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la 2018. 6. 26. 18:56

018,6,24,  

본문 : 창15:1-21 

말씀 : 라인권목사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삶에 따르는 고통 외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의 삶의 고통과 고난이 부과됩니다. 이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믿음의 삶에 따는 시험과 걱정, 환난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어야만 비로소이 세상에서 순례의 삶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게 신앙에서 위로의 절대적 필요성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지난 시간의 말씀을 해석해드리고. 다루지 못한 것을 공부하기로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두려운 날에 어떻게 위로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습니까?


함께 계셔주시는 신비적인 위로

두려운 날에 거룩하신 하나님이 친히 함께 계셔 주시는 은혜로 위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아브람에 환상 중에 임하셔서 해지도록 아브람과 함께 있어 주셨습니다. 제가 어려움 당할 때 저를 도와 준 친구가 있습니다. 제가 이분이 제일 고마운 것은 그 먼데서 꼭 두 새벽에 제가 필요한 곳이 와 주신 겁니다. 저는 이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비상한 날에는 하나님을 뵙고 싶고 특별히 말씀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우리의 정서적인 필요를 이해하시고 당신이 친히 함께 있어주시는 이 황홀한 시간을 만들어 주십니다. 이렇게 두려운 날은 나의 환난 날에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위로의 시간입니다.

 

이런 특별한 하나님 체험을 교리적으로만 보고 마치 우리와 상관없는 것 같이 취급도 안하고, 신비주의니 하고 비판적으로만 보는 것 경향은 괴테의 말과 같이 하나님도 인생도 모르는 도그마에 함몰된 메마른 교리주의입니다. 괴테의 시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적이 없는 자, 슬픈 밤을 한 번이라도 침상에서 울며 지새운 적이 없는 자, 그는 당신을 알지 못하오니,>여기서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본 적이 없는 자와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교리에 매어서 우리를 던져진 존재로 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저는 우리 인생의 비상한 날에는 우리를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비상한 날에는 신비한 비상한 은혜로 위로하신 다고 믿습니다. 여기서 만난 하나님이 야곱과 같이 평생의 나의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 이 위로가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인생이 뿌리째 흔들리는 두려운 날에 눈물의 기도로 밤을 새워본 적이 없는 이와 신앙을 논하지 말라!”고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두려운 날은 하나님이 친히 나와 함께 시간을 같이 해주시는 날입니다. 걱정과 두려움이 쌓이는 날은 하나님은 특별히 만나는 날입니다. 저는 이게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두려운 날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이 황홀함을 누리게 하는 기회로 아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두려운 날에 기도로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하나님의 위로를 배우게 한다고 믿습니다

 

절실한 것을 주시는 위로

이렇게 두려운 날에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은 두려운 날에 절실하게 요구되는 절실한 것을 주시는 위로를 베푸십니다. 여러분 지난 주일에 아브람이 두려워하고 있을 때에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주신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드렸지요? 방패, 상급, 후사, 나라이지요, 이것은 어떤 것들입니까? 반격을 당해 멸문을 두려워하는 아브람에게 보호자가 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상실감이 있는 아브람에게 보상이 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자식이 없는 것이 아브람의 가장 아픈 대목입니다. 여기에 후사를 주십니다. 그리고 그 자손이 살 땅과 민족과 방대한 나라를 보이셨습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은 두려운 날에 정말 절실한 것을 주시므로 위로하신다는 겁니다.

 

우리 하나님은 떡이 필요한데 돌을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생선이 필요한데 뱀을 주시는 분이 아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날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십니다. 그래서 정말 절실하게 필요한 것,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고 해결이 되는 것을 주십니다. 이 위로로 두려운 날을 통과 하게하십니다. 저는 이 위로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믿음은 이 하나님의 위로 안에 있게 합니다. 믿음은 두려운 날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꼭 필요한 것, 좋은 것으로 풍성하게 주실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인생의 곤한 날에 내 절실한 필요가 채워지는 하늘 위로를 받을 줄로 믿습니다.

 

흔들리는 믿음을 북돋아 주시는 위로

이렇게 두려운 날! 절실한 것을 주신 하나님은 이제 그 두려움으로 흔들린 믿음이 회복되게 믿음을 북돋아주시는 위로를 베푸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 아브람의 믿음을 북돋아 주셨습니까? 네 몸에서 날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고 격려하신 하나님은 아브람을 실내에서 밖으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보라” “뭇 별을 세어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아브람의 마음속에 늙은 내 몸에서 후사를 주시겠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표적을 보여 주십시오.’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 안 해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늘과 하늘의 별을 보게 하여 당신의 전능하심을 입증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그냥 하늘에 기사와 이적을 베푸시는 게 간단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은 이적을 행하시지 않으시고, 복잡하게 하늘을 보게 하시고 별을 세게 하셨습니까? 여기에 깊은 하나님의 위로가 있는 겁니다.

 

창조는 이적 중의 이적

그것은 창조는 이적 중의 이적이기 때문입니다. 성육신과 부활을 제외하고 창조는 최고, 최대의 이적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이적에 서있고, 이 이적으로 살고 기동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자연 자체가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권능을 읽게 하는 책입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19:1) 따라서 하나님이 당신이 불가능이 없으시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하여 굳이 신비적인 이적이 필요 없습니다. 당신의 지으신 그 하늘을 보고, 별을 보게 하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이때 아브람이 하나님을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으로 확신하여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도리어 그 믿음이 견고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게 된 줄로 믿습니다.(4:17,20-21)이렇게 하나님은 자연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만나는 위로로 흔들린 믿음을 세워주셨습니다. 자연 자체가 우리를 크신 하나님 앞에서 서게 하고, 하나님의 크심과, 그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에 압도되어 엎드리게 하는 능력이 있고, 자연자체가 불신앙을 고치는 능력이 있고, 상처 받고, 흔들리는 마음과 믿음을 잡아주고 치유하는 능력이 되게 하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이 육신은 하늘의 일, 즉 영의 일을 이해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늘의 일을 자연, 즉 땅에 있는 것으로 말씀해 주시는 겁니다. 자연은 하늘의 일을 해석해 주는 하나님의 비유입니다. 이게 예수님이 천국을 땅의 일로 가르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전능하신과 아브람에 주신 ” “후사라는 이 특별계시를 하늘과 하늘의 별 떨기라는 땅의 일로 이해를 시켜서 확신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자기 몸을 통해서 오실 그리스도와 그를 믿음으로 되는 믿음의 후사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되게 하시는 이 특별계시를 하늘의 별을 보며 이해했습니다. 그 별에서 하나님의 전능함으로 보고, 하나님이 그 전능하심으로 이 약속을 이룰 것을 확신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하늘의 별을 보게 하여 흔들리는 아브람의 믿음을 북돋아 세우시고 살려주셨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하나님의 구원계시의 행복! 그것을 이루시는 자기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이 위로로 아브람은 주인 있는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해 나가는 삶의 무게를 감당한 줄로 믿습니다.

 

마음의 여유와 정서가 살아야

그런데 우리가 이 자연의 혜택, 이 위로를 받으려면 전제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마음의 여유요, 정서, 서정이요, 거듭난 정서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이 어떤 때인데 한가하게 별이나 셀 때입니까?’ 이러면 하늘을 볼 수가 없습니다. 두려워지면 사람은 마음, 정서가 메마르고, 마음에 여유가 없습니다. 마음에 여유가 없기 때문에 하늘을 보고, 별을 셀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주를 보니 하나님이 없더라!” 이러면 소용없습니다. 거듭난 정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듭난 정서가 이미 있지만 두려움은 마음의 여유를 잃게 하고, 정서를 메마르게 합니다. 정서가 메마르면 영이 메마르고 메마른 영으로는 자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브람을 이끌어 내시고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세게 하신 이유입니다. 억지로라도 하늘을 보게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하늘을 보는 마음의 여유를 찾게 하셨습니다. 메말라진 아브람의 정서를 살리신 것입니다. 아브람이 이 정서로 하늘의 별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흔들린 믿음이 회복된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자연은 인생의 두려운 날에 하나님을 전능자로 만나게 하는 하나님의 항구적인 위로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려운 날에 자연의 위로로 메른 우리 정서를 살려주십니다. 자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마음의 여유를 회복시켜 힘 있게 하나님을 의지하게 합니다.

 

여러분! 이런 면에서 인생의 좋은 날이 아니라 인생이 곤한 날이 더 자연을 가까이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점이 우리의 정서를 풍성하게 할 이유입니다. 저는 여기에 믿음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인생이 두려운 환난 날에도 하늘을 보고, 별을 세는 마음의 여유를 가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두려운 날에도 밤하늘의 별을 세는 여유와 서정을 가진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은 인생이 뿌리째 흔들리는 날에도 자연을 벗하며 시한 편을 쓰는 멋있는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찬송가에 이렇게 쓰여 진 찬송이 많습니다. 자연은 두려운 날 우리 믿음을 북돋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항구적인 위로입니다. 이 믿음으로 두려운 날에 자연을 벗 삼고, 여행도 하시기를 바랍니다. 거기서 전능하신 하나님께 압도되는 위로를 경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의롭게 여겨주시는 위로

이렇게 두려운 날에 흔들리는 믿음을 북돋아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두려워하는 날에 베풀어 주는 정말 감격적이며 위로 중에 위로가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위로가 두려워 떠는 약하고 보질 것 없는 우리를 의롭게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봅시다. “아브람이 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이신득의” “칭의라는 영광스러운 교리가 나왔습니다. 우리는 이 아브람이 받은 칭의를 구원론적인 칭의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칭의를 구원론적으로 본다면 오히려 모순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칭의는 믿음과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원론적 으로 본다면 아브람은 언제 칭의를 받아야 합니까? 아브람이 처음 믿은 순간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여러 해를 지난 지금 아브람을 의롭다 하십니까? 지금까지 아브람이 의롭다 함을 받을 만한 믿음이 안 되었다가 비로소 의롭다 함을 받을 만한 믿음에 이르렀기 때문에 의롭다고 하셨을까요? 이것도 아니지요. 칭의 받기에 충분한 믿음, 즉 구원 받기에 충분한 믿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구원 받기에 충분한 믿음이지요.(10:9-10)이게 의롭다하심을 받기에 충분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 시점에서 아브람을 의롭다 하실까요?

 

저는 이 칭의가 구원론적인 칭의 라고 하기보다, 두려워서 작아지고 약해진 아브람의 심령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은 마치 구원의 확신 같은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란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요일5:13)이 구원의 확신은 세상의 모든 것이 끊어지는 날에 굳건한 반석과 피할 바위가 되는 것입니다. 이 칭의는 이런 의미를 가진 칭의입니다. 한 번 생각해봅시다. 반격을 두려워하는 아브람이 어떤 심정이겠습니까? ‘내가 이 전쟁에 잘못 개입한 것이 아닐까? 내가 공연히 개입해서 위기를 자초했구나! ! 내가 잘못했어! 내가 틀렸어, 아이쿠 이 바보 멍청이!’ 이런 생각이 아브람을 괴롭혔을 것입니다. 이렇게 두려워하는 아브람을 보고 그와 가까운 사람들은 아브람에게 어떻게 말했을까요? ‘그것 보라구! 내가 무어라고 했어! 개입하지 말라고 했지! 섶을 지고 불에 들어가는 짓을 왜 해! 그건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야! 그리고 이제 아브람은 끝이다!’ 이랬을 겁니다.

 

아브람이 이런 처지요, 이런 심정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작아지고, 약해지고,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아브람을 하나님은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번에 문대통령이 진 우리 축구대표팀을 찾아가서 잘했다, 울지말라고 한 것과 같은 겁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아브람 네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네가 옳다! 너 잘했다! 잘못한 것 없다! 참 잘했다! 이렇게 아브람을 옳게 여겨 주신 겁니다. 나도 나를 틀렸다고 하고, 사람들이 잘못했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아브람을 옳게 여겨 주셨습니다. 이런 감격이 없습니다. 이게 아브람을 살린 줄로 믿습니다. 이게 다윗을 살렸습니다. 그래서 내 의의 하나님이라고 외친 것입니다.(4:1) 의롭다 하신이가 하나님이시니 누가 나를 정죄하리요. 이게 바울을 살렸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꼭 이 아브람입니다. 우리에게 고통이 있고, 인생이 흔들리는 날에는 내가 잘못한 것 같습니다. 내가 무슨 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자꾸 죄감과 죄책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더 괴롭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이런 나를 어떻게 대합니까? 어쩌다 이렇게 됐느냐! 힐난합니다. 잘못했다! 지혜롭지 못했다. 무모했다. 이 정도는 약과이고 욥의 친구들 같이 저렇게 된 이유가 있을 거야! 이렇게 정죄하고 정죄의 눈으로 보고, 가르치려고 듭니다. 충분이 비참한 날에 정말 비참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해주지 않습니까? 이런 때, 이런 날! 이런 나를 거룩하신 하나님이 옳다고 하십니다.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잘했다고 하십니다. 이때 고난의 상처가 사라집니다. 이때 무너진 자존감이 살아납니다. 이때 흔들린 신념이 살아납니다. 그래서 흔들리는 걸음을 바로하고, 사명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하나님은 이 위로를 베푸시는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믿음은 두려운 날에 나를 의롭다 하신 그 의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광주의 교회부지로 산 땅이 잘못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착한 장로님도 흔들립니다. 교회도 자라지 않습니다. 그러니 다 제 탓 같고, 제가 잘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새벽기도 나가서 혼자 기도하고 있는데 파리 한 마리가 제 머리에 자꾸 앉으려고 합니다. 몇 번을 쫒다가 제가 제게 역정이 났습니다. ‘내가 이십 중반에 헌신한 이래 지금까지 집한 칸 구한 적이 없는데 내가 지금 파리를 쫓아야 할 목사인가? 내가 파리 끄는 목사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섭니다. 참 죽을 맛이었습니다. 그래서 몸부림치며 기도하는 중에 이렇게 모자라는 나를 의롭다하시기 위하여 피 흘려주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은혜라는 시를 썼습니다. 중략-이 새벽 파리도 날 정하지 못하다 하는데 나를 정하다 하는 이 내 곁에 계서, 내 너를 아노라, 내 너를 정케 하노라, 네 너를 세웠노니, 네 힘을 의지하고 일어나 구원하라 시니, 틈타는 마귀 힘차가 쫓습니다. ”이 놈의 파리 여러분! 이날 새벽 제가 불사조와 같이 살아났습니다. 나를 옳다하시는 이 위로가 제 신념을 재 확신케 하고, 흔들리지 않고 제가 갈 길을 걷게 해 주었습니다. 여러분 이게 믿음입니다. 두려운 날! 죄책을 가진 나를 하나님은 옳다 하십니다. 하나님이 옳다고 하시는데 누가 정죄할 수 있습니까? 믿음은 이 칭의의 반석위에 나를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 이 의롭다 하심의 위로로 굳게 서서 두려운 날에도 내가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 내가 갈 길을 가는 것입니다.


 

피의 언약으로 위로하심

이렇게 믿음을 북돋아 주시 하나님은 한 걸음 더 나가서 피의 언약으로 위로하셨습니다.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시겠다는 하나님께 아브람은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라고 증거를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말로만 하실 것이 아니라 계약서를 써달라는 것입니다. 계약서에 서명하고 인감도장 찍어 달라는 겁니다. 이때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 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 오게 했습니다. 이것은 제사를 드리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제사가 아니라 계약을 체결하자는 것입니다.

 

여기에 제단을 쌓았다는 말이 없습니다. 10절에서 보는 것 같이 아브람이 이 짐승들의 중간을 쪼개서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해 놓았다고 했습니다. 제물을 벌려놓지 마주대하여 놓지 않습니다. 이것은 근동지역의 계약을 맺는 방법입니다. 근동지역에서는 계약을 할 때에 당사자들이 생축을 잡아 두 쪽을 내서 마주 대하여 벌려 놓습니다. 그러면 그 중간에 피벽과 핏 길이 형성되지요. 이 길을 언약의 당사자들이 통과하며 언약을 지킬 것을 맹세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 계약을 어기면 이 짐승같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피로써 언약을 하는 겁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두려워 흔들리는 아브람에게 이 언약의 맹세를 해 주시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이 언약식을 준비했습니다. 삼년 된 암소와 염소와 숫양을 잡아 중간을 쪼개서 마주대해서 양쪽으로 벌려놓았습니다. 여러분! 이 광경을 상상해보세요. 삼년 된 커다란 소 한 마리와 염소와 수양을 쪼개서 마주대해 벌려 놓았으니 피벽이고 핏 길이 아닙니까? 이렇게 해놓고 아브람이 기다리다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고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갑니다. 이 횃불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 쉐키나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쪼갠 고기 사이 피가 질퍽한 통로를 지나시면 맹세하십니다. 나는 여호와라! 나 여호와가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겠다, 나는 여호와라!” 이렇게 맹세를 외치시며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마치 사람이 하듯 맹세해 주셨습니다. 그것도 하나님만 이 언약을 맹세했습니다. 하나님 홀로 자기 피를 담보로 이 언약을 반드시 성취하신다는 맹세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여러분! 두려워서 계약서 달라는 아브람! 계약서에 서명하고 도장 찍어달라는 아브람에게 우리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을 걸고 언약하고 맹세하셨습니다. 자기 피, 하나님의 생명으로 언약을 이룰 것을 맹세해 주셨습니다. 이걸 지켜본 아브람이 어떤 심정이었겠습니까? 나 같은 것을 위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이 사람처럼 피로서 맹세해 주시다니! 황송했을 겁니다. 감격했습니다. 확신했습니다. 막 힘이 났을 겁니다. 이 위로로 임자 있는 가나안 땅에서 발붙일 만한 땅도 받지 못했지만 그 땅에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해 나가며 순례의 길을 흔들리지 않고 걷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아브람이 두려운 날, 이 믿음의 위로를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믿음이 된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이 피의 언약이 구속의 언약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 언약을 이루시려고 자기 아들을 십자가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그 피로 우리를 사시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피로 사신 자기 백성이 천국에 이르기까지 온전케 하시려고 아들을 주신 이가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십니다.(8:32)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는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의 모든 악에서 건지시고 천국에 들어가도록 지키신다는 하나님의 피의보증이십니다.(딤후4:17,18) 그리므로 믿음은 두려운 날에 이 예수 안으로 피하여 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두려운 날에 나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이 구원이 되실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곁에 서서 우리를 강건하게 하실 것입니다.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게 하시고, 어두운 날에 빛이 되시고, 두려운 날 임마누엘이 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눈을 씻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운 날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 하나님의 위로를 배우는 날입니다. 믿음으로 두려운 날에 그리스도안에 피하는 성도는 위로의 하나님을 만날 줄로 믿습니다. 거기서 배운 하나님의 위로로 고난당하는 능히 위로 하는 하나님의 위로자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께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치셨습니까? 지금 이 하나님의 위로이신 예수께로 오십시오, 믿음으로 예수의 손목을 잡고 하나님의 위로를 채득해 나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