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스 사람 욥의 축복
욥기의 첫 장면은 우스 사람 욥이 받은 축복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쳐지고 있습니다. 욥기의 연출자는 우선 욥의 신앙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욥의 이 신앙이 놀라운 것은 그가 아브라함의 계열, 즉 셈족이 아닌 우스 사람으로 세상의 그 누구도 그와 비견할 수 없는 신앙을 가졌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기적이요, 축복 중에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욥기의 연출자라면, 나는 욥의 소유 중에서 신앙에 먼저 스포트라이트를 비칠 수 있겠습니까?
욥기의 연출자가 신앙 다음에 조명하는 것은 욥의 가정의 다복함입니다. 욥의 자녀 십남매는 욥 부부의 금술과 화목과 단란함의 상징 같은 것입니다. 이를 가정적 축복이라고 하지요. 재물은 돈으로 살 수 있지만, 이 가정은 돈으로 살 수 있거나, 돈으로 계산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정, 즉 아내, 남편, 자녀가 있고, 화목이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 것이며,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고, 모든 것을 해 낼 수 있는 있는 겁니다.
이제 연출자는 욥의 물질적 부를 조명합니다. 연출자는 이 욥의 큰 부가 지탄이 아닌 존경을 받는 부라는 점을 또렷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물질적 축복이 기독교적이 아니라는 이들은 자신이 별수 없는 육신임을 망각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빈곤은 고귀한 인간성을 말살합니다. 구속은 인간을 인간다운 삶을 누리게 하는 겁니다. 한 인간으로써 기독자는 적어도 신앙과 인격의 존엄을 유지할 정도의 재물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욥기의 연출자가 마지막으로 조명하는 것은 욥의 경건입니다. 욥의 자녀들은 욥의 경건의 바로미터입니다. 욥은 자녀들을 어떻게 키웠습니까? “혹시”라는 말은 자녀들에 대한 의심이 아닌 믿음입니다. 죄를 지을까 조바심할 필요가 없는 자녀로 키웠다는 겁니다. 그래도 잔치는 시험들 여지가 많기 때문에 혹시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날 것을 대비하여 잔치 다음 날 아침에 자식들 명수대로 번제를 드릴 정도였습니다. 저는 이 욥에 비하면 타조와 같은 아비입니다. 욥의 경건이 이 정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이렇게 영과 육이 균형이 잡힌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 하나님의 축복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천국을 나타내십니다. 이 우스 사람 욥의 축복은 시128편의 시인이 부러워 예찬한 축복 그 자체입니다. 우리도 시128편의 시인과 같이 이 복을 부러워 예찬하고, 이 부러움과 예찬의 대상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