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을 황무지로 만드심
욥기의 1막 4장은 욥에게 몰려오는 세 번째의 큰 고난의 파도로 시작됩니다. 욥의 부와 자녀를 거두면 욥이 하나님을 욕하리라는 시탄의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그러자 사탄은 욥이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는 것은 욥이 건강하기 때문이라며, 그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욥의 건강을 거두시라고 합니다. 결국 욥은 사람을 가장 고통스럽고, 비루하게 느끼게 하는 피부병에 걸려 재에 앉아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어야 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되자 위로와 격려가 되어야 할 아내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합니다. 죽는 것이 욥에게 가장 좋은 길이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욥은 그 어느 때 보다 아내가 필요할 때에 아내를 잃습니다. 그리고 욥은 친구를 잃습니다. 위로하기 위하여 원거리에서 찾아 온 세 친구들은 욥의 큰 고난이 욥에게 있는 숨은 큰 죄의 결과로 여기고 욥을 회개시키려는 쓸모없는 의원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친구들과의 대화마저 상실하게 됩니다.
이게 욥의 고난입니다. 재산, 자녀. 건강, 아내, 친구, 대화까지 상실했습니다. 욥은 전실로 전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인생을 황무지로 만들었다는 거지요. 왜 이렇게 하나님은 욥을 황무하게 만들었을까요? 인내를 배워 갑절의 축복을 받게 하는 것이라면 이 정도의 고난이 필요했을까요? 하나님께서 두 번이나 사탄의 청을 허용하신 것은 욥의 모든 것을 잃고라도 해결해야 하고, 얻어야 할 것이 있고, 그것이 없으면 전무요, 얻으면 전득인 것이 욥에게 결여 되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전실이며, 그리스도가 있으면 전득이기 때문입니다. 이 그리스도를 얻는 길은 오직 한 길밖에 없습니다. 그 길이 믿음인데 믿음은 먼저 자기가 전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자기 의에 빠져 있었습니다.(욥27:6) 즉 욥은 교만한 성자였습니다. 욥은 사탄의 두 번째 공격에도 이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교만은 헹스텐베르그의 말처럼 설 때리면 안 되고 가차 없이 예리하게 때려야 치료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욥을 황무지로 만드신 까닭입니다. 전무, 즉 살았으나 죽은 비존재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욥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자기가 황무지가 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자기 인생이 완전히 황무하여 자기가 전무가 될 때에야 비로소 십자가 앞으로 나오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자기를 황무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라는 자기가 철저하게 무가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는 전득이 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내가 황무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사람이 온 천하를 얻어도 제 생명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게 하나님께서 인생을 황무지로 만드시는 까닭입니다. 내 인생을 황무지로 만들어서 그리스도를 얻게 하셨다는 분명한 신앙고백과 간증이 있게 되기를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