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la 2017. 9. 25. 15:47

017,9,17주일강론    

본문 : 고전13:8 

말씀 : 라인권목사

        이북에서 피난 나와 남대문 시장 좌판에서 장사하여 두 아들을 다 어엿한 박사로 길러 출세시킨 홀어머니가 계셨습니다. 어머니는 큰 아들과 작은 아들 집으로 오가며 사시고 있었는데, 작은 집에서 어느 날 보니 작은 아들부부가 자기 때문에 부부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어머니가 큰 아들네로 돌아오자 큰 며느리가 시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큰 자식만 자식인가요?”라고 했습니다. “알았다!” 이 말을 하고 집을 나간 이 늙은 홀어미는 양지바른 어느 산기슭에서 스스로 세상을 등졌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목사님의 책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배신당할 수도 있고, 사랑하나 오히려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사랑은 손해라는 인식을 형성하게 했습니다.

 

사랑을 메아리 없는 희생으로 여기는 경향

제가 이 이야기로 오늘의 말씀의 문을 여는 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해온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이런 위기를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아예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내가 이렇게 하면 과연 이 치열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참고, 친절하고 겸손 하며, 예절 이런 사랑들은 나만 손해 보고, 희생이라는 의구심과 사랑에 대하여 인색한 마음이 들게 합니다. 지금까지 제 사랑장을 강해를 들으시며 ‘결국 희생하라는 말씀인데, 에이 목사님, 정말 그렇게 살아도 되겠습니까? 목사님 책임 질수 있어요?’ 이렇게 질문하고 싶은 충동이 일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도 분명, 이런 문제의식을 느낀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사도 바울은 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고 존경받는 은사를 행해도 사랑이 없으면 다 "우덴" “개뿔”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과 환경에서 어떻게 역사하여 어떤 성품으로 나타나는 지,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믿고 바라며 견뎌내게 한다.”고 못을 박으셨습니다. 여기까지 사랑을 말씀한 바울은 이 말씀을 듣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사도님 질문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면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결국은 사랑하는 사람만 손해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고, 질문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수 있다는 걸 바울 사도가 의식한 것입니다. 사실 사랑은 이 세상의 정신과 가치관으로서는 어리석고 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대목에서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고 하신 겁니다. 이 말씀을 “사랑은 영원하다”라고 해석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영원하다”라는 것은 좀 막연하고 이 말씀의 의도를 충분히 들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피프테이”라는 말은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막13:25) 이 떨어진다는 말은 꽃으로부터 온 은유입니다.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 하리라”(약1:11)에 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사랑은 추락한 별같이 되지 않고, 떨어진 꽃처럼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문자적으로는 사랑은 멸하지 않는다. 그치지 않는다, 그 항상 자리를 고수한다는 뜻입니다. 즉 사랑은 실패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피프테이”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의 극장에서 무대 위의 배우를 끌어내릴 때에 쓰는 말입니다. 한때는 인기절정이던 한물간 퇴물같이 된 배우가 무대에 오르거나, 배우의 연기가 형편없으면 관중들이 내려오라고 야유를 보낼 때 “티프테이”라고 외친 겁니다. 따라서 이“티프테이”라는 말은 사랑은 역사의 무대에서 퇴물 배우같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랑은 역사의 무대에서 끌려 내려오고, 퇴장 당하지 않는 다는 겁니다. 따라서 “티프테이”라는 말은 사랑은 결코,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역성경은 “love never fails"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은 손해다." 즉 ”실패“ 라는 인식에 대하여 “사랑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 사랑은 영원한 성공이다! 이렇게 단정한 겁니다. 그리고 사도는 “사랑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이론을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이렇게 사랑이 실패가 없다는 것을 논증하신 겁니다. 그래서 오늘은 논증을 살피기 전에 “사랑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라는 바울의 단정적인 명제를 공부하기로 합니다. 왜 사랑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습니까? 왜 사랑은 성공할 수밖에 없으며 참되고 영원한 성공입니까?

 

먼저 사랑은 사랑한 그 자체로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구원을 받는 것을 목적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 자체가 동기요, 목적입니다. 이 말은 사랑은 계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해주면 너도 내게 이렇게 해주겠지?’ 이런 계산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랑하는 이유 때문에 한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너도 내게 이렇게 해주겠지! 이것은 사랑이 아닌 상업입니다. 사랑은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이고, 부모를 공경하는 이유요, 가족을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무디는 "믿음으로 했는데 실패했다는 말은 육신적 동기에서 했다는 말이다. 믿음으로 한 자체가 성공이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사랑한 자체가 성공이요, 사랑하지 않은 것이 실패일 뿐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사랑한 자체로 이미 충분한 보상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위하여 릴케의 “소녀의 기도”를 한번 음미해 보겠습니다. “그 언젠가 그대가 나를 보았을 때엔/ 나는 너무도 어렸습니다/ 그래서 보리수 옆가지처럼 그저 잠잠히/ 그대에게 꽃피어 들어갔지요/ 너무도 어리어 나에겐 이름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대가 나에게 말하기까지/ 나는 그리움에 살았었지요/ 온갖 이름을 붙이기에는 내가 너무나 큰 것이라고,/ 이에 나는 느낍니다/ 내가 전설과 오월과 그리고 바다와 하나인 것을,/ 그리고 포도주 향기처럼/ 그대 영혼 속에선 내가 풍성한 것을/ 여러분! 여기 사랑의 에테르가 있습니다. 사랑의 벅참이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행복입니다. 야곱의 생애에서 가장 떨리게 행복한 시절은 라헬과 혼인하기 위하여 칠년 머슴살이 할 때었습니다. 칠년을 수일 같이 여긴 이 행복을 무엇과 바꾸겠습니까? 이것이 자식 기르는 행복이요. 봉사의 행복입니다. 이것이 제 목회의 행복입니다. 목회에 고난도 있지만 이 사랑의 행복-감동, 보람, 자부심-으로 저는 이미 충분히 보상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사랑 자체를 목적하기 때문에 사랑한 자체로 성공입니다. 사랑하는 자체가 행복이요, 보람이요 만족인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절대 실패가 없습니다. 메아리 없어도, 사랑을 원수로 받아도 실패가 아닌 성공입니다. 그러므로 마음껏, 양껏 사랑합시다. 사랑은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실패일 뿐입니다.

 

둘째 사랑은 사랑한 만큼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이 이미 내 성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루어진 성품이 하나님을 본받은 것이요, 아들의 형상을 이룬 것입니다. 이걸 구원이라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같이 된 것입니다. 이 구원은 자동적이 아니라 예수님이 사신 것같이 살아야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운동하면 운동 량 만큼 근육이 붙는 것 같이 사랑한 것, 사랑으로 한 것은 이미 내게 내 인격, 내 성품이 되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 되고 만들어졌고, 만들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나 스스로가 역겨울 때가 있는 이 누추한 내가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 간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얼마나 소망적입니까? 이런 성공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사랑은 메아리가 없어도 실패한 것이 아니라 성공한 것입니다. 오히려 사랑하지 않은 것이 실패요, 사랑으로 하지 못한 것이 실패일 뿐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고 존경 받는 은사를 행하고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전부다 "개뿔“입니다. 내 성품, 내 성화, 내 구원이 안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이 실패할 것을 염려할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못해서, 사랑으로 하지 못해 이 큰 구원을 흘러 떠내려 보낼까를 걱정하고 두려워합시다. 사랑은 이미 내 성품, 내 구원이 되었으니 영원한 성공인줄로 믿습니다.

 

셋째, 사랑은 사랑한 순간 영원한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말씀이 벧전1:22-25입니다. 형제를 사랑한 진리를 행한 말씀 순종은 거듭나게 한 말씀과 함께 꽃처럼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 영원히 세세토록 있는 말씀이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이 영원성은 천국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세상에서도 입니다. 인류 역사가 진행 되어갈수록 인류에게 빛이 되고 더욱 빛나는 사람은 오직 사랑의 사람뿐입니다. 지금까지 세상에서는 지식이나, 돈이나 권세 높은 이들이 많았지만, 세상은 이들은 존경은 해도 숭앙하거나 신앙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학자도, 자산가도, 권력자도, 정복자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단지 인류를 사랑해서 자기를 십자가에 제물로 자신을 바쳤을 뿐입니다. 그러나 온 세상이 그를 따르고 신앙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한 때는 인기 절정이었으나 무대 위에서 끌려 내려오는 퇴물배우와 같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은 오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과 관련해서입니다. 벧전1:22-25을 다시 봅시다.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한 것은 나를 거듭나게 한 말씀처럼, 그 말씀과 함께 세세토록 있습니다. 순종한 그 말씀은 천국에서 세세에 살아 있습니다. 아들의 형상을 이룬 이 성화구원의 양이 천국에서 내가 받고 누릴 영광의 양입니다. 이걸 상급이라고 합니다. 신성종목사는 “내가 본 천국과 지옥”에서 천국은 보좌를 중심으로 열두 줄인데 이 줄은 세상에서 무엇-순교, 전도, 수진성도, 사랑실천, 어려운 목회자와 성도위로, 주일학교와 찬양대 봉사, 성전건축 등등-을 했느냐에 따라서 결정 되는 것 같이 묘사했습니다, 세상에서 무엇을 했느냐 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한 것은 사랑이 없다면 “개뿔”입니다. 

 

따라서 저는 사랑의 순종과 봉사로 주님을 닮은 양이 천국의 상급을 결정한다고 믿습니다. 이 구원이 된 것만 사랑으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하나님과 이웃만 있는 사랑의 나라이기 때문에 천국에서 통하고. 천국에서 추앙의 대상이 되고, 영광이 있고 영예로운 것은 오직 사랑의 성품입니다. 천국은 사랑을 경쟁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과 반대로 낮아지기를 경쟁하고, 더 많이 종 되기를 경쟁하라는 것입니다. 그 만큼 천국에서 큰 자가 되고, 영광 받고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죽음을 당해도 실패가 아니라 영원한 성공입니다. 거기서 궁창의 별과 같이 되고, 주와 함께 다스리는 권세를 받을 줄로 믿습니다.

 

사랑은 무한의 배당이 보장된 영원에의 투자

따라서 사랑은 실패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무한의 배당이 보장된 투자입니다. 사랑장의 사랑의 성품들은 다 지금 여기서 세상을 사는 동안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의 생활입니다. 일상적인 것입니다. 육신으로 하는 것이며, 임시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 일상적인 것, 육신적인 것, 심지어 물질까지도 영원에 잇대어 영원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어 강한 것으로, 육의 몸으로 심어 신령한 몸으로 산다고 하신 겁니다.(고전15:42-44) 이렇게 사랑은 현재를 영원과 연결하고 영원을 호흡하고 영원을 사는 겁니다. 그 세계는 무궁세계이기 때문에 상상할 수 없는 무한한 배당이 보장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마음 놓고 투자할 대상은 사랑뿐입니다. 이만한 사업은 없습니다. 사랑만이 인생을 건 대 투자입니다. 이 투자는 호리도 틀림없습니다.(눅12:29) 냉수 한 그릇도 상을 잃지 않습니다. 사랑은 밑지는 장사가 아니라 남는 장사입니다. 그러므로 실패를 두려워말고 마음껏 사랑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은혜로 가족여러분! 우리가 이 땅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살다보면 피곤할 때가 있습니다. 나만 손해 보는 것 같은 때도 있습니다. 배신이 이런 시험이 됩니다. 참고 손해 볼 때 이런 시험이 옵니다.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형통하고 번영을 누릴 때 사랑을 포기하고 싶은 시험이 옵니다. 사탄은 이런 것으로 사랑을 시험하려고 “봐라! 그러다가 절단난다!”고 할 것입니다.

 

이때에 우리는 이렇게 외칩시다. “사탄아 물러가라. 사랑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사랑은 절대로 실패가 없다고 바울과 같이 단언합시다. 사랑이 실패할 것이라는 시험이 올 때에는 사랑한 행복한 추억을 합시다. 그때의 사랑의 충만함, 기쁨과 행복, 보람을 누린 것을 돌아봅시다. 아직도 받을 사랑을 생각하지만 우리지만 그래도 사랑할 때 내게 이루어진 예수의 형상을 봅시다. 그리고 주님과 같이 될 날을 내다봅시다. 내가 사랑으로 그 아들의 형상을 이룬 만큼 천국에서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이 세계를 바라봅시다.

 

 

사랑의 행복, 보람, 풍성한 삶, 이런 것은 이 세상에서 받는 이자입니다. 땅에서 천국을 맛보는 맛보기입니다. 투자한 본전과 배당금이 천국에 영원으로, 무한으로 남아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손해요 실패라는 시험이 올 때에 더욱 더 열심히 사랑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성공한 인새이요, 참 행복자요, 영원한 성공자인 줄로 믿습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합니다. 사랑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