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경 강 해/새벽 정신으로 읽는 욥기 강해

하나님의 법정에서의 애소함

아브라함-la 2018. 10. 5. 15:11

이제 욥은 하나님의 앞에서 이 세상에서 한 사람으로서의 인생이 당하는 슬픔을 진술합니다. 만약 이 욥의 진술이 법정에서의 진술이라면 재판장의 마음이 흔들리고 방청객이 함께 공감할 한 인생에 대한 진솔한 진술입니다.

 

욥은 먼저 태어나 짧은 생애를 걱정 속에서 살다가 꽃과 같이 시들어 그림자와 같이 자나가 버리는 이 덧없는 인생을 하나님께서 돋보기로 보듯 죄를 찾아내 재판해서 형벌을 가하시는 것이 너무 가혹한 처사라고 호소합니다. 행복하게 살기에도 시간이 부족한 덧없는 인생을 근심과 고통가운데 살게 하시다가 무덤으로 보내시는 것은 인생을 비참하고 허무하게 하시는 비정한 처사라는 거지요.(14:1-6)

 

그리고 욥은 한번 죽으면 다시 살지 못하는 인생의 절망을 비유를 들어서 진술합니다.(7-12) 나무도 베여져도 그루터기에서 새순이 돋는 소망이 있다면, 인생이야말로 죽음에도 소망이 있어야 하거늘 어찌 하나님은 한번 죽으면 다시 볼 수 없게 하시냐는 겁니다. 그럼에도 욥은 이 모든 고난을 참으며 이 죽음에서 풀려나고 만물을 새롭게 하시기를 기다린다고 고백합니다.(14,15)

 

이 믿음이 욥으로 하여금 주께서 자기를 부르시고 자기가 대답할 수 있도록 하나님과 화목하기를 열망합니다. 그러나 이런 욥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기 위하여 자기 허물과 죄악을 봉하시고 싸매시기 때문에 그 심판으로 산도 무너지고, 홍수가 땅의 티끌을 쓸어가듯 하시므로 인생은 쉬이 죽고 죽은 후의 일은 알 수 없다며 쓸쓸하게 진술을 마칩니다. 즉 욥은 부활을 바리기는 하지만 아직 그 믿음을 뒷받침 할 증거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이 욥의 진술이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지식과 마음이 일치하지 않는 모순이 내재하고 있습니다. 욥의 이 진술에서 인생은 완전할 수 없는 걸 전재로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의를 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알기는 하지만 믿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욥의 고난과 친구들의 공박이 욥을 더욱 자기를 고집하는 주관에 빠지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믿음은 이 주관을 버린 착하고 좋은 마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관은 신앙을 돌같이 굳게 하는 독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렇게 욥이 지식과 마음이 일치하지 않는 모순을 보이고 있음에도 욥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감동적입니다. 그는 확신의 근거는 없지만 하나님께 부활의 소망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욥은 하나님과 화목하기를 열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정에서 하나님의 자비에 호소하여 애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만 해답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정에 온 몸으로 육박해 들어가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게 욥의 신앙함이요, 여기에 욥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지요. 다만 부활의 근거를 몰라서 욥이 비참과 슬픔의 인생으로 남게 되었다는 점이 우리 가슴을 저미게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약성도의 복됨을 재발견합니다. 만약 우리가 욥의 시대에 있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부활의 영광을 알지 못했다면 우리도 “다만 그의 살이 아프고 그의 영혼이 애곡할 뿐이니다"이렇게 회한에 찬 인생의 막을 쓸쓸하게  내릴 수밖에 없는 허망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사망권세를 발아래 밟게 하신 은혜를 찬송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활의 권능으로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며 죽을 것을 죽지 않을 것을 살려 구원해가야 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