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에게도 소망은 있다!
2015, 8, 16, 주일강론
본문 : 고전6:9-11
말씀 : 라인권목사
이번 여름에 곰배령에 갔었는데 거기서 발원하는 방태천은 청정 그 자체였습니다. 이 방태천이 내린천이 되고 내린천이 소양강이 되고, 소양강이 북한강이 되었다가 남한강과 합하여 한강이 되어 하구에 이르면 오염이 극심한 더러운 물이 됩니다. 그래서 어제 어부들이 고기잡이를 할 수가 없다고 불꽃축제를 하는 곳에서 선상시위를 할 정도입니다.
이렇게 세월이 갈수록 교회는 세속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심지어 동성애자를 성직에 안수하는 정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화의 교리를 시작할 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속화 되지 않고 성화되려면 이 세대를 분별하고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사회적 이슈가 되는 문제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성경을 통해서 공부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하겠습니다.
지금 차별금지법이니 쿼어 축제니 해서 동성애문제가 가장 큰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동성애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본문에서 배우려고 합니다. 이 본문을 택한 것은 이 본문은 이 문제 기준과 그 대책까지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영감 받은 사도는 동성애를 어떻게 다루고 있습니까?
성경에 나타난 동성애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
첫째, 바울은 동성애는 불의함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죄는 본질적으로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의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성의 대표적 사례로 남여의 성을 역리로 쓰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을 들고(롬1:25-27) 이렇게 하나님을 거스리는 악을 "불의"로 규정하셨고, 불의는 하나님의 진리를 막는 모든 악에 대한 총칭입니다.(롬1:18) 그러므로 동성애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불의요,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게 하는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바울은 동성애를 다른 불의와 똑 같은 비중의 불의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즉 동성애는본문 9절과 10절의 불의의 목록 가운데 하나입니다. 롬1:28-32절에서도 동성애는 동일하게 이방인들의 도덕적 죄악의 목록 중에 하나입니다. 즉 동성애는 음행, 우상숭배, 간음, 탐색과 동일한 비중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죄는 다 동일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라는 겁니다. 그래서 개혁교회 표준문서는 천주교와 달리 대죄와 소죄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죄를 동일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봅니다. 따라서 동성애자들은 우상숭배나 간음하는 사람들과 동일한 죄인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동성애를 동일한 죄로 보아야지 유독 동성애만을 무슨 마귀나 괴물같이 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은 아닙니다. 이런 인식이 없어서 동성애를 창조질서를 파괴로 보면서 간음은 창조 질서 파괴로 보지 않고, 몇번을 이혼 하여 간음한 교인들이 동성애자를 욕하는 웃지 못할 실정이 벌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셋째, 바울은 동성애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게 하는 죄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이 사실을 거듭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동성애를 남여의 혼인과 동일시하거나,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이라거나, 성적인 취향이라거나, 이것을 합법화하고 주례를 하거나. 안수하는 것이나, 동성애를 주장하는 것을 인정하고 포용한다는 것은 명백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의에 불과 합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동성애자로 살 수 있다는 주장이 원칙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동성애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의요,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죄이므로 그리스도인 동성애자란 본질적으로 존재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 사실로 보면 동성애 자들은 영원한 멸망만 있을 뿐 소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성경이 정죄하는 동성애자들은 소망이 없을까요? 사도 바울은 동성애자들에도 구원의 소망이 있다고, 실제적 사례를 들며 구원의 길을 제시하시고 있습니다.(11)
동성애자들에 대한 성경의 대책은
본문은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동성애자들이 고린도교회에 있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동성애자가 있는 것은, 이방인들에게는 우상숭배나 음행과 남색이 죄가 아닌 하나의 문화이고 풍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받은 이후에도 이것을 심각하게 죄를 죄로 여기기 않기 때문에 믿기 이전의 음란한 행위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은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소망이 없을까요? 바울은 있다고 합니다. 고린도교회에 있던 동성애자들이 그리스도와 성령의 중생의 씻음을 받아서 거룩함과 의롭다 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11) 즉 동성애자가 새로운 피조물, 새사람이 된겁니다. 동성애자를 이렇게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한 것을 한 단어로 정리하면 “믿음으로"입니다. 그래서 존 스토트는 그리스도인들이 동성애적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은 믿음뿐이라고 했습니다. 저도 여기에 절대적으로 동의합니다. 왜 믿음이 동성애자들에 대한 우리 하나님의 유한 방안일까요? 그것은 믿음의 본질 때문인데, 이에 대한 존 스토트의 분석과 저의 분석이 동일하기 때문에 믿음의 본질에 대한 스토트의 분석을 소개합니다.
믿음은 동성애자들에 대한 유일한 하나님의 방안
첫째 믿음은 하나님의 기준을 받아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본질적으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을 받아드리고, 그 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신 예수께 자기를 복종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를 따름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혼인에 대한 성경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일남일녀가 그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는 것을 혼인이라고 합니다.(마19:4,5) 이게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믿음은 이 기준을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하나님이 정하신 관계외의 모든 관계를 간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믿는 마면 믿음은 이 기준을 받아드려 동성애를 불의라고 하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은 예수를 따름입니다. 예수를 따르기 위하여 은사로 독신을 가능하게 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마19:12,고전7:8,38) 예수님과 바울이 이를 입증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은사로 금욕하고 독신으로 헌신했습니다. 어쩌면 자기 육신의 정욕을 따르는 동성애자들보다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금욕하는 생애를 사시는 분들이 더 많을 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동성애적 충동을 억제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육신의 정욕을 따르는 것이지(13)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믿고 예수께 자기를 굴복하는 것입니다. 정욕에 노예가 될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를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기준을 받아드리고 예수를 따른다면 동성애뿐만 아니라 모든 육체의 소욕에서도 구원 받고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둘째, 믿음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1) 믿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음과 성령으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에 이르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란 인간의 문제에 하나님의 은총이신 예수가 오시는 것이며 그 은총을 받아드리는 것이며 이 은총이 임하는 곳에 인간의 문제는 해결되는 것입니다. 이 은총으로 새 사람이 되고, 육체의 본능을 금욕하고 오직 주님께 삶을 드리는 사람들도 허다합니다. 성경은 동성애자에게도 예수님이 구원하시는 은총으로 오셔서 그 죄에서 구원하시고 해방시키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동성애자들을 사탄으로 볼 것이 아니라, 한 영혼으로 봅시다. 전도의 대상으로 보고, 그 불쌍을 영혼이 구원 받고 변화 되도록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은총은 인간의 강함이 아니라 약함에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에게 있는 가시가 무엇이건 간에 그 가시가 주님의 족한 은혜였다는 것을 압니다. 즉 은총이 가시라는 약함에 나타나서 약한 데서 온전해지게 하셨습니다.(고후12:9) 따라서 동성애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동성애적 본능이 어쩔 수 없는 가시라면 그 어쩔수 없는 동성애의 죄에도 주님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 은총을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예수의 구원은 강한데 임하는 것이 아니라, 약한데 임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동성애자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의 소망이 있습니다. 동성애자도 그 가시에서 은혜를 받고 변화되어 정욕에서 자유하고 온전해 질 수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믿음은 동성애자도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합니다. 믿음은 동성애적 경향을 해결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며 하나님의 대안인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동성애의 약함에도 은총이 임한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의 위로이며 소망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모든 약함에 대한 하나님의 방안
동성애적 경향과 동성애에 은총이 임한다면 우리의 모든 문제와 약함에도 은총이 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진 모든 약함에도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왜 동성애 문제를 다루겠습니까? 동성애자가 지금 우리교회에는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동성애는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은 심지어 동성애적 경향에도 하나님의 은총이신 예수님이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게 하시고 변화되어 새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이렇게 동성애는 구원하시는 은혜가 더욱 풍성이 드러나 구원의 은혜를 명백히 알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육신의 약함 때문에 고통 합니다. 자기, 육신, 옛 사람 이걸 이기지 못하여 영을 따르지 못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래서 중독에 빠지고, 옛 사람의 습관에서 자유하지 못하는 고통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동성애에도 임하신다면 우리의 이 약함에는 얼마나더 임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약함과 문제들에 믿음으로 하나님의 기준과 은총을 받아드린다면 믿음은 이것을 이기는 능력이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은혜에 우리 약함의 구원이 있습니다. 이 은혜에 해결이 있고, 승리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모든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유일한 대책이라고 믿습니다. 믿음은 동성애자도 소망이 있게 합니다. 동성애도 해결 받게 합니다. 이 원칙에서 교회는 동성애자들에게 대하여 어떤 실천적 대책을 가져야 할까요? 첫째, 배척으로 대상이 아니라, 구령의 대상으로 삼아 힘써 구원의 복음을 전합시다. 둘째, 교회안에 동성애가 있다면 그가 거듭나 화개하고 새 사람이 되도록, 구원 상담을 하고, 사랑으로 권면하고, 격려하며 그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셋째, 끝까지 권면을 받지 않고 회개치 않고 동성애를 고집한다면, 회개하도록 수찬 정지를 하고, 마지막으로 출교하여 교회의 거룩성을 보존케 합시다. 넷째, 교회 밖의 동성애를 주장하는 완악한 동성애자들은 그들의 정욕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들의 죄에 유기해 두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롬1:28) 그러므로 정치적 이데오르기에 휩쓸려 동성애자들을 대적하는 것은 비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동성애를 막지도 못하고, 오히려 이슈를 만드는 부작용만 양산함을 미국의 사례가 분명히 해주고 있습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들은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더러운 자들은 그대로 더럽고거룩한 자들은 그대로 거룩할 것으로 믿습니다.(계22:11)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제가 동성애 문제를 말씀드리는 것은 이문제가 우리 사회에서도 이슈이므로 분별이 필요해서지만, 믿음이 우리의 약함과 모든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방안임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동성애자들도 은총이 임한 다면 우리의 약함에는 더욱 은총을 나타내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문제를 이렇게 영적을 보시고 믿음으로 접근합시다. 믿음으로 그리스도께로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가 임하는 곳에는 생명과 변화가 임합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모든 약함과 문제를 구원하고 변화 시키도록 믿음으로 하나님의 기준과 은총을 받아드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