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경 강 해/천국 비유 강해

씨 뿌리는 자의 비유(5) -돌밭에 떨어진 사람-

아브라함-la 2016. 6. 26. 20:51

016,6,5, 주일강론

본문 : 마13:5-6

말씀 : 라인권목사

돌밭에 떨어진 사람의 첫 번째 특징은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는 것입니다. 기쁨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과 구원의 말씀을 받아드린 사람에게 나타나는 영적인 특징입니다. 이 기쁨은 밭에 감추인 보화나 진주의 비유에서 보듯 전인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삶의 동력이 되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이 천국이 임한 양태인 것입니다. 그러나 돌밭에 떨어진 사람의 기쁨은 어떤 기쁨입니까? 

  

돌밭에 떨어진 사람의 기쁨은

이 사람의 특징은 “곧” “즉시” “잠시” “잠깐”이라는 단어들에서 보듯 일시적인 기쁨에 그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일시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말씀을 온전히 깨닫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돌밭에 떨어진 사람을 흔히들 감정적인 사람이이라고 합니다. 총신에서 가르친 신성종목사는 “양재기 신자” 양은 냄비 같은 사람라고 했습니다. 핸드릭슨은 부흥회에서 순간적인 충동, 감정적으로 감동을 받아 믿음이나 변화나 헌신을 결심했지만 그것을 지키지 못해서 한 순간의 감정에 그치고 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물론입니다. 그렇지만 왜 이렇게 되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돌밭에 떨어진 사람은 말씀의 반응이 어떤 양태로 나타나는 사람입니까?


돌밭에 떨어진 사람의 말씀의 반응의 양태

우선 가장 근본적이고 대표적인 양태가 복음과 진리의 긍정적인 측면만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 증거가 즉시 기쁨으로 받되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 곧 넘어지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 환난이나 박해가 오면 곧 넘어지고 배반합니까? 그것은 그가 처음 복음의 구원의 진리를 받을 때에 전체적으로 받아드린 것이 아니라 좋은 것만 귀에 들어오고 받아드렸기 때문입니다. 죄 사함, 칭의, 자녀 됨 천국, 평강 기쁨 자유 이런 복음의 긍정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부가 아닙니다.


사죄는 회개를 요구합니다. 이것을 마3:5-12이 잘 보여 줍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받으러 오는 것을 본 세례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했습니다. 회개의 열매가 없으면 찍어 불에 던져진다고 하시고, 알곡은 모아 곡간에, 쭉정이는 꺼지지 않은 불에 태우신다고 하셨습니다. 회개에 대하여 이 바리새인들과 아주 대조적인 사람이 세리장 삭개오입니다. 삭개오는 주님을 모실 때에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토색한 것은 네 갑절로 갚겠다고 했습니다.(눅19:8)이것이 회개입니다. 지금까지의 하나님 없는 모든 삶을 죄로 여기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칭의는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의로운 삶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롬1:17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맏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자녀 됨은 순종을 요구합니다.(롬16:26,히5:8) 천국은 환난이 요구됩니다.(행16:22) 처음 들고 믿을 때 이걸 다 듣고 받아드렸다면 그리고 깨달았다면 그는 환난과 박해가 있을 것을 알았을 겁니다. 그리고 각오했을 겁니다. 그렇게 했다면 환난과 박해가 와도 배반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에 대한 실제적인 예가 눅9:57-62에 나옵니다. 주님의 갈릴리 사역이 절정에 달하여 많은 무리가 에워싸 밀고 따랐습니다. 이렇게 길을 가실 때에 어떤 사람-마태는 한 서기관-이 나와서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겠다고 했습니다.(눅9:57) 그러자 주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58) 고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주님의 말씀에 많은 무리가 경청하고 따르는 것이 감명을 받았습니다. 주님이 행하시는 이적- 병을 고치시고 오천명을 먹이시는-에 수많은 무리가 따르는 것에 감동했습니다. 그 예수와 예수의 일이 선망이 되었습니다. 그 예수를 따르면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른다고 했습니다. 이때 주님이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성공과 영광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과 고난이 기다린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어마 뜨거워라!’ 주님을 떠났습니다. 이걸 보고 주님을 따르려고 하던 자가 떠나려고 하자 주님은 넌듯이 붙잡는 체 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하시자 이 사람은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 하소서” 이렇게 핑계하고 떠났습니다. 왜입니까? 복음의 긍정적인 면만 보고 좋아 하고, 흥분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선포되니 즉시 떠난 것입니다. 

 

이게 무서운 것입니다. 진리는 빵과 다릅니다. 빵은 없는 것보다 반쪽이라도 있는 게 좋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다릅니다. 만일 코끼리가 반쪽만 있다면 없는 것보다 좋을까요? 심지어 전염병이 생길수도 있습니다. 진리는 이와 같습니다. 반쪽 진리는 진리를 죽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에서 멀어지게 하고 원수가 되게 합니다. 반쪽진리는 온전한 믿음과 구원에 이르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원수입니다. 이것 때문에 영혼이 죽고, 기독교가 일반 종교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긍정적인 면만 보고 감명을 받은 것은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복음 진리의 좋은 면도 기뻐해야하고, 부담되고 싫은 면도 기뻐하는 것이 깨달은 것이요, 참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신동엽 시인이 “껍데기는 가라!”고 외친 것 같이 약 장수 처럼 반쪽 복음, 값싼 복음을 파는 쭉정이는 가야합니다. 복음의 긍정적인 것에만 감명을 받은 일시적인 기쁨이 바람에 날리는 쭉정이기 되게 합니다. 복음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깨달은 알멩이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따라서 돌밭에 떨어진 사람은 자신의 호불호에 따라서 진리를 받아드리는 주관적인 사람이며,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으로 자기 기쁨, 행복을 삼은 사람입니다. 돌밭에 떨어진 사람의 특징은 주관적인 사람입니다. 돌밭에 떨어진 사람은 반드시 복음의 긍정적인 측면만 받아드리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의 부정적인 면만을 받아드린 사람도 있습니다. 즉 이 사람은 진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선호하는 것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어떤 이는 복음의 부정적인 요구만이 참된 복음이요. 고난이 신앙생활의 전부라고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긍정적인 면과 축복을 다 진리가 아니라고 부정해 버립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정말 자기를 부정하고 진리를 위하여 고난을 무릅쓰는 제자 되는 대가와 성화의 의무를 순종합니까? 전혀 입니다. 오히려 옛 사람으로 삽니다. 이 사람은 자기 부정을 주장하고, 고난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좋은 신앙인 줄로 압니다. 자기 부정, 고난 이것을 주장하는 것이 자부심을 채워주고, 참 제자 인 것 같고,의인 같습니다. 멋집니다. 이것이 자기 부정이나 고난만을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자기를 진리에 복종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선호하는 것만을 받으려고 합니다. 복음의 긍정적인 면이 좋은 사람은 긍정적인 면만 들으려고 하고 부정적인 것에는 귀를 막고 있습니다. 진리의 부정적인 면이 자기 성향에 맞고 좋은 사람은 그것만 들으려고 하고 다른 것에는 귀를 막는 것입니다. 이것이 돌밭입니다. 이것이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따라서 결국 이 사람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으로 자기 행복을 삼은 사람입니다. 왜 제자들 중에서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했습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고난과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지는 구원과 천국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이걸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원하는 것은 이 세상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메시야 왕이시다. 그 예수의 나라가 온다, 그 나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자리를 차지한다. 열두지파를 다스리는 권세를 얻는다. 이게 좋습니다. 이 말만 들리고 들어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 십자가로 가시니 헌금 훔치다가 결국은 은 삼십에 판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를 반쪽만 받아드리고 그래서 잠깐 기뻐하다 잠간 믿다가 순식간에 넘어지고 배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돌밭에 떨어진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의 영적 취향을 섬기고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복음의 긍정적인 측면을 받아드리는 것도, 반대로 부정적인 면을 받아드리는 것도. 그게 자기의 영적 취향이고, 만족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성적인 사람은 믿음을 지식으로 압니다. 감성적인 사람은 믿음을 감정이라고 고집합니다. 도덕적인 사람은 믿음은 의지 실천이라고 고집합니다. 이것은 순전히 자기의 영적취향이 그것과 잘 맞아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는 것 같고 하나님과 주님을 따르고 섬기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를 위하는 것, 자기를 예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람의 헌신은 고상한 놀이에 불과 합니다. 교회에서 찬양대 안 하면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찬송할 때는 열정적인데 말씀 시간에는 못 견딥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좋으면 합니다. 싫으면 안 합니다. 이게 우상입니다. 자기에게 힘들고, 싫고, 괴로운 그 순간 끝입니다. 이게 돌밭에 떨어진 사람입니다.


이 돌밭의 사람의 치명성은 비록 반쪽이라도 진리를 어느 정도는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이 스스로 속이게 합니다. 그건 깨달은 것, 믿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종교적 감정에 불과한 일시적인 믿음일 뿐입니다. 이것이 구원이 없는데도 구원이 있는 사람으로 착각하기 십상입니다. 말씀을 기쁨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받았습니다. 믿음이 있습니다. 기쁨의 예배와 봉사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 착각입니다. 실상은 자기가 선호하는 것만 받았지 진리를 전체로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좋아서 할 뿐입니다. 자기를 예배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섬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종교적 감정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고상한 종교놀음을 한 것입니다. 여기에 구원이 천국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주님은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시적인 믿음과 기쁨을 천국이 나타남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이 돌밭에 떨어진 사람인지 아닌지 시금석이 무엇입니까? 내가 말씀 앞에서 어떤 태도로 말씀을 받으려고 하는가에 있습니다. 내가 마치 발람과 같이 내가 원하는 말씀을 듣고자한다면 나는 돌밭에 떨어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무엘 처럼 말씀 앞에 있으면 천국이 임한 사람입니다. “주여 말씀 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3:10) 고넬료도 이렇게 말씀 앞에 섰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10:33) 이게 깨닫는 마음 착하고 좋은 마음입니다. 이 어린아이와 같은 자세로 말씀 앞에 서면 자기가 죽습니다. 자기라는 기준, 성향, 감정이 죽습니다. 여기에 성신이 임하십니다.(행10:44) 성령께서 마음을 기경하며 다 받아드리고, 다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과 천국을 받고 아는 기쁨이 물밀듯이 내 맘에 기쁨이 몰려올 것입니다. 없고 없어도 기쁘고, 환난과 박해도 기뻐하고, 기쁨으로 이기고 뚫고 나가는 이 천국의 양태가 나타나고 이 천국의 나타남을 누릴 줄로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