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교회
마크 리퍼트(Mark Lippert)주한 미국 대사가 피습을 당한 어처구니없는 이 불행한 사건은 우리 사회에 많은 성찰과 각성을 요구 받고 있는 중이지만, 우리 한국기독교는 더욱 치열한 성찰을 강요받고 있는 형편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리퍼트 대사가 피습을 당해 입원하자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한성총회>사람들이 리퍼트 대사의 쾌유를 빌며 미국대사관 건너편인 세종문화회관 앞 광장에서 난타와 퓨전 발레, 부채춤을 공연했을 뿐만 아니라, 한기총이라는 기관은 이번 사건을 한미동맹에 대한 테러로 규정하여 규탄했고, 전 모 목사는 “이번에 기회에 종북의 싹을 잘라야 한다.”는 발언을 서슴치 않았기 때문이다.
테러는 규탄 받을 죄악이 분명하고, 불의의 피습으로 상해를 입은 우방의 대사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신앙과 모순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퍼트의 쾌유를 비는 부채춤을 보는 우리사회의 시각은 싸늘함을 넘어 조소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형편이다. 그건 그 행사가 순수한 기도로 보기에는 부자연스러워 무속신앙을 연상케 했을 뿐만이 아니라, 우리 한국교회가 약하고 고난을 받는 이들과 함께 하기보다는 오히려 권력과 함께해왔다는 인상을 심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건국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민주화 과정에서 이 땅에는 양심적인 인사들이 수많은 린치와 테러를 당해 왔다. 심지어 성직자들이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얼마 전에도 토크 콘서트를 진행하는 익산의 한 성당에 인화물질을 투척하는 테러가 발생했다.
그러나 우리 한국교회의 대부분은 이런 우익테러를 테러라고 정죄하여 규탄하지 않았다. 익산의 테러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장로교목사인 나도 잘 알지도 못하는 이상한 총회의 문제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 한국교회가 약하고 고난 받는 사람들보다는 권력과 함께 하기를 기뻐했다는 한 증거이다. 이것은 교회가 정의롭지 못한 결과이다. 정의롭지 못한 교회는 약자가 아닌 권력과 함께 할 수밖에 없게 되어, 목자의 직무는 물론 선지자의 직무를 이행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는 바른 교회의 모습은 아니다. 주님은 약하고 고난 중에 있는 무리와 함께 하셨다. 주님은 목자 없는 양같이 무리들과 함께 하시며, 타락한 당국자들을 호되게 꾸짖으셨기 때문이다.
나는 반공이 곧 기독교인 것 같이 반공운동을 신앙자체로 아는 한국교회의 부실한 신학에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그래서 목사와 기독교인들이 좌우로 편을 가르고, 내편이 아니면 다 종북이라며 증오심을 들어내는 것에 기함하며, 싹을 잘라야할 타도의 대상으로만 삼는 것에 아득한 절망을 느낀다. 그것은 종북 정도가 아닌 공산주의자라도 한 영혼으로 사랑하는 것을 본령으로 하는 것이 기독교요 목사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한국교회가 종북 테러를 정죄할 수 있다면 동시에 우익 백색테러도 정죄할 수 있어야 하며, 높은 자들과 함께 할 수 있음과 같이 약하고 고난을 받는 자들과 함께 고난을 받기를 기뻐하는 의로운 교회로 거듭나야만 한다. 리퍼트 대사의 쾌유를 비는 부채춤을 추게하는 이들이 세월호 참사에는 “교통사고”일 뿐이라며 대통령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던 이들은 아닌지를 그래서 묻고 싶은 것이다. 주님은 심판 때에 내가 옥에 있을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고 물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약하고 고난을 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고난을 받는 자리에 있었다고 대답 할 수 있게 하라는 것이 이번 사순절을 맞은 우리 한국교회에 대한 주님의 요구라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