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한 땐 우리는 부부도”

아브라함-la 2015. 5. 18. 14:30

2015,5,17, 부부사랑주일 강론

본문 : 삼하6:16-23

말씀 : 라인권목사


   할렐루야! 반갑습니다. 왜 오월이 계절의 여왕인지 알 것 같은 아름다운 주일입니다. 제가 지난 금요일에 오늘 부부사랑주일예배에 꼿고 오시라고 카카오톡으로 장미꽃을 배달해드렸는데 지금 보니 배달사고가 났는지 한분도 꼿고 오신 분이 없어서 유감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 장미꽃이 피기 시작했는데, 오늘 부부사랑주일예배를 함께 하시는 여러분들의 부부애도 장미처럼 피어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유명한 방송작가 김수현씨가 써 둔 시에 가수조영남씨가 곡을 붙이고 불렀다는 “지금”의 가사를 소개하는 것으로 말씀의 문을 열려고 합니다.


<지금 지금 우린 그 옛날의 우리가 아닌 걸/분명 내가 알고 있는 만큼 너도 알아/단지 지금 우리는 달라졌다고 먼저 말할 자신이 없을 뿐/ 아~저만치 와 있는 이별이/ 정녕코 무섭진 않아/ 두 마음의 빛바램이 쓸쓸해 보일뿐이지/  진정 사랑했는데 우리는 왜 사랑은 왜/ 변해만 가는지/ 지금 지금 우린 그 옛날의 열정이 아닌 걸/ 명 내가 알고 있는 만큼 너도 알아/ 단지 지금 우리는/ 헤어지자고 먼저 말할 용기가 없을 뿐/ 아~저만치와 있는 안녕이/ 그다지 슬프진 않아/ 두 가슴의 엇갈림이 허무해 보일뿐이지/ 아닌 척 서로 웃으며 이젠 안녕 이젠 안녕/ 돌아서야지>


우리는 이 노래에서 한때는 뜨겁게 열정적으로 사랑하여 부부가 되었지만 지금은 변하고 식어버려 더 이상 부부로 사는 것이 무의미해서 갈라설 것을 결심하는 부부의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사람들이 이 노래에 공감하는 것은 사람도 사랑도 변한 다는 것과, 그래서 많은 이들이 부부로 살고 있지만 사실은 별 정도 없이 남남이나 다름이 없이 살고 있는 부부들의 말 못하는 속내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도 이런 부부가 등장합니다.

오늘의 말씀의 마지막 구절 23절을 보세요,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미갈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지만 미갈이 무자했다는 것은 다윗과 미갈이 애정이 없이 남처럼 살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다윗은 다윗대로 미갈에게 오만정이 다 떨어지고, 미갈은 미갈 대로 다윗에게서 정 떨어져서 죽는 날까지 부부의 즐거움을 모르는 관계로 살았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보면 이 부부가 본래 이렇게 정 없는 부부가 아니라 참 서로를 열정적으로 원하고 사랑하던 부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때는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부부"

 성경을 보면 특별히 미갈이 더 다윗을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삼상18:20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남녀의 사랑의 관계를 말할 때, 성경은 열이면 열, 백이면 백이 남자가 주도적입니다. 예를 들면 이삭이 리브가를 사랑했다고 하고, 야곱이 레헬을 사랑했다, 삼손이 들릴라를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삼상18:20"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통틀어 여자 쪽에서 주도적으로 남자를 사랑했다는 기록한 곳은 이 구절 단 한 구절뿐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삼상19:10-17을 보면 미갈의 아버지 사울이 다윗에게 왕위를 빼앗기게 될까봐 두려워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작정하고 전령을 보내 지키다가 아침에 죽이게 했습니다. 미갈이 이 아버지의 계획을 간파했을 때에 미갈은 다윗을 선택하고 창문으로 도망하게 했습니다. 미갈이 이렇게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미갈을 얼마나 원했습니까? 삼상18:27을 보면 사울이 딸의 사랑을 미끼로 다윗을 죽이려고 블레셋사람의 양피 백 개를 가져오면 딸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이 책략을 알고도 미갈을 얻기 위해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는 위험을 무릎 썼습니다. 미갈을 위하여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 후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여러 해를 동안 숨어 지내는 동안, 사울은 다윗의 아내인 미갈을 라이스의 아들 발디에게 주어버렸습니다. 보통 남편들 같으면 그런 미갈과 인연을 끊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삼하3:13을 보세요, 다윗은 왕이 되자 북방 열 지파를 다윗에게 바치겠다는 아브넬에게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오지 않으면 내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미갈이 아니면 왕관을 쓰지 않겠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미갈을 사랑했고, 원했습니다. 이런 부부가 본문 23절에서 보는 대로 부부애의 기쁨을 함께 할 수 없는 성경에서 가장 비극적인 부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미갈이 우리 시대 한국 사람이라면 <진정 사랑했는데 우리는 왜 사랑은 왜/ 변해만 가는지/ 지금 지금 우린 그 옛날의 열정이 아닌 걸>이 노래를 부르며 울지 않았을까요? 왜 우리는 한때 이렇게 뜨거웠다가 이렇게 냉냉해지고 정이 없는 남남과 같은 부부로 남게 될까요? 오늘의 말씀은 한 때 이렇게 뜨거웠던 부부가 무엇 때문에 남남 같이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무엇이 이렇게 정떨어지게 만들까요?


"무엇이 열정적던 부부를 남남 같은 부부로 만느나"

먼저 사랑했지만 이해하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걸 보여주는 말씀이 16절입니다.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 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업신여기니라” 이 말씀은 미갈이 전혀 다윗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여실히 보여줍니다.

첫째 미갈은 남편 다윗의 신앙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이 법궤를 모시는 것을 이토록 즐거워 한 것은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모든 것이 모든 것으로 삼았다는 증거입니다. 시16:2은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은 모든 것에 모든 것이었습니다. 생명보다도 귀했습니다. 미갈은 이 다윗의 신앙을 이해 못했습니다.

둘째 미갈은 남편 다윗의 비전과 추구를 이해 못했습니다. 다윗의 비전은 이스라엘이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이 성전예배를 확립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이 왕이심을 확립하고 성전예배를 확립하기 위하여 그토록 여호와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다윗성에 모시고 싶어한 것입니다. 미갈은 이 남편의 뜻과 비전과 그 추구를 이해하고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셋째 미갈은 남편 다윗의 성취와 그 감격을 이해 할 수 없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소위 육보 일 번제를 드렸습니다, 다윗이 왜 이렇게 공을 드리고 있습니까? 법궤를 모시려는 첫 번시도가 실패하고 두 번째 시도입니다. 이렇게 노심초사하고 공을 드렸습니다. 이게 성취되었습니다. 이 감격이 다윗을 뛰놀게 했습니다. 만약 미갈이 이 다윗의 추구와 성취와 이 성취의 감격을 이해했다는 집안에서 창으로 내다만 보고 있지 않고 나와서 다윗과 함께 하고, 미리암처럼 찬송과 춤을 인도했을 것을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했다면 남편 다윗이 성취감에 들떠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들어올 때 20절과 같이 초를 치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을 남남같이 만든 것은 사랑했으나 공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랑하지만 공감할 수 없는 부부

혼인서약이 강조하는 것은 함께 라는 공감입니다. 인생의 모든 희로애락을 같이 하는 것이 부부입니다. 이 공감이 없으면 부부지만 오히려 국외자와 같이 됩니다. 배우자의 일을 남의 일같이 여기고 마치 강 건너 불 보듯 하게 됩니다. 미갈이 남편의 성취와 그 감격에 공감했다면 미갈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마치 모세의 누이 미리암 같이 나와서 찬양과 춤을 인도했을 것입니다.(출15:20-21) 이렇게 해야 할 아내가 남의 일 처럼 집안에 버티고 앉아 남처럼 창으로 내다만 보만 보고 “잘한다! 놀고 있네!” 이러고 있습니다. 춤추던 다윗이 문득 이 이것을 보고 속으로는 얼마나 외롭고 정떨어지겠습니까? 그리고 성취감에 들떠 있는 다윗에게 미갈이 체신머리없이 없이 뭐하는 짓이냐고 일갈할 때 얼마나 정 떨어졌으면 다시 미갈과 부부애를 나눌 수가 없게 되었겠습니까?

 

여러분 이해하지 못하면 공감하지 못합니다. 공감이 없으면 남같이 됩니다. 사랑과 열정이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인 부부이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배우자를 이해하셔야 합니다. 배우자의 신앙을 이해하세요, 배우자와 공감 하십시오, 배우자의 꿈과 비전과 추구를 이해하고 공감하십시오. 배우자의 성취와 그 감격을 이해하고 공감하시는 부부가 되어 사랑이 과거 한때의 일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뜨거웠던 다윗과 미갈의 사랑에 결정적으로 종말을 고한 것은 감정을 참지 못하고 내 뱉은 독이 서린 언행 때문이었습니다.

 본문을 순전히 심리학적으로만 본다면 다윗과 미갈은 화가 나면 참지 못하고 함부로 말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갈의 경우를 봅시다. 20절을 보세요. 지금의 번역도 미갈이 다윗을 얼마나 가짠케 여겼는지를 충분이 이해 할 수 있지만 새 번역과 공동번역을 보면 더 실감이 납니다. "오늘 이스라엘 임금님으로서 체통이 참 볼 만하더군요 건달처럼 신하들의 여편네들이 보는 앞에서 몸을 온 통 드러내시다니“ 이렇게 빈정거리고, 다윗이 건달패와 같이 천박하게 행동해서 자기가 이제 신하들의 아내들 앞에 창피해서 얼굴을 들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가 잔뜩 난 미갈은 천한 목동인 근본은 속일 수가 없다고 다윗을 업신여기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남편을 창피하게 여긴 것입니다. 여러분 서령 미갈의 생각이 옳았다고 해도 이렇게 함부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도 남편이 일생에서 가장 기뻐하는 날에 초를 쳐서 인생최고의 날을 인생최악의 날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미갈이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때 다윗도 잘한 것이 없습니다. 미갈의 말은 다윗에게 분노의 광풍을 일게 했습니다. 다윗은 분노에 떨며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악담을 했습니다. 다윗은 아내의 비난에 그냥 침묵으로 응하던가,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잠시 나갔다 온다든가, 아내의 잘못을 논리적으로 이해시키고 설득하여 교정하게 하거나, 아니면 그의 행동을 이해해 보려는 노력들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때 할 수 있는 최악의 독설로 응대 했습니다.

21-22을 봅시다. "야훼께서는 그대 아버지와 그대 집안을 다 제처 놓으시고, 나를 택하여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 왕으로 세워 주셨소 나는 야훼 앞에서 춤을 추었소. 나는 앞으로도 야훼 앞에서 춤을 출 것이며, 이번보다 더 경망이 굴 것이요. 그대는 천하게 보겠지만, 지금 말한 그 여편네들은 나를 더욱 우러를 것이요" 내가 춤추는 것은 네 아버지가 사악하여 하나님께서 버리시고 나를 택하여 왕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네 친정이 망한 것은 너 처럼 행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미갈의 상처입니다. 미갈의 가장 아픈 곳입니다. 미갈의 약점입니다.


이 말은 미갈을 가장 아프게 하고, 모욕을 느끼게 하고 치욕스럽게 할 말을 골라서 했다는 뜻입니다. 프랑스 속담에 “목매달아 죽은 집에서는 밧줄이야기를 꺼내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상처를 기억나게 하는 말을 삼가라는 것입니다. 칼 맞은 상처보다 말에 맞은 상처가 더 큽니다. 칼 맞은 상처는 치료되지만 말로 인한 마음의 상처는 치료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일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에 일생에 씻을 수없는 최악의 악담을 주고받은 후에 미갈이 무자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날 이 두 사람 주고받은 잔인한 악담 때문에 둘 다 정이 떨어져서 한 자리에서 잘 수없는 관계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미갈의 독설과 다윗의 악담은 그렇게 열정적이던 부부의 사랑을 단 한순간에 한때의 일로 종지부를 찍게 했습니다. 화를 참지 못하고 주고받은 악담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던 남편과 남편의 사랑을 잃게 하고 아내와 아내의 사랑을 잃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주전 1000년경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왜 오늘 현대의 이야기 같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가장 아프게 하고 못 견디게 만들고 죽이는 것이 창칼이 아니라 악의에 찬 말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친한 사람, 심지어 애정이 뜨거운 부부라 해도 단 한 마디 말로 남남 같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게 말의 위력입니다.


여러분! 전쟁에서 적 한 명을 사살하는데 총알이 몇 발이 들어가는 줄 아십니까? 제가 검색하다가 아주 의미심장한 자료를 발견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적 1명을 사살하는 데 들어간 탄약은 7000발,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2만5000발, 베트남전에서는 5만발이 소요됐다. 하지만 베트남에서 저격수들이 적 1명을 저격하는데 사용한 평균 탄약은 1.7발이었다. 여러분 생각 없이 함부로 하는 말, 분노에 가득한 말은 이 저격수와 같습니다. 단 한마디로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생각 없이 배우자에게 저격의 총탄을 발사 합니다. 아마 가장 흔한 것이 직업에 성공하지 못하는 배우자를 무시하는 말일 것입니다. “다른 집 남편은 돈 잘 버는데 도대체 당신은 무엇하느냐?” “내가 어쩌다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나서 이 고생이야” “뭐 잘하는 것이 있어야지!” “그러니까 당신은 안 돼!” 이 한방에 그만 오만정이 떨어집니다. 이것이 배우자와 배우자의 사랑을 잃게 하는 것입니다. 

 

“부부애의 실패는 인생의 실패”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게 배우자이며 배우자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배우자를 잃고, 사랑을 잃으면 성공과 출세가 의미가 없습니다. 결국 부부애의 실패는 인생의 실패라는 것입니다. 돈을 얻어도 배우자와 사랑을 잃으면 소용없고, 지위와 명예를 얻어도 의미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배우자, 사랑을 실패하고 나니 모든 것이 덧없습니다. 그래서 “사랑 없으면 못 살아요”를 외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랑이 과거 한 때가 아니라 지금 현재가 되게하는 부부

그러므로 배우자를 비난하고 싶을 때, 배우자를 잃고 사랑을 잃어도 좋은지를 생각하고 말합시다. 설령 비난해서 배우자가 떨치고 일어나 성공해도 사랑을 잃었다면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항상 배우자가 더 소중하다는 것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말하고 싶을 때는 밖에서 외인이 무례하게 굴 때 한 대 치고 싶은 것을 참는 것과 같이 분이 난 상태에서는 말하지 맙시다. 외인들에게 꾹꾹 참는 다면 배우자에게 참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충고를 할 때는 마음에 분노와 미움이 솟을 때가 아니라 배우자에 최상의 사랑을 느낄 때 말하기를 훈련합시다. 그리고 항상 천국의 방언을 합시다. 천국 방언은 미안해요, 괜찮아요, 좋아요, 잘했어요, 감사해요, 훌륭해요, 사랑해요! 입니다. 이 천국의 언어를 훈련하고 사용하는 이들의 부부애는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 이 되게 할 졸로 믿습니다.


지혜자는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잠5:18)전도자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전9:9) 이게 인생의 행복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세상에 가장 불행하고 비극적인 부부는 과거에는 열정적으로 사랑해지만 현재는 한 자리에서 잘 수도 없게 된 부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백년을 살아도 짧기만 한 인생을 이렇게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배우자를 더 깊이 이해하도록 합시다. 모든 것을 배우자와 공감할 수 있는 부부가 됩시다. 입술로 죽이는 말이 아닌 천국의 말을 하기를 훈련합시다. 그리하여 우리 은혜로 부부들은 과거의 사랑보다 현재의 사랑이 더 나은 부부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믿음은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변함이 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처음보다 나중이 나은 것입니다. 믿음은 사랑에 량을 두는 것이 아닙니다.


러므로 더욱 주안에 있기를 힘쓰시는 부부가 되셔서 연애할 때 보다 지금이, 신혼 때보다 현재가. 젊어서보다는 노년이 더욱 깊고 좋은 부부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믿음 안에서 사랑은 시들거나 퇴색하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부부에게는 “지금”<지금 지금 우린 그 옛날의 열정이 아닌 걸>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는” “영원한 사랑”이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