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강해

자기 연민 = 자기 의

아브라함-la 2025. 6. 23. 08:55

025,6, 15, 주일

본문 : 욥30:1-31

말씀 : 라인권목사

 

평강입니다. 이번 토요일이 하지입니다. 장마도 시작되고, 본격적인 여름 절기에 들어섰습니다, 이번 여름 유례없는 폭염을 예보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사중 계획안에서 금년 여름도 낮의 해가 상치 못 하고 밤의 달도 해지 못 하게 하나님께서 그늘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뒤바뀐 처지의 자기 연민에 빠진 욥

오늘 본문은 욥의 두 번째 독백입니다. 이 독백은 29장에서 욥이 그리워하고, 찾고 싶어 하는 과거의 행복했던 “그때”를 재앙으로 이 모든 행복을 잃은 “이제”와 대조하여 완전히 뒤바뀐 욥의 처지와 고통을 슬퍼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에 기막힌 반전이 있습니다. 29장 마지막 절과 30장 마지막 절을 대조해 봅시다. 불과 몇 달 전 “그때의” 욥은 군대 중에 있는 제왕과 같이 애곡 하는 자의 눈물을 닦아 주던 사람이었지만, “이제의” 욥은 상피병으로 피부는 검어져 갈라지고, 그 아픔은 뼈가 타서 내 수금은 통곡이 되고 내 피리는 애곡이 되었다고 슬퍼하고 있습니다. 이걸 “자기 연민selfpity”이라고 하지요, 욥이 자기 연민에 빠진 겁니다.

 

제가 이 자기 연민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전적으로 공감하고 동의하는 자료를 찾았습니다. 이분은 그냥 해본 생각이라며 자기 연민을 8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이걸 정리하면 자기 연민에는 나는 착한 사람, 불쌍한 사람, 이런저런 사정이 많았던 사람이라는 인식이 기저에 깔려 있고, 문제나 다툼이 발생하면, 나는 그런 사람이니, 나를 이해해야 한다는 심리가 작용해서, 자기를 이해 못 하는 당신들이 잘못이라고 하며, 나르시시스트가 되고, 이로 인해서 인맥이 자주 정리되고, 인간 불신이 생기게 된다고 했습니다. 자기 연민에 빠져 본 적이 있는 분은 이분의 말 다 공감할 겁니다.

 

자기 연민 또 다른 형태의 자기 의

즉 자기 연민은 나는 착하다, 나는 옳다, 나는 잘못이 없다, 이런 인식이 기저에 깔려 있고, 이런 자기를 주장하며, 그런 자기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 처지가 된 자기를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나는 옳고 선하다는 인식이 자기를 연민하게 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자기 연민은 또 다른 형태의 자기 의에 불과한 겁니다. 오늘 본문의 욥의 자기 연민이 비로 이 자기 의에서 나온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욥의 자기 연민에서 욥이 무엇에서 자기 의를 느끼며, 얼마나 자기를 의롭게 여기고, 이 자기 의를 어떻게 주장하고 있는지를 파악해서 우리 안의 자기 의를 잡아내고 파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자기를 시은자로 아는 상대적 의로움

첫째, 욥의 자기 연민은 자선을 베푸는 자기를 사회적 약자들의 시은자, 시혜자로 아는 상대적 의로움에서 나왔습니다. 욥은 29장에서 자기를 맹인의 눈과 저는 자의 발, 가난한 자의 아버지와 수호자, 제왕같이 목메어 우는 사람을 위로했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자기가 환경이 뒤바뀌어 자기가 돕던 사람들에게서 정죄와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린 자신에 깊은 연민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는 욥의 자선이 자선을 받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시은자! 시혜자다!”라는 상대적 의를 느끼게 했다는 거지요. 욥과 같은 성인이 자선에서 상대적 의를 느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선을 받는 건 굴욕이라는 세금을 내게 한다는 말이 나온 겁니다. 우리 안에 자선에서 상대적 의를 느끼는 자기 의라는 영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신 겁니다. 이 자기를 원수 압시다, 이걸 잊으면 돈 쓰고 사람에게 상처 주는 죄를 짓고, 상급을 잃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겁니다.

 

그리고 1-8절은 고통하는 자기를 정죄하고 조롱하는 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자기를 조롱하는 자들을 내 양 떼를 지키는 양치기 개만도 못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못 먹어 기운이 없어 쓰면 밥값도 못 하는 자들,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들짐승같이 사는 혈거인, 고향에서 죄짓고 쫓겨난 자들이라고 합니다. 즉 고통하는 욥이 비난과 조롱에 참을 수 없는 모욕감과 수치감을 느끼는 이유가 자기만 못하고 자기 신세를 지던 사람들에서 조롱을 받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여기에 나는 시은 자다!라는 자기 의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자기 도와준 사람들에 대한 은근한 멸시가 있습니다. 이렇게 욥이라는 사람이 상대적 의로움을 느낀 겁니다. 이 자기 의가 자기 연민으로 나타난 겁니다.

 

그래서 욥은 9-11절에서 이 사람들이 재앙으로 위로가 필요한 자기를 정죄하고 조롱하면서 상대적 의로움과 안전감과 행복감을 느끼고 있는 것을 한탄하고, 이 배은망덕을 고발하며 배신감과 적대감을 느끼고 있는 겁니다. 의인 욥, 성자 욥에게 이 정신 이 영이 있습니다. 이게 자기를 성자로 아는 욥의 까닭 없는 비난과 조롱에 대한 반응입니다. 만약 욥이 성자라면 자기의 도움을 받던 자기만 못한 자들이 자기를 조롱하면서 상대적 안전감과 행복을 느끼는 것에 어떻게 반응했어야 합니까? 예수님처럼 반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대리적 고난과 죽음을 당하는 것을 모르고 자기를 못 박고, 조롱하는 무리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이게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성자로 아는 욥이 도움받는 사람을 자기만 못한 천박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고, 그들의 조롱에 모욕과 수치심을 느끼고, 적의를 느낀 건 그가 완전한 것이 아니라, 별수 없는 죄인이라는 증거요, 욥이 예수님처럼 반응하지 못한 것은 욥이 자기를 의롭게 알아 섭니다. 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킬 명예와 품위가 있는 사람, 주장할 자기와 권리가 있는 겁니다. 욥이 이렇게 부했습니다. 욥이 심령의 가난이라는 팔 복의 첫 문도 통과를 못 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천국은 죄인이라서 지킬 것도 주장할 것도 없는 가난한 사람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욥을 이 가난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욥을 재앙으로 황무하게 하신 겁니다.

 

이게 자기 의를 분별하는 시금석입니다. 내 신세를 진 사람들이 내게 부당한 대우를 할 때 자기 연민을 느낀다면, 그것은 그들을 나보다 못한 사람으로 여기고 나를 시은자로 아는 자기 의에 빠진 겁니다. 이 자기가 예수님과 같이 주장하고 지키고 방어할 것이 없는 가난한 자로 낮아져야 예수가 의원이 되시고, 천국이 저희 것이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인식에서

둘째, 이 욥의 자기 연민은 의로운 자기가 하나님께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기 떄문입니다. 16-17과 28-30절은 욥의 병과 그 병으로 인한 고통을 토로하는 말입니다. 욥기에서 욥이 자기의 병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말한 것은 여기가 처음입니다. 이 병은 피부가 코끼리 피부같이 되게 하는 문둥병인 상피병입니다. 이 상피병으로 욥의 피부는 코끼리 피부와 같이 검게 갈라지고 뼈는 타는 듯이 아팠습니다. 이 고통이 밤에 심해지기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습니다, 이로 마음이 녹았습니다.(16) 마음이 녹았다는 건 영혼의 고통을 포함합니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 영도 아픈 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자기를 이렇게 만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게 18-23절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부당하고 가혹하시다

전에는 하나님이 친구로 자기와 함께 하셨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그 힘으로 자신의 명예를 벗겨 진토에서 수욕을 당하게 하시고,(18,19) 부르짖어 기도해도 응답하지 않으시고, (20) 원수처럼 대적하여 잔혹하게 대하시므로, 자기의 모든 행복이 바람에 구름처럼 날아가 버리게 하신 것은 나를 죽여서 무덤에 보내시려는 하나님의 뜻인 것을 내가 안다고 합니다. (21-23) 이렇게 욥이 하나님께 부당하고 가혹한 고통을 당하는 자기를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의 부당함과 가혹함을 입증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를 주장합니다. (24-26)

 

욥이 주장하는 자기 의

사람이 환난을 당할 때에 손을 펴서 도움을 구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나는 그 심정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울고 근심해 주고, 그들의 눈이 되고 발이 되고 아버지가 되고 수호자가 되어 주었습니다.(24,25) 이 선행과 자선이 여호와를 경외함이라는 겁니다. 자기의 자선을 자기 믿음의 실증이라고 한 거지요. 이걸 하나님 앞에 내놓고 ‘하나님을 이렇게 당신을 경외하는 나에게 재앙 주시는 건 부당하고 가혹하다는 거지요, 이게 여기서 욥이 주장하는 첫째 의입니다. 이렇게 욥의 자기 연민은 자기가 의롭다는 인식에서 나온 겁니다.

 

그리고 이 욥의 의가 자기를 하나님께 청구권이 있는 것 같이 여기게 했습니다. 26절이 이를 증언합니다. 나는 복을 기대했는데 화가 왔고 빛을 기다렸는데 재앙이 어둠이 덮쳐 왔다고 합니다. 자기를 당연히 하나님께 축복을 보상으로 받아야 할 사람으로 여긴 겁니다. 하나님께 공로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를 알아주시고, 내게 잘해주실 의무가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자기 의는 공로 주의로 나타났습니다. 이게 욥의 두 번째 자기 의입니다.

 

이 자기 의가 기도 응답이라는 하나님의 은총을 은혜가 아닌 보상으로 여기게 했습니다. 24절을 보세요, 환난을 당하면 도움을 구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서 자기는 이 심정을 외면하지 않고 도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재앙의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나 주님은 외면하시고 응답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20) 기도 응답을 은총이 아니라 자기가 받을 보상으로 여긴 겁니다. 그래서 낙심하여 상 받을 내가 부당하게 재앙을 받아서 내 영혼은 하나님의 진노를 느끼고, 마음이 들끓어 평안을 모르고, 육신은 상피병의 고통으로 내 수금은 통곡이 되고 내 피리는 애곡이 되었다고 자기 연민에 빠진 겁니다. 이렇게 자기 연민은 또 다른 형태의 자기 의의 표출인 겁니다.

 

자기 연민이 망상의 하나님을 만들어 내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에 이 자기 연민에 빠지고 이 자기 연민이 깊어지는 만큼 하나님이 시험이 됩니다. 자기를 연민할수록 하나님이 부당한 하나님이 되고, 가혹한 하나님이 됩니다. 하나님이 내게 원수 같으시다고 느껴집니다. 이게 시험이 만들어 낸 망상의 하나님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만든 망상의 하나님을 놓고 하나님이 부당하다, 가혹하다 원수 같다, 이렇게 고뇌에 빠집니다. 이게 자기 의 때문입니다. 자기 의가 하나님이 시험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시험이 되면 욥처럼 자기의 고난을 바로 해석하지 못합니다. 고난이 형벌이 아니라, 자기를 버리게 해서 그리스도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은총임을 모르는 겁니다. 고난이 죄와 상관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신 뜻이 있는 고난인 것을 상상도 못 합니다. 무죄한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영광이라는 것을 상상도 못 합니다. 이게 자기 의 때문입니다. 19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이른 욥에게 이 영, 이 자기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교회 안의 자기를 그리스도인으로 아는 이들에게도 이 영이 살아 있고, 자기 의가 있고 자기 의를 주장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 자기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자기 의의 여부의 드러내는 시금석이 있습니다, 그게 고통과 비난이라는 시금석입니다. 고통 속에 있을 때에 까닭 없이 비난하는 사람이 걱정되고 불쌍한 것이 아니라, 욥처럼 모욕감과 배신감 느끼고 고발한다면 내 안에 자기 의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 고통이 세상과 하나님의 부당한 대우의 때문이라고 느껴지고 원망한다면, 나는 아직도 주장할 내가 있고, 지킬 것이 있는 부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자기 의, 이 자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를 입지 못합니다. 이 자기가 예수와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지 못합니다.

 

은혜로 가족 여러분! 믿음은 이 자기가 가난하고 애통할 것밖에는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의로 충만한 사람이 의가 없고 애통할 사람이 되는 길은 오직 예수뿐입니다. 주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으로 우리의 죄가 되고 자기를 비우시고 가난해지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이 예수님과 십자가 앞에 설 때에 인생은 비로소 자신 안에 의가 없고 죄로 가득함을 보고 겸손히 십자가를 붙잡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십자가로 갑시다. 십자가에서 자기는 죽고 가난하고 애통할 자기로 새롭게 태어나시기를 축복합니다.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