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새벽이슬

모욕의 십자가를 지는 기도

아브라함-la 2016. 3. 24. 20:41


시22편은 십자가의 고통을 영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 그리고 육체적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아버지 하나님께 끊어진 영적인 고통이라면,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는 정신적인 고통이며, “내 모든 뼈를 셀 수”있다는 말은 육신적인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십자가의 고통 중에 인성으로서 주님께서 가장 견디기 어려웠을 고통이 모욕감이었을 것입니다. 인격의 존엄함은 차별이 없습니다. 성경은 임금과 한 여종의 인격을 같은 비중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격의 존엄함은 동일하지만 인격에 손상을 입었을 때 느끼는 모욕감은 자신이 자신에 대하여 가지는 존엄감의 정도에 따라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왕이 종에게 모욕을 당한다면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은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 “인자”로 인식하고 계셨습니다. 이런 주님이 평소에 “귀신들렸다” “세리와 창기의 친구”니“나사렛 사람”이라는 멸시와 모독을 당했지만, 십자가야말로 모욕의 절정입니다. 사람은 맞을 때 모욕을 느낍니다. 짐승도 십자가에 못 박지 않는데, 사람은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합니다. 벌레 같이 여겼다는 것은 죄책감이 없이 못 박았다는 뜻입니다. 벌레를 죽이는 데는 죄책감이 아니라 징그럽기만 합니다. 이때 인간은 죄책감 없이 한 인격을 벌레와 같이 짓밟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자”의식을 가지신 주님의 모욕감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이 자신을 끔찍하고 징그러운 벌레로 인식되어 자신을 견디기 어렵게 한 것은 원수들의 멸시와 모멸만이 아니라, 죄감이라고 믿습니다. 성경은 세속화된 롯도 소돔의 죄악 때문에 고통을 받았다면, 무죄성 하신 주님께서 온 세상 죄를 다 지셔서 아예 죄가 되었을 때에 얼마나 자신이 부정하고, 가증하며, 소름끼치고, 징그러우셨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온 세상 나를 두고 수군거리고, 비방거리로 삼습니다. 신앙을 조롱당했습니다. 신앙이 비웃음거리가 되기보다 순교를 택할 것입니다. 다윗도 주님도 이런 모욕을 당했습니다. 외면의 시간은 이 모욕의 시간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시간입니다.


모욕이 무엇인지 아시는 주님께서 어떻게 이 십자가의 모욕을 참으시고, 감당하실 수 있으셨느냐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9-10절입니다. 모태로부터 날 때부터 나는 내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십니다. 즉 주님은 나는 내 것이 아니라 아버지 것이라고 기도로 고백 하신 것입니다. 자신을 “인자”로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 종이다. 내 생명도 인격도 내 것이 아니라 아버지 것이다. 이렇게 기도로 자기를 부인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모욕을 순종하게 하고 받아드리게 하고 감수하게 했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못 박은 것은 원수와 로마병정이거나, 쇠못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셨습니다. 주께서 기도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주님의 심령은 가난해지셨습니다. 지킬 자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순종할 자기만 있고, 하나님의 일과 영광만 있게 되셨습니다. 자기를 버려 가난해지셨을 때에, 도리어 불쌍히 여길 수가 있으셨고, 축복하실 수가 있으셨습니다. 분노가 자기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고요하고 잠잠하고 평안하실 수가 있으셨습니다. 이 기도가 주님의 십자가의 비결이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나를 사람이 아니라 벌레로 알아 죄책감 없이 짓밟히는 모욕의 십자가의 시간이 내 인생의 잔일 때가 있습니다. 이 잔을 어떻게 마셔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외면의 시간, 십자가의 시간의 모욕의 시간은 기도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 시간은 주님처럼 기도로 모욕을 느끼는 자기를 부인하고 못 박는 시간입니다. ‘저는 모태로부터 날 때부터 주님의 것입니다. 나는 나 때문에 분노할 자가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만 분노할 자입니다. 나는 피로 사신 주님의 것입니다. 내 자존감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 뜻과 일과 영광이 문제입니다.’ 이렇게 기도로 삭이고, 녹이며, 감당하고 이루며 십자가의 시간을 사는 것이 믿음이요, 제자의 길입니다.


외면의 십자가의 시간에 이 기도로 자기를 못 박고, 주께 자기를 의탁하는 가난해진 사람은 나에 대한 평가를 염려하지 않는 평안을 누릴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처럼 모욕을 가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그를 걱정해서 기도해주고 축복하는 강하고 큰 사람이 될 것입니다. 벌레 취급 받는 진토에서 원수 앞에 들게 하는 영광의 날을 맞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어 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 사람을 만들고 싶어 하셔서 십자가의 모욕을 감수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런 제자를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모욕이 아픈 만큼 더욱 더 주님의 십자가로 가는 것입니다. 십자가 아래서 날 때부터 나는 내가 아니라 아버지의 것이라는 주님의 기도를 배웁시다. 이 기도로 내 몫에 태인 십자가의 모욕의 시간을 주님처럼 삭이시고, 이기며 승리하여 구원하시는 십자가의 영광을 나타내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