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강해

사람이 어찌 의로우랴?

아브라함-la 2025. 4. 16. 10:19

025, 4, 13, 주일

본문 : 5:1-6

말씀 : 라인권 목사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어찌 자기를 의롭다고 할 수 있으며 깨끗하다고 할 수 있느냐는 빌닷의 반문은 기독교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이 죄론은 욥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되지 못했고, 주장은 하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는 말을 했을 뿐만 아니라, 논리가 아닌 억지요, 이렇게 억지로 사람을 잡는 일을 하나님께 대한 봉사로 알아서 죄책이 없이 사람을 잡는 돌 같은 사람이 되는 죄에 빠졌습니다. 이게 빌닷이 욥에 이 죄론을 적용할 때에 일어난 잘못입니다.

 

그러나 이 빌닷의 짧은 마지막 연설은 교만한 성자 욥을 가련한 죄인으로 회개시켜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게 하는 욥기의 구조적인 목적으로 독자를 이끌어 주는 말씀입니다. 카일과 델리취는 이 빌닷의 연설은 욥에게 꼭 필요한 충고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다 죄인이라는 이 빌닷의 말은 욥도 경청해야 할 말씀이며, 우리도 경청해야 할 절대 적인 진리의 말씀입니다. 더군다나 이 발닷의 말이 욥의 친구들의 마지막 말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까지 친구들의 말에 대한 욥의 잘못도 정리해야 합니다. 그러면 왜 욥은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라는 빌닷의 말을 경청해야만 합니까?

 

욥이 이 진리를 경청해야 할 이유

첫째, 욥이 그렇게 하나님께 맞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욥이 얼마나 자기 의를 주장했습니까? 욥이 재산과 자녀와 건강을 상실했을 때에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송했습니다. 내가  옳다! 이 자기 의가 욥을 지탱한 기둥이요, 최후의 보루였습니다. 이 자기 의가 욥을 지탱하는 욥의 기둥이라는 증거가 친구들이 침묵으로 욥을 정죄할 때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한 겁니다. 너 죄인이다. 이렇게 자기를 지탱하는 기둥이 공격을 받으니 욥이 정색을 하고 지금까지 자기가 옳다고 친구들과 논쟁을 벌여 온 겁니다.

 

이런 욥에게 빌닷이 주권자인 하나님 앞에서 네가 무슨 청구권이 있는 것 같이 상을 주어야 한다느니 벌을 주어야 한다고 할 수 없고, (1-3)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타락한 죄인 중 한 사람인 네가 의롭고 깨끗하다고 할 수 있느냐? 가장 영광스러운 피조물인 달과 별도 하나님 앞에서는 깨끗하지 못하다고 합니다. 해가 뜨면 모든 인공의 빛은 빛을 잃는 것 같이, 달과 별같이 빛나는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는 구더기와 벌레 같은 존재에 불과할 뿐이다고 한 겁니다. 짧지만 인간의 죄인 됨을 가장 강력하게 말한 겁니다.

 

이 빌닷의 말이 논점을 벗어난 말이고, 논리적이 아닌 억지로 욥을 굴복시키려는 목적으로 한 말이지만, 그 말 자체는 절대적 진리요, 욥에게는 쓰지만 양약입니다. 모든 사람이 아멘 해야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런 경우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말하는바 즉 교훈은 행하고 지키되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 23:3) 욥이 이런 식으로 이 말씀을 받고, 이 말씀에 아멘 해야 했지만, 욥은 아멘 하지 않았습니다. 26장에서 31장까지 길게 자기 의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게 욥이 죽지 못한 증거이며, 욥의 잘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하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어도 진리인 말씀 자체에는 아멘하고 교훈을 받고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욥에게 재앙을 주신 목적이 욥의 자기 의를 깨서 가련한 죄인으로 회개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욥을 치는 욥의 친구들은 자기들은 모르지만, 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게 하는 하나님의 막대기였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모없고, 병든 지라야 쓸모 있는 것 같이, 자기를 죄인으로 알아야 그리스도에 이를 수 있는데 욥이 자기를 기품 있는 의인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 병은 헹스텐베르그의 해석과 같이 설 때려서는 안 되고 예리하게 때려야 합니다. 그래서 열 자식을 거두는 재앙으로 치신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욥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욥이 경배하고 찬송하며 자기 의를 이루고, 자기 의로 버팁니다. 그래서 욥의 건강을 치시지만, 건강을 쳐도 자기 의로 버팁니다. 이런 욥에게 세 친구들을 보내서 세 차례나 돌아가며 정죄의 매를 때리게 한 겁니다. 욥의 친구들은 인식하지 못하지만, 욥의 친구들과 그들의 말은 자기를 성자로 아는 욥을 죽여주시는 하나님의 섭리요, 손길이며 하나님의 입이 된 겁니다. 따라서 욥은 친구들에게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했지만, 욥은 친구들이 진리를 말하면 그게 자기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배척하고 반발하며 이겨 먹었습니다. 이게 욥의 문제이자 우리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말 못 하는 짐승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닭울음소리에서도 주의 음성을 듣고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현재 내게 말하는 사람을 위시해서, 환경과 사건으로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늘의 달과 별을 보며 인간의 고귀함과 인간의 비천함을 깨달았습니다. (시8:3-5) 그러므로 지금 현재 내게 말하는 사람의 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받아야 합니다. 나를 기쁘게 하는 말보다 나를 아프게 하는 말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착하고 좋은 마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욥이 자기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에 겸손하지 못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엘리바스의 마지막 말에 욥이 한 말을 기억할 겁니다. 하나님이 악인을 벌할 심판 날을 정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무죄한 내게 재앙을 주신 잘못 때문에 나를 피하신다. 하나님이 악인들을 보호하셔서 경건한 사람처럼 행복을 누리다가 행복하게 죽는다, 이거 분명 하나님께 대한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욥은 자기가 의롭고 경건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청구권을 가진 것 같이 행동한 겁니다.

 

이런 욥에게 빌닷이 피조물이며 죄인인 네가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무슨 청구권이 있는 듯, 재앙을 주어야 하느니, 주지 말아야 하느니, 복을 주라 마라 할 수 있느냐? (2,3)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여자에게 난 아담의 자손이 어찌 의롭고, 깨끗하다고 할 수 있느냐?(4) 이 하나님께는 가장 영광스러운 피조물인 달과 별도 깨끗하지 못하다 하고 합니다. 이 말은 창조 시 “두 큰 광명”을 만드사라는 말씀을 기억나게 합니다. (창1:16) 인류는 위인과 성인으로 빛나는 사람을 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광명을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달과 별은 가장 빛 된 사람, 성인 중에서 성인을 말합니다. 해가 뜨면 모든 인공의 빛은 빛을 잃는 것 같이, 하늘의 달과 별처럼 빛나는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는 구더기와 벌레 같은 존재에 불과할 뿐이다고 한 겁니다.

 

따라서 빌닷의 이 말은 하나님께 대하여 겸손하지 못한 욥의 교만을 꺾어 겸손하게 하는 양약입니다. 욥은 이 말씀의 매를 아멘으로 달게 받아야 하고, 이 말씀에 자신의 교만함을 깨닫고 가련 죄인으로 엎드려 회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빌 듯의 이 최후의 말에서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잘못하신다고 철통같이 자기 의를 주장하고 방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욥이 자신의 영적 상태에 만족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자기를 훌륭한 신자로 아는 겁니다. 된 줄로 알고 만족한 겁니다. 있으면 전득이요 없으면 전무인 하나님의 의 이신 그리스도가 없는 걸 모르고 만족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욥의 문제요, 우리의 문제입니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경건하므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영적 결핍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게 교만입니다. 이 교만이 말씀을 받지 못하게 하고 깨닫지 못 하게 하며, 도리어 반발하게 합니다.

 

이걸 깨닫고 하나님의 의이신 그리스도를 구하게 고통을 주신 겁니다. 그래서 CS 루이스는 거짓된 자기만족에 빠진 인간은 고통이 없으면 자기 결핍을 깨닫지 못하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욥에게 재앙으로 고통을 받게 하신 것은 옳습니다. 친구들의 정죄도 이점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옳은 말입니다. 이 말씀에 욥이 반발하는 자체가 잘못입니다. 왜 욥이 이렇게 말씀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 이유를 보여 주는 것이 마13장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참된 제자의 특성이 말씀을 받는 태도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내 주관, 내 기존 지식, 내 영적 취향이라는 길가와 감정을 말하는 돌밭 같은 마음이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이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받는 사람이 참 제자라고 하셨습니다.(눅8:15) 욥이 고난으로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 같은 마음이 되고 쓴 뿌리가 생겨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겁니다. 이게 다 내 기존 지식, 내 주관, 내 영적 취향, 내 감정, 이 자기, 자기의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말씀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말씀에 대한 나의 태도 나의 반응을 심사합시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못해서 내가 살아있고 자기로 충만하고 만족한 사람은 말씀에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 같이 반응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과해서 자기가 죽어 죄인 중 한 사람이 된 거듭난 겸손의 사람은 잘못 적용한 말씀에서도 은혜받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해도 진리에는 아멘 합니다. 내게 하는 말이면 그 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사람은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마침 오늘은 고난 주일입니다. 고난 주간에 십자가로 나갑시다. 그 십자가 앞에 서면 품위 있는 의인이 가련한 죄인으로 거듭나게 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받는 착하고 좋은 마음은 생래적인 성품이 아니라, 이렇게 거듭난 성품입니다. 이 십자가 앞에서 이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거듭나시고,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고, 깊이 아는데 이르는 고난 주일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