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온 사역자(?)
요즘 저는 기간을 정하고 기도한다며 교회에서 자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 새벽 교회에서 내려와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다시 본당에 올라가 에어컨을 켜고 자리에 앉자마자 문이 열리며 수염이 가득한 남자 한 분이 들어 왔습니다. 등에는 배낭을 무겁게 메고 양손에 보따리를 든 이 남자 분은 들어오더니 가까운 의자에 앉는 것이 아니라 굳이 유아실 쪽으로 가서 바닥에 앉는 거였습니다.
첫 인상은 흔히 보는 노숙인 이었지만 곁으로 가보니 분명 일반 노숙인들 과는 행색이나 분위기가 다른 노숙인(?)으로 보였습니다. 예배를 드리려 왔다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다시 가서 의자에 앉을 것을 권했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새벽기도회 시간에도 말씀을 듣기보다는 엎드려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드디어 새벽기도를 마치고 내려와 엠프를 끄자 이분이 기다렸다는 듯이 저를 따라 왔습니다. 계단을 내려오며 보니 신발을 신지 않아서 신발이 없으시냐고 묻자 밖에 벗어 두었다며 화장실에 들렀다가 간다며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자기는 사역을 하기 위하여 왔다며 이교회는 새벽에 남자 성도는 없고 여자성도들 뿐이라며 다른 교회에는 말씀을 주고 가지만 이교회는 그냥 자기가 쓴 것만을 주고 간다며 정자로 빽빽하게 쓴 노트 한 장을 찢어 주고는 갔습니다. 거기에는 교회들이 여자 성도들을 부추겨 남편의 권위를 부정하는 사탄의 일을 하고 있는데 작은 교회 일수록 그런 현상이 심하다는 비판과 정죄의 글로 가득했습니다.
결국 그는 불시에(?) 교회들을 방문해서 그 교회를 분별해서 그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를 진단해 지적해 주는 선지자로 자기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가 쓴 글의 내용이나 용어로 보아 신학의 물을 조금은 먹었거나 아니면 어떤 형식으로든 목회에 조금은 입문한 적이 있는 이 같았습니다. 저는 현관에 선채로 그 노트 조각을 읽으며 제멋에 산다지만 제멋으로 하는 신앙생활도 가지가지라는 걸 실감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사역자로 알고 있지만 누가 그를 사역자로 세웠나요? 하나님이시라고 하겠지만 교회의 부름이 없다면 그는 부름 받은 사역자가 아닙니다. 그는 자기를 교회를 판단하는 자로 알고 있지만 하나님은 남의 종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고 하실 겁니다.(롬14:4) 비판의 영에 붙잡힌 영은 자기를 하나님과 모세의 자리에 앉게 하고 자기를 의롭게 여기는 영임을 그는 알까요?
그날 새벽기도회에 남자가 없다는 것이 왜 그에게는 여자들을 부추겨 남편의 권위를 부정하게 하는 사탄의 일을 하는 교회라는 판단의 근거가 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선지자와 예수님의 사역을 받아드리지 못하는 이스라엘과 같이 자기 사역을 받지 못하는 교회도 있다며 의로운 선지자 의식으로 가득해 있었습니다.
이게 바로 제멋에 겨운 신앙의 특징이 아니겠습니까? 자기 의에 빠져 영적 나르시즘에 흠뻑 빠져 있는 것이 주관적 신앙의 특징입니다. 인생은 제 멋에 산다지만 신앙은 제멋이 아니라 철저하게 객관적이라는 것과 그 위험성을 마7:21-27은 생생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주관주의 신앙의 특징은 자기를 가르치고 판단하는 자리에 있게 하고 영적 비 실재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훌륭한 신앙인으로 착각하여 영원을 잃게 하는 것입니다. 불행 하게도 모든 성도들에게는 주관으로 기우는 경향이 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신앙이 제멋에 겨운 신앙에 기울지 않도록 부단히 자기를 복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성경임을 잊지 맙시다. 그날 새벽 제멋에 겨운 신앙의 극치를 보는 것 같아 왜 그런지 씁쓸했지만, 그래도 저는 새벽 기도하는 남자 성도가 없다는 지적을 제 목회에 대한 주님의 말씀으로 겸허히 아프게 받아드립니다. 주님은 말 못하는 나귀로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