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강해

욥 다시 시험의 나락으로

아브라함-la 2025. 4. 1. 11:12

025,3,30, 주일

본문 : 욥24:1-25

말씀 : 라인권목사

 

유례없는 산불도 잡혔습니다. 이제 우리 하나님께서 이 땅에 타오르는 불의와 불법과 편견과 증오의 불길을 꺼주시고 사랑과 의와 평화의 불이 산불같이 번져가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지난 주일 말씀에서 피하여 숨고 도망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씀, 이거 하나는 기억나실 겁니다, 욥이 자기를 의롭다 하실 이는 하나님뿐이라서,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은 무죄한 욥에게 재앙을 주신 것이 잘못임을 아시기 때문에, 자기를 피하신다고 했지요. 그리고 현재의 하나님은 자기에게 원수 같이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므로 두려움뿐이라고 했습니다. 이건 욥이 다시 절망과 시험의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뜻입니다.

 

 욥 다시 절망과 시험으로 나락으로

19:25에서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에 서실 것이라,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했던 욥이 그리스도라는 신앙의 밝고 높은 곳에서, 다시 깊은 절망과 시험으로 나락에 빠져서 하나님이 무죄한 자기에게 재앙을 주신 잘못 때문에 정죄받는 것이 두려워 자기로부터 도망치시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가 된 겁니다. 따라서 오늘의 본문 24장은 이렇게 절망과 시험의 나락으로 추락한 욥의 상태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19장에서 그리스도에 이른 욥이 어느 정도 깊은 절망과 시험의 나락에 빠졌습니까?

 

악인의 심판 날을 믿지 못하는 상태로

첫째, 하나님이 정하신 악인의 심판의 날을 믿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어찌하여 전능자는 때를 정해 놓지 아니하셨는고”라고 한탄합니다. 즉 악인들이 형벌받을 심판의 날이 정해져 있지 않아서 악인들이 마치 심판을 날을 당하지 않을 것처럼 살게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 두 가지 형태의 참혹하고 참담한 악행이 횡횡하게 했다는 겁니다.

 

지배자들의 참혹한 만행이

하나는 악인들의 정해진 심판 날이 없어서 지배자들이 약자들의 피 한 방울까지도 착취하는 만행이 무제한적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겁니다. 2-12절은 지배자들의 이런 권력 남용과 착취에 학대를 그림을 보듯 말하고 있습니다. 경계석을 옮기고 양 떼를 빼앗아 기릅니다. 지금 푸틴과 트럼프가 이렇게 경계표를 옮기고 있고, 남미와 마얀마에서 정부와 마약상이 결탁하여 약자들을 착취하고 있습니다,

 

시골에서는 생산 수단인 고아의 나귀를 몰아가고, 과부의 소를 볼모 잡아 가난한 자들을 길가에 나앉게 만듭니다.(3,4) 이렇게 재개발과 토지 수용법으로 가난한 자들은 길가로 나앉게 만듭니다. 이 악인들은 배고픈 사람들이 먹을 것을 염려해서 좋은 포도를 따는 일을 시키지 않고 끝물 포도를 따게 하고, 추수를 하나 주리고, 기름을 짜고 술 틀을 밟으나 목마릅니다.(5,,6,11) 이렇게 임금을 아끼려고 고용 유연성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자들은 정규직이 아니라, 비정규직으로 채용하여 가장 더럽고 위험한 일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중, 즉 도시에는 죽어가는 사람들의 신음소리와 부르짖음이 가득합니다.(12) 이런 비인도적인 만행이 명백한 하나님의 묵인과 침묵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참상이 세상에 그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악인의 심판 날을 정해 두지 않으셔서, 악인들은 자기의 날이 영구한 것처럼 처처에서 날뛰고 있다는 겁니다.

 

불의에 대한 욥의 고통과 태도는 정당하지만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 자행되는 강탈, 살인, 권력 남용, 기아에 대하여 이 욥의 말을 능가할 말은 없습니다. 욥이 이렇게 사회적 불의와 그 참상과 고통을 규탄하고 있습니다. 이게 욥의 신앙 양심입니다. 이걸 묵인하고, 동조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세상의 고통을 나의 고통의 일부로 볼 때에 자신의 고통을 바로 보게 되고, 모든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벗어나 구속에 이르기를 바라게 될 겁니다.(롬8:21-23) 즉 피조물의 고통을 내 고통의 일부로 보아야 구속적 관점을 가지게 되고, 선교적 태도를 가지는 겁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회적 불의를 묵인할 것이 아니라, 욥의 마음으로 아파하고 슬퍼하며 미워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욥이 불의로 인한 참상을 규탄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자들의 만행이 왜 욥에게 시험이 되었느냐입니다.

 

왜 악인들의 만행이 시험이 되었나

그것은 하나님이 의로운 자기에게는 재앙을 주시면서 정작 악인들에게는 이런 참혹한 일을 행하게 묵인하여 번영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이 선악에 무관심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정의롭지 못해서 악인이 형벌을 받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시므로 악인들은 자기의 날이 영원할 것 같이 날뛰게 하고 있다는 겁니다.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날이 없다는 겁니다. 어찌 하나님이 이럴 수가 있느냐? 이게 욥의 시험이고 고뇌입니다. 즉 욥의 죄 없이 재앙을 받는다는 의식이 하나님의 정의를 신뢰할 수 없게 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신뢰하지 못하니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못하게 되고, 심판 날을 믿지 못하니 자기는 영원히 정죄받고,, 악인은 영원히 잘 될 것 같아서 죽을 맛입니다. 욥에 여기까지 떨어졌습니다. 이게 우리가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시험 드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일어나는 참상이 명백한 하나님의 무관심과 묵인과 침묵 속에서 일어나는 것 같고, 악인의 세대가 영원한 것 같은 때에도 살아계셔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그 하나님이 선한 뜻으로 역사를 운행함을 신뢰합시다. 느부갓네살도 종으로 쓰시는 것 같이 악인의 악까지도 당신의 선한 뜻을 이루는 도구로 압시다. 그분이 심판의 날을 예비하고 있으므로 악은 심판받고, 믿음의 사람은 세상에서 고난을 받아도 하늘에 영광이 예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고 주장해 나갑시다. 이것이 악의 시험에서 승리하게 하고, 임할 영광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새롭게 할 줄로 믿습니다.

 

어둠의 자식들이 자기 세상을 만난 듯 활개 치는 현상이

그리고 하나님께서 심판의 날이 정해지지 않아서 일어나는 현상이 어둠의 자식들이 자기 때를 만난 듯 활개를 치는 현상이 일어나게 하고 있다는 겁니다. 13-17이 이런 내용입니다. 살인자. 강도와 도둑, 간음하는 자들을 욥은 광명을 배반한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현대어 번역들은 빛을 싫어하는 사람, 빛을 거역하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어둠의 자식”이라는 뜻입니다. 살인자들, 도둑, 간음하는 자들은 어둠에 속해서 빛을 싫어합니다. 이 어둠의 자식들이 세상에서 제 세상을 만난 듯이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악을 묵인해서 세상이 정의가 없는 캄캄한 밤 같은 세상이 되어서 마치 밤에 어둠의 자식들이 활개를 치는 것 같이 어둠의 자식들이 활개 치는 세상에 되었다는 겁니다.

 

욥이 자기를 의롭게 아는 만큼 하나님이 부당해져

이게 욥의 시험이요, 고뇌이요, 고통입니다. 이것 때문에 욥의 마음이 상한 겁니다. 이건 긍정적인 겁니다. 저 롯도 소돔 사람의 죄악에 마음이 상했다고 했습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이 상한 마음이 있어야, 죄를 미워하고, 죄에서 해방된 천국의 도래를 사모하는 겁니다. 이 고통이 없으면 건강한 신앙이 아닙니다. 문제는 욥은 이게 하나님의 무관심 때문이다,라는, 시험이 나락에 떨어지게 했다는 겁니다. 왜 이게 시험이 되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도덕과 윤리적으로 흠 없는 내게는 재앙을 주시는데 저 어둠의 자식은 제 세상을 만난 듯 살게 하시냐는 겁니다. 욥이 자기를 의롭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욥이 자기를 의롭게 여기는 만큼 하나님이 부당해지고, 무책임해지고 불의하게 느껴지게 한 겁니다. 이게 욥의 한계입니다.

 

만약 욥이 자기를 품위 있는 성인이 아닌,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가련한 죄인으로 알았다면, 욥은 자기와 어둠의 자식들의 차이를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알료사의 말 같이 다 같은 계단에 서 있는 사람이며, 차이가 있다면 어둠의 자식들은 맨 꼭대기 계단에 서 있고 자기는 첫 계단을 밟은 사람으로 알았을 겁니다. 자기를 이렇게 죄인 중 하나로 알면 하나님이 심판을 미루시거나, 정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가 회개하도록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알고 감사했을 겁니다.

 

우리가 의로우면 얼마나 의롭습니까? 하나님의 심판받을 일이 없을 만큼 의롭습니까? 나를 품위 있는 의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이신 그리스도가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는 가련한 죄인으로 인식하고 있다면, 우리는 어둠 자식들의 일로 하나님이 시험이 될 때,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기를 심판하여 이기실 때까지 하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를 볼 것입니다.(마12:20) 어둠의 자식들이 형벌을 받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의 자식들을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처럼 불쌍히 여기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은혜를 보고 어둠의 자식들의 악행이 시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은혜를 받고 교훈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악인들의 보호자로 여기는 상태가

둘째, 하나님이 악인을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악인들을 보호해 주셔서 악인들이 형통을 누리고 있다는 시험에 들었습니다. 이게 18-25까지의 내용입니다. 이 부분을 성경 교사들은 거의가 욥이 악인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것으로 주석하거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입니다. 18절의 악인이 물 위에 흘러간다는 말씀은 악이 속히 망한다는 것이 아니라, 악인이 죽을 때에 천천히 고통 속에서 죽는 것이 아니라, 물에 휩쓸려 가듯 쉽게 신속히 가기 때문에 그 악인을 정죄할 수도 있는 심판할 수도, 복수할 수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걸 19절이 반복합니다. 가뭄과 더위가 눈 녹인 물을 증발시키듯 스올이 범죄자에게 임하기 때문에 그의 악행을 기억하거나 심판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욥은 확신합니다. “불의가 나무처럼 꺾이리라” 이 말은 악인은 푸른 나무 같은 때에 갑자기 망해야 하고, 죽어서도 그 악행의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악인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거지요. 하나님이 행악자에게 이렇게 하셔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이 땅에 정의가 서고 약한 자들이 살 수가 있다는 겁니다. 이게 욥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경건치 않은 사람들을 보호해 주셔서 그들의 생명이 마치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처럼 장수하다가 고통 없이 가게 하신다는 겁니다,

 

22절을 보세요. 개역 성경은 “그러나 하나님이 그 권능으로 강한 자를 보존시키니”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이 권능으로 강포 한 자를 끌어내신다는 개역 개정은 완전히 오역입니다. 하나님이 악인을 보존하신다'로 읽어야 문맥에도 맞습니다. 23절은 하나님이 악인들에게 평안을 주시며, 지속되게 하시고, 심지어 악인들의 길을 살펴주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인의 죽음을 곡식을 베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농부가 낫으로 알뜰하게 거두어 곡간에 들이듯 악인을 보호하셔서 죽을 때도 명예롭고, 자연스럽게 죽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욥은 자기가 옳다고 확신해서 내 말이 거짓말이라고 유죄 판결을 내릴 자가 있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악인들의 후원자로 만든 겁니다. 욥이 이렇게 시험이든 겁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에 이른 욥이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을 악인들의 후원자로 만드는 시험의 나락에 빠졌습니까? 그것은 욥이 이론적으로 그리스도를 알지만, 실제로 회개하므로 그리스도에 이르지 못해 섭니다. 그리스도를 믿어도 자신을 의롭게 아는 자는 회개함이 아니라, 이론적으로 아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론적이면 부활과 천국도 이론에 불과합니다. 부활과 천국이 이론에 불과한 사람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하나님을 모르고,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는 고난의 신비를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시험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욥은 어떻게 회개에 이르게 하시는지, 이 은혜에 욥이 어떻게 응답하는지가 앞으로 우리가 주목할 주제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십자가 앞에 나갑시다. 거기서 그리스도가 아니면 구원의 소망이 없는 죄인이 되십니다. 이 회개로 그리스도에 이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부활과 천국의 소망으로, 명백한 하나님의 침묵하에 이루어지는 참혹한 일이 시험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데에 이르시기를 축복합니다.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