻 즉 가장 좋은 길이라는 겁니다. 왜 하나님이 사람을 일남 일녀로 지으셨습니까? 이게 사람에게 가장 좋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이를 입증합니다. 야곱은 두 아내와 두 아내의 두 몸종을 아내로 받았습니다. 한 남편을 두고 시기와 질투와 경쟁합니다. 안 맞는 겁니다, 감당이 안 됩니다. 이게 심지어 형제를 미워해서 죽이는 참담한 비극에 이르게 했습니다. 이게 야곱가의 이 모든 불행과 비극의 뿌리입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본래 사람을 지으실 때에 한 남자와 한 여자만 감당하고, 그 안에서 만족하고 행복하게 하셨습니다. 이걸 넘어서면 불행해지고 파괴적 결과가 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본문에 주신 이 금지 사항을 하나님이 주신 자연적 본능을 억제하는 금욕이나. 도덕으로 여기지 말고 사람의 성에 대한 가장 좋은 축복의 길로 확신합니다. 이 확신이 성과 혼인을 거룩하게 하고, 성생활을 거룩하게 하여 성적 본성이 사람을 육체가 되게 하는 망령된 죄에서 구원하고 참된 부부의 행복을 누리게 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게 할 줄로 믿습니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