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구원관
“일반으로 받은 구원”이라는 용어는 구원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에 믿을 때 차등 없이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사죄, 칭의 하나님의 자녀 된 구원을 특별히 강조한 말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이 받은 구원에 대하여만 말하려고 이 편지를 쓴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구원이 무엇인지를 구원을 전체적으로 이해하여 온전한 구원관을 가지게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는 겁니다.
이렇게 구원에 대하여 편지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게 만들 것은 구원을 믿어서 죄 사함 받고 천국에 가는 것을 구원의 전부로 아는 경향이 확장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구원을 편협하게 알면 우선 믿음으로 이미 천국 갈 수 있게 되었으니 어떻게 살아도 상관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믿음과 은혜를 오해하게 됩니다. 천국은 믿음과 은혜로 가기 때문에 믿음과 은혜가 인간의 책임을 불필요하고 면제하는 것으로 오해하여 신앙생활을 자동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 결과 성화를 칭의와 같이 오해하여 믿음과 은혜를 비인격적으로 만드는 교리주의에 빠지게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으로 살겠다는 의지자체가 죽는 것이 은혜다. 죽는 것이 믿음이지 사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렇게 믿음! 믿음! 은혜! 은혜! 하지만 이게 교리주의입니다. 종교개혁의 모토를 도그마에 함몰 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과 은혜라는 도그마에 함몰되어 천국의 상급은 공로주의라고 상급을 부인합니다. 그 결과 은혜를 도리어 방탕거리로 전락 시킵니다. 이게 믿고 구원 받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변화가 없고, 성장하지 못하는 본질적인 이유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천국 가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은 것은 아들의 형상을 이루는 성화를 목표 구원 받은 것입니다. 성화는 칭의와 같이 하나님이 단독으로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이 유기적으로 만들어가는 인간의 책임이 수반되는 은혜의 작업입니다. 따라서 성화는 필연적으로 차등이 발생합니다. 사랑과 충성의 양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성화의 양은 결국 영화구원에 이른 천국에서 상급을 결정하는 것이 것이기 때문에 상급의 차등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 가는 것을 구원의 전부로 아는 편협하고 소극적인 구원관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구원관을 확립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구원을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의 신앙과 삶은 아주 역동적이며 적극적인 삶이 될 것입니다. 지금 내 앞에 놓인 삶과 인생과 모든 것이 내가 살려가고, 내가 이루고 받아갈 나의 구원이요 구원거리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의 사람은 날마다 변화를 받고 성장할 것입니다. 그만큼 더 풍성한 삶과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그것이 천국에서 영원한 것으로 받게 하는 영원한 성공인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