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강론

맥추절은 새 소제로

아브라함-la 2016. 7. 17. 21:03

016,7,17,맥추절 주일강론 

본문 : 레23:15-17 

말씀 : 라인권목사 


  오늘의 본문 23장은 삼대절기를 어떻게 지킬 지를 명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절기의 규례말미에 반드시 강조되는 말씀이 이 절기를 영원히 지키라는 명령입니다. 이 명령이 절기마다 반복되고 있습니다.(14,21,31,41) 이 말씀은 어떤 일이 있든 어떤 상황에서라도 반드시 절기를 지키라는 말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며, 이스라엘이 백성들이 해마다 거르지 않고 맥추절을 지킨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온 나라가 평안하고 풍년일 때야 즐거움으로 지킬 수 있겠지만, 나라가 뒤숭숭하고 흉년과 기근일 때는 절기를 지키면서도 즐겁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이스라엘이 절기를 지키지 못한 시절이 있게 된 원인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우리라고 다르겠습니까? 우리게도 축복이 넘치는 시절이 있는가 하면 참 어렵고 곤고한 시절도 있습니다. 축복이 차고 넘치는 때에 감사하는 것이 어렵지 않지만 어렵고 곤궁한 시절에는 감사하는 것이 짐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어려울수록 감사라는 덕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감사는 은혜의 길입니다. 어려워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이를 하나님이 영화롭게 하십니다. 은혜를 감사하는 겸허하고 겸손한 마음에 은혜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어려울수록 감사하는 마음이 우리의 고단한 마음에 쉼을 주고 어려움을 헤쳐 나가게 하는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참 어려운 시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제가 맥추절 지키는 것이 고민이 되기는 처음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어려운 시절에 지키는 맥추절에 하나님께서 우리게 구하시고 원하시는 감사제물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하며 맥추절에 대한 말씀들을 재검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맥추절에 대한 말씀을 검토하다가 오늘의 본문의 “오십 일을 계수하여 여호와께 새 소제를 드리되”라는 말씀 끌려서 이 말씀을 다시 묵상하다가 이 “새 소제”가 하나님께서 저와 우리성도들에게 받고 싶으신 맥추절 제물이요, 이것이 우리가 새 은혜를 입는 길이라는 것을 확신하여 이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새 소제”는 어떤 제물입니까? 

 

햇곡식, 첫 이삭의 떡

소제는 곡물로 다른 제사에 더해서 감사제입니다. 그런데 맥추절 제사는 이 소제를 먼저 드리고 이 소제와 함께 다른 제사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맥추절은 추수를 감사하는 절기이기 때문에 감사제인 소제가 기본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드릴 소제는 감사입니다. 감사가 황소보다 나은 제물인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맥추절 제사는 소제가 기본인데 하나님은 그냥 소제를 드리라고 하시지 않고 “새 소제”를 드리라 하셨습니다. 새 소제는 무엇입니까? 새 소제는 그해 추수한 햇곡식으로 만든 제물이기 때문에 “새 소제”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20절에 “첫 이삭의 떡”이라고 했습니다.


왜 맥추절에는 햇곡식으로 만든 떡을 감사의 소제로 드리게 하셨습니까? 맥추절은 그해에 주신 새 곡식을 추수하게 하신 은혜를 감사하는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그해 추수를 감사하는 제사에 묵은 곡식으로 만든 떡을 제물로 감사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해 새로 주신 새 곡식으로 감사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이 우리의 새 소제이겠습니까? 그해 거둔 새 곡식, 햇곡식으로 만들어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새 소제”라고 했다면 우리가 드릴 새 소제는 금년, 지금 현재에 새롭게 주신 새 은혜와 축복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왜 현재 주시는 새 은혜를 감사하는 것이 중요합니까? 삶은 현재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은혜로 현재를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날마다 새롭게 주시는 새 은혜로 살아갑니다. 지금 현재 우리의 삶은 크든 작든 은혜 안에 있습니다. 어려운 때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특별한 섭리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지금 현재의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않고 깨달아서 감사하는 것이 새 소제인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감사는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이여야 합니다. 감사가 과거형이고 현재형이 아닌 삶은 정상적이 아니라 퇴행입니다. 감사가 현재형인 삶은 정상적이고 발전적인 삶인 줄로 믿습니다. 지금 현재의 은혜를 감사할 때 과거의 은혜도 감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미래를 소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년 맥추절이 이 새 소제, 금년에 새로 주신 햇곡식과 같은 새 은혜, 새 축복으로 새 소제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이 새 소제를 드리시기 위하여 금년 내게 주신 새 은혜와 축복이 무엇인지를 깊이 묵상하여 새 은혜의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주시는 새 은혜를 감사하는 우리의 하루하루에 새 은혜를 베푸셔서 긍정적이며 정상적이고 발전적인 삶이 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새 소제는 이렇게 축복으로 받은 햇곡식으로 떡을 만들어 드리는 것입니다.


곡식 그대로가 아니라 곡식으로 떡을 만들어서

맥추절의 시작인 초실절에는 익은 곡식한 단을 요제로 드립니다. 그러나 오십일 후 칠칠절에는 초실절과 같이 곡식 그대로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 거둔 곡식으로 떡 두 개를 만들어 드리게 하셨습니다. 이 떡을 만드는 곡식은 그해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축복하신 결과물입니다. 추수한 곡식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의 현재적인 증표라는 것입니다. 이 축복으로 감사 제물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거둔 곡식으로 감사의 소제물을 만들므로 마음에 감사가 이루어지게 하여 이 마음의 감사를 만든 떡으로 바치게 하신 것입니다. 오십일 간 추수한 곡식을 먹지 않으며 은혜를 헤아리다가 먼저 하나님께 감사의 새 소재를 드리고 먹게 하신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감사란 받은 축복으로 조제한 제품입니다. 축복이 차고 넘쳐도 은혜와 축복을 알지 못하고 감사를 만들지 않으면 감사는 없습니다. 이것이 차고 넘치는 어리석은 부자가 감사치 못한 이유입니다. 감사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새 소제는 주신 축복을 헤아려서 주신 축복으로 감사의 떡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 감사의 새 소제를 어떻게 만듭니까? 축복으로 받은 곡식을 빻아서 가루로 만들고, 반죽하여 발효시켜 뭉치고 회덕에 구워서 만듭니다. 하나만 설명하면 구속의 은혜로 자기를 깨서 고운 가루로 만드는 것입니다. 고운가루는 상한 심령입니다. 구속의 은혜로 은혜를 알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감사함으로 섬기기를 결심하는 것입니다. 이, 상한 심령이 향기로운 제물입니다. 상한 심령에 성령이 임하십니다. 주신 은혜를 헤아려 감사를 발효시키고, 뭉쳐서 성령의 화덕에 구워서 만드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주정뱅이 남편을 둔 괴로운 아내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목사님이 범사에 감사하라는 강론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시니 감사를 해야 하겠는데 남편을 생각하면 감사가 아니라 복장이 터집니다. 그날 밤도 변함없이 남편이 곤드레가 되어 들어와 골아 떨어졌습니다. “내 팔자야!” 한숨이 발등을 깨다가 그래도 목사님이 감사하라고 하셨으니 감사를 해보자! 하고, 취해 잠든 남편을 보며 감사할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렇게 취하고도 집을 찾아오는 것이 신통했습니다. 그래서 술 취해도 집에 들어오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사하고 생각해보니 이렇게 취하고 난동을 부리지 않고 곱게 자주니 이것도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감사하다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리며 남편을 위하여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자는 남편의 얼굴에 눈물이 떨어집니다. 이 눈물에 자던 남편이 깨서보니 아내가 자기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다며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까? 남편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다음 주일부터 예수 믿어 줄께!!!!”

 

이것이 감사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게 감사의 길입니다. 이게 자기를 만드는 성화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새 축복으로 감사를 만드시기를 축복합니다. 만들어진 감사는 새 것인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만든 떡 두덩이면 하나님은 족하다고 하십니다. 이 새 소제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 새 은혜로 내일 살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거룩한 떡이 아닌 일용할 양식

그리고 이 새 소제는 거룩한 떡이 아니라 일반식사용 떡이라는 것입니다. 17절을 다시 봅시다.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어서 구운 것이요” 소제로 드리는 떡은 누룩 없는 떡입니다. 그래서 무교병이라고 합니다. 이 무교병은 하나님께 드리는 목적으로 구별된 것이기 때문에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한 떡”이라고 합니다.(레2:10) 그런데 맥추절에 드리는 소제는 이 거룩한 목적의 무교병이 아닌 일상생활을 위한 일용할 양식입니다. 이렇게 일용할 양식, 생활용을 드리는 것은 맥추절은 현재적인 삶을 위한 하나님의 축복을 감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룩한 용도, 예배용이 아닌 일상생활용인 일용할 양식으로 감사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드릴 세 소제입니다. 생활용을 드리는 것이 진짜 감사이고 실제적인 감사입니다. 신령한 은혜를 신령한 것으로 감사하는 것과 생활용을 드려서 감사하는 것 어떤 것이 진짜이겠습니까? 사렙다 과부와 두 렙돈을 드린 과부를 생각해봅시다. 사렙다 과부에게 요구한 것이 영적인 것-많은 과부 중에 선택한 것을 찬양하고 감사하라고 하는 것과, 일용한 양식을 드리라는 것 어떤 것이 어렵습니까? 무엇이 진짜입니까? 이것이 두 렙돈을 드린 과부가 열납 받은 이유이지요.


그러므로 새 소제는 생활용을 드리는 것입니다. 생활용을 드리는 것은 일상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만나라는 일상을 감사하지 못해서 망했습니다. 삶은 일상이지 사건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사건이 아닌 일상으로 이루어집니다. 진짜 소중한 것은 일상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상을 감사의 새 소제로 드립시다. 무엇보다도 일상생활용, 일용할 양식을 감사 제물로 드리면 그것이 예배용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생활용을 드리는 것이 산제사입니다. 이 산 제사가 진짜 하나님이 맛있어 하시는 제물인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감사의 원리이고 성화의 원리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 방법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풍성한 삶 이르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생활용으로 감사하는 새 소제로 하나님께로 나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맥추절은 그해 주신 새 은혜를 기리고 감사하기 위하여 새 곡식으로 만든 일상생활을 위한 일용할 양식으로 감사의 떡을 만들어드리는 감사 절기였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이 절기를 신실하게 지키면 삼년 먹을 것을 주시고, 감히 넘볼 자가 없게 하신 다고 하셨습니다. 새 은혜를 감사할 때 날마다 새 은혜를 베푸셔서 당신의 나라와 백성이 흥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또한 새 은혜를 감사하는 이에게 주시는 새 은혜요 새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지키는 맥추절에 묵은 것이 아니라 금년에 주신 새 은혜로 감사합시다. 금년에 주신 축복으로 만든 감사를 새 소제로 드립시다. 일상생활용으로 감사하는 새 소제를 드립시다. 그러면 생활용이 예배용이 되는 진짜 새 복을 주십니다. 감사가 일상이 되는 천국생활이 되는 새 복을 주십니다. 이것이 매일의 일상생활이 새 은혜와 축복의 날이 되게 하시는 새 은혜가 임하게 합니다. 이 감사가 당신을 닮는 성화를 이루는 새 사람의 영원한 삶을 이루는 새 은혜를 누리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이 떡 두 덩이면 하나님은 족하십니다. 지금 당신은 이 새 소제 두 덩이가 있으십니까?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