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 습지의 연꽃
퇴촌에서 경안천 방향으로 거스러 잠시 올라가면 팔당호면과 경안천의 경계와 같은 곳에 "경안천 습지 상태공원"이 있습니다. 이곳은 광주쪽에서 살때 아내와 종종 산책을 즐기던 곳입니다. 지난 칠월 첫 주에 몇년만에 이곳을 지나다 들렸더니, 공원입구의 습지에 온통 연꽃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렇게 연꽃이 장관이 이곳은 본디 가장 자리에는부들이 꽉차 있고 가운데 쪽은 부레옥잠같은 수생식물이 있던 곳이었습니다. 이곳을 지나 공원 안으로 들어가면 부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한번은 이곳에 들렀더니 이 부들을 제거하고 물가 쪽으로 연을 허술하게 심어 둔 것을 보았습니다. 그걸 보며 언제 이곳에 연꽃으로 가득할까? 라는 생각을 했는데 불과 몇년 사이에 이렇게 온통 연꽃으로 가득해진 걸 보고 놀랐습니다.
시원시원한 널찍 널찍한 잎, 눈이 시원하게 푸른 빛의 잎과 순백과 붉은 빛의 꽃빛이 7월의 따가운 햇살 아래 보는 이의 눈을 황홀하게 합니다. 한 여름 꽃으로 연꽃 만큼 신선함과 청량감을 주는 꽃도 없을 것입니다. 여름 밤 달이 뜨는 연못에서 살포시 벌어지는 연꽃을 볼 수 있다면 행운일 것입니다.
달밤의 연꽃은 아니라도 햇빛 찬란한 한낮에 싱그러운 연꽃을 보는 것이나, 비오는 날 연잎에 마치 물방울이 수은처럼 구르는 것을 볼수 있다면 그 역시 행운일 것입니다. 그만큼 연은 흔히 보는 꽃은 아니지만, 지금은 이 연도 산업이되고 광광자원이 되어서 전보다는 흔히 볼 수 있게 되었으니 현대화의 혜택이랄까요?
불교가 연꽃을 불교의 꽃으로 삼은 것은 윤회적 관점만을 제거하면 우리 기독교의 신앙과 삶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저는 종교로서 종교를 가진다면 불교를 선택할 것입니다. 이만치 불교의 정신을 높이 사지만, 그래도 연꽃이 불교의 꽃이라는데는 아쉬움을 느낍니다. 이렇게 연꽃이 불교의 꽃이라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연꽃을
사랑하고 즐기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불교이전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피조물이기 때문이고,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성전을 건축하고 조경을 대나무로 한적이 있습니다. 대나무를 개인적으로 좋아하기도 하지만 대나무의 곧고 늘 푸름이 기독교 신앙과 신앙인의 기품을 잘 반영한다고 믿어서입니다. 교회가 환난을 당할 때에 신앙의 지조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 같이 행하던 이들을 생각하며 대같이 지조있는 신앙인을 기르자는 다짐으로 대나무를 심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뒤에 온 목사가 교회에 대나무를 심은 것을 아주 못 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대나무를 무속신앙과 관련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나무를 제거해 버렸습니다.
이걸보며 부정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부정하고 거룩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거룩하다는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그 분은 소위 성령운동한다며 축사와 신유운동을 하시는 분인데 대나무를 무속으로 여기는 것은 오히려 그가 목사지만 그 신앙이 무속적이라는 반증인 셈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교회에 연꽃을 심으면 교회가 절이 되겠습니까? 참된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내신 모든 것을 사랑하고 즐길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교회는 스토토가 지적했듯이 창조질서의 보존에 앞장을 서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 아름다운 연꽃을 나 혼자 본 것이 아쉬워 팔월 초에 아내와 함께 다시 이곳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이곳에 가득했던 연꽃은 간데가 없고 대신 연밥만 잠망경 같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넓고 푸른 연잎 속에 어쩌다 연꽃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참 아쉬웟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내가 잊고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화무 십일홍"을 잊은 겁니다.
그렇습니다. 열흘가는 꽃은 없는 것입니다. 연꽃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단 두주간 사이에 연꽃은 지고 없었습니다. 이렇게 권불십년이라는 말도 있지요? 성경도 인생은 풀의 꽃과 같아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진 자는 놓을 때를 생각하는 것이 인생의 지혜요. 누릴 수 있을 때 누리는 것이 행복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더위가 서서히 꼬리를 사리는 여름의 끝자락입니다. 이 여름 주어진 것은 즐길 수 있는 여유와 더불어 즐겨도 경건과 품위는 잃지않는 맑지 않은 늪에서 맑게 피는 연꽃같은 신앙인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