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이성
지성은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필수적 조건이며 그래서 지성을 숭상하고 사람이 가장 높은 자존감을 갖는 것이 지성일 것입니다. 지성은 신앙에서도 본질적인 것입니다. 주님은 “영생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셨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요한 일서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이 지식을 의미하는 “안다”는 말입니다. 요한일서는 안다는 말로 시작해서 안다는 말로 마치는 성경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시작하여 그리스도를 인식하는 지각으로 마치기 때문입니다.
요한서신에서 우리는 이 지성이 신앙의 세계에서 아주 상반된 결과를 도출한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본서에 등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은 일종의 영적 엘리트의식을 가진 자들이지만 결국 도덕적 타락과 성육신을 부인하는 자리에 떨어졌습니다. 이들과 대조적으로 지성을 강조한 요한은 진정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인 그리스도와 그 나라의 일을 깊이 아는 충만한 자리에 이르렀다는 것을 봅니다.
이 차이는 무엇일까요? 영지주의자들은 이성을 기준으로 신앙을 세우려고 했고, 사도는 계시를 기준으로 하고 이성을 계시를 이해하는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육은 악하다는 철학적 사고를 기준으로 성육신을 이해하려고 해서 성육을 부인하고 가현설을 주장하는 중대한 이단으로 전락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예수의 인성을 믿기가 어려웠던 이들이나 예수님의 신성을 받아드리지 못하는 현대주의자들은 동일하게 이성을 기준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말은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 같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높아진 교만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 이른 것이지요. 예수의 인성을 부인하거나 신성을 부인하는 것은 그들의 하나님은 이성이고 그들의 경전은 이성이며, 이성의 노예에 불과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파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설 때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만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파하는 강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철저하게 성경계시를 기준하여 그 계시에 대한 이해를 키워가는 작업입니다.(5:13,벧후1:2,8,3:18) 신앙은 내 이성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계시된 말씀, 곧 성경에 따라서 판단하고 결정하는 삶에서 실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하나의 종교적 존재가 아니라 내 삶의 원리와 실제가 되게 하는 길입니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게 지각을 주사 우리도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라 자녀들아 너희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 요한일서의 이 마지막 말씀은 이런 성찰을 요구합니다. 내게 그리스도를 아는 중생한 이성이 있는가? 그리고 내 이성은 이 계시된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일에 충실한 종인가 아니면 우상인가?
- 2015 대림절 새벽기도회 요한서신 프롤로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