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사가랴가 본 구원

아브라함-la 2015. 12. 20. 17:19

2015,12,20주일강론  

본문 : 눅1:67-80 

말씀 : 라인권목사

마리아의 찬송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와 권능을 나타내 주시는지를 찬송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의 사가랴의 찬송은 이 구원이 어떤 것인가를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가랴의 찬송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씀은 “구원”이라는 말로 7번이나 나옵니다. 사가랴는 이 구원을 성령의 감동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사가랴가 성령의 감동으로 본 구원관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본문처럼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 개념을 명백하게 가르쳐 주는 말씀도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오늘은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사가랴가 본 구원을 통해서 공부하려고 합니다. 우선 이 구원이라는 개념을 분명히 파악하기 위하여 사가랴가 구원이라는 말을 어떤 의미와 용도로 사용했는지를 보겠습니다. 

  

구원이라는 말의 의미와 용도

구원이라는 말을 우리말 사전은 명사로는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이라고 정의했고, 동사로는 “어려움이나 위험에서 벗어나도록 돕거나 구하다”고했습니다. 성경과 우리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구원이라는 헬라 말도 “건져 낸다”는 뜻으로 사실상 우리말 사전과 동일합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사용된 경우를 보면 국가나 개인적인 원수에게서 건짐을 받는 것을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출애굽과 사사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원수에게 건져낸 것을 구원이라고 했습니다.(출12:7,15:1삿2:16,18) 이렇게 위험과 환난에서 건짐을 받은 것을 구원이라고 하고(시107:13)그리고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것을 구원이라고 했고, 광야에서 만나와 물을 주시고 메추라기를 주신 것도 구원이라고 합니다. 즉 물질적인 어려움 속에서 도움을 받은 것을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도 “구원의 뿔” 이라는 말과 모든 원수와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구원하시는 구원이라는 말씀도 그 단어 자체는 이렇게 정치적이고, 육체적인 의미의 구원입니다.


그러면 사가랴는  이 구원이라는 말을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의미와 용도로 사용했느냐? 아니면 영적인 의미와 용도로 사용했느냐는 것입니다. 사가랴는 이 구원이라는 말을 영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속량”이라는 말씀으로 구원을 시작하여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라는 말씀으로 마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는 사가갸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본 구원은 예수를 통해서 주시는 구원은 영적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이 영적이라는 말은 구원이 육신생활에 관계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본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질병에서 건짐을 받아도 나사로와 같이 다시 죽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주셨지만 다 죽었습니다.이것은 일시적인 구원입니다. 본질적으로 영혼의 구원을 받아야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이 영적인 구원입니다. 그러면 사가랴는 이 영적인 구원을 어떻게 보았습니까? 77절은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사가랴는 구원을 소극적으로 표시하여 죄와 그 결과에서 건짐을 받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소극적으로 표시하여 죄와 그 결과에서 건짐을 받는 것

이 죄 사함을 받는 구원을 사가랴가 성령으로 본 것입니다. 이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본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아들을 다윗의 집에서 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선지자들이 미리 말씀 하신 것으로 성막과 희생제물과 절기들로 그림자로 모형으로 보여 주시다가 이제 아브라함에 맹세하신 그 원형이신 예수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친히 제물 되어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 원수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은 죄와 그 결과에서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성경의 증거를 봅시다. 먼저 마1:21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이것이 예수님의 자기인식이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고 하셨고, 그래서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기를 잡으려는 무리에게 칼을 사용하는 베드로에게 “네 검을 거두라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영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니냐?” 고 하셨고,(마26:53)빌라도에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18;36)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는 구원을 죄 사함을 받는 것이라고 전했습니다,(행2:38) 구원은 죄를 대속 받은 것이고 이는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벧전1:2,18,19)그래서 믿음은 영혼의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벧전1:9) 이게 사가랴가 성령으로 본 구원입니다.


그러면 왜 이 죄 사함을 받는 구원을 구원의 소극적인 측면이라고 합니다. 죄와 사망에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아들 예수로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의 일이시고. 이 구원이 개인에게 효력이 있게 되는 것도 선택과 부르심과 거듭나게 하심과 믿음주심으로 이루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이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드리기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오 그 결과에서 받는 구원을 소극적이라고 하는 것은 구원이 소극적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사랑과 능력으로 된 것이며 단독사역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이고 수동적인 순종으로 된 구원입니다. 이 전적인 은혜를 더 은혜 되게 하고 드러내기 위하여 소극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구원이 행위가 아니라 은혜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고 구원 받기 위하여 인간의 모든 의를 버리고 오직 구원하시는 은혜만 바라고 의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문에서 주님께 부인 당한 사람들이 이걸 몰라서 천국가는 줄로 알다가 지옥 갔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에 이 은혜를 깊이 알아 죄 사함 받은 구원의 은혜가 풍성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천국문에서 쫒겨나는 일이 없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사가랴는 이 소극적으로 표시된 구원이 구원의 전부가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표시 되는 구원을 보고 있습니다.


구원은 적극적으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

74절과 75절을 봅시다. 원수의 손, 즉 죄와 사탄에게서 건지심을 받은 이 구원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 앞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담대하게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이 섬김을 대부분의 주석가들과 같이 구원받은 사람의 헌신만으로 보기 쉽습니다. 이렇게 보면 죄와 그 결과에서 건짐 받은 것만 구원이고 헌신은 구원에서 나오는 하나의 가지나 열매에 그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가랴는 성결과 의로 섬기는 것을 계속적인 구원의 진행으로 보았습니다. 이렇게 표피적인 헌신이 아니라 구원으로 보는 것이 본질입니다. 개혁신학은 헌신과 선행을 “성화”구원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죄 사함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죄 사함을 받은 이후부터 천국에 들어가는 그날까지 우리 앞에 놓여 진 인생과 삶을 살리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화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방법이 성결과 의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성결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모시고 닮기 위하여 하나님의 미워하는 부정을 버리고 자기를 정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만큼 하나님과 관계가 깊어집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그리고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이 “의”는 사람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틀어지는 것은 불의 때문입니다. 왜 서로 시기하고 미워하고 싸웁니까? 자기만 좋게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남을 자기를 행복의 이용물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이게 불의입니다. 이 죄에서 구원 받은 사람은 이웃의 행복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구원은 하나님도 없고 이웃도 없이 오직 자기를 섬기는 거짓된 사람을 하나님과 이웃만 아는 천국 사람, 참 사람으로 구원한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이란 예수 믿고 죄 사함을 받아서 천국에 들어가는 정도가 아니라 구원은 이 참 자기, 참 사람, 천국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성결과 의로 하나님을 섬기므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입어가고, 아들을 알아가고 닮아가는 갑니다. 이 섬김으로 임시 세상 것을 영원한 생명으로 바꾸어갑니다. 이 구원이 천국의 영광과 상급의 양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이렇게 크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이 구원은 죄 사함을 받는 것과 같이 수동적으로 받아드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람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섬겨야합니다. 성결과 의로 섬기는 것은 우리 인간의 일이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닮는 성화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결과 의의 섬김을 통해서 하십니다. 그래서 이 성화구원을 적극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어떻게 표현 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 까지 자라 가라, 아들의 형상을 이루라, 두렵고 떨림으로 순종하여 구원을 이루라, 영생을 취하라, 선한 싸움을 싸우라 신의 성품에 참여하라, 자기를 건축하라 건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을 받은 구원은 이 구원의 출발이요 시작에 불과합니다. 사죄 구원 받은 순간부터 천국까지인생과 삶을 아들의 형상을 이루도록 성결과 의로 구원해 가는 것입니다. 이 구원이 천국에서 어떤 영원을 보낼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영원을 보낼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죄 사함을 선물로 받게 합니다. 이렇게 받은 천국에서 어떤 영원을 보내느냐는 성결과 의로 하나님을 섬기는 삶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에서 큰 자가 되게 합니다. 천국에서 받을 영광, 상급이 크고 작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이렇게 크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사가랴가 이 크고 영광스러운 구원을 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을 이렇게 바로 알면 어떤 유익을 누리게 되겠습니까?


구원을 바로 알 때 누리는 유익

첫째, 믿음이 육신과 세상으로 기우는 것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사가랴가 찬송하는 이유가 자기 세례요한이라는 좋은 아들을 낳아서가 아니라 다윗의 집에서 일으키는 예수님의 구원 때문입니다. 예수와 구원이 찬송이 되는 것은 구원을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것임을 바로 알았기 때문에 육신으로 기울지 않고 영적인 것 때문에 찬송한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기복적이 되고 세상적이 되는 것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이 영적인 구원을 바로 알지 못해서이고, 복음의 긍정적인 측만 강조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이 구원의 크고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이번 성탄절 더욱 깊이 아셔서 세상과 육신으로 기우는데서 구원 받으시고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삶이 실제로 변화되는 축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왜 예배와 생활이 다른 교회가 되고 성도가 되고 있을까요? 구원관이 잘못 되어서입니다. 구원을 죄 사함 받아 천국 가는 것으로만 편협하게 알면 이것은 믿을 때 해결 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도 상관이 없이 천국 가는 것으로 압니다. 성화를 칭의와 같이 생각합니다. 그러니 삶이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성결과 의로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입니다. 내 앞의 모든 인생과 삶이 내가 이루어야할 구원으로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단일성을 이루고 천국과 단일성을 이루어갑니다. 이것이 영원을 결정합니다. 구원을 이렇게 알면 내 삶이 변합니다. 가치관이 변합니다. 세계관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이 목적이 되고 천국이 목적이 되고 복음이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풍성한 삶을 이 세상에서 누리는 삶이 됩니다.

구원은 하나님도 이웃도 없고 오직 자기만 있는 거짓된 사람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는 참 사람이 되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자기가 없이 살면 도태 되고, 죽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세요. 온전히 하나님과 백성을 위하여 자기를 드리고 쓰고 쓰다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을 망하게 했습니까? 살게 하셨습니다. 구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가장 완전하고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산 사도들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풍성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성결과 의로 섬기는 이 구원이 진짜 자기를 위하고 행복하게 하고 성공하게 하고 영원하게 하는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바른 구원관이 사활을 가름하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천국만 들어가는 것이 전부인 것 같이 아는 편협한 구원관이 아니라 성결과 의로 평생을 구원하는 크고 영광스러운 적극적인 구원관을 가지시기를  죽복합니다.


저는 사가랴가 이렇게  구원을 본 것은 영광의 주가 여자의 몸에 아기로 잉태하는 성탄을 보고 정치적이고 세상적 인 구원관이 영적으로 바뀌었다고 믿습니다. 성탄절에 주님이 이 놀라운 구원과 크고 영광스런운 구원을 이루어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성탄절은 이 구원의 은혜와 구원을 생각하는 절기입니다. 이번 성탄절을 구원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죄와 그 결과에서 구원의 은혜를 더욱 깊이 아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율법 아래 나셔서 죄인의 영원한 행복을 위하여 자기를 드리시는 주님을 통해서 우리 앞에 놓인 삶을 구원으로 보고 성결과 의로 섬겨 아들의 형상을 이루는 이 구원으로 금생과 내생을 살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저는 구원관이 바라야 바른 신앙과 삶이 되고 금생과 내 생을 구원으로 복되게 한다고 믿습니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