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강론

어떻게 하나님을 찬송할까?

아브라함-la 2020. 2. 9. 17:09

020,2,9 주일강론  

본문 : 사43:20-21 

말씀 : 라인권목사


        신종코로나가 우리의 건강만이 아니라, 우리의 사업과 경제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이렇게 흉흉한 시절에 가짜 뉴스를 전파하여 사회적 대립과 공포와 혼란을 조장하는 비양심적이고 비애국적이며 비인도적인 무리들이 준동하는 것은 참 걱정스러운 일이며, 비기독교적인 일입니다. 이런 시절에 우리 은혜로 가족은 오히려 주의 평안 중에서 위생에 주의하시면서 방역하시는 분들과 의료진과 환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상대적으로 강조되지 않고 있는 찬송

지난주일에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균형을 이루기 위하여 어떻게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냐를 공부하려고 합니다. 시중에 나가보면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의 문제를 다루는 책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찬송할 것인가에 대한 책은 제가 아직까지 보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기도할까? 어떻게 전도할까? 어떻게 봉사할까? 는 흔하지만, 어떻게 하나님을 찬송할까라는 책은 본적이 없습니다. 교회에서 찬송을 강조하는 것도 찬송이 좋아야 교회가 부흥한다는 인식에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게 찬송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과 버금가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마음에 있어서

그것은 믿음이 마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자리는 마음입니다. 마음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에는 이지적인 면과 감성적인 면, 의지적인 면이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생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7:3)이게 신앙의 이지적인 면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을 크신 하나님, 큰 구원의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면, 그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경이와, 경탄과 감격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게 신앙의 감정적인 면, 곧 느낌입니다. 그래서 슐라이어마허 같은 이는 이 영적인 감정을 종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감정이 동할 때에 비로소 사람의 의지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 의지적 행동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사람은 이성과 의지보다 감정적입니다. 사람은 감정이 동하지 않으면 의지가 발동하지 않습니다. 감정이 동하면 의지는 따라서 움직입니다. 감정이 의지의 동력인 것입니다. 감정이 동하지 않는 의지는 고역이 되어 쉬이 무너집니다. 감정이 동해서 해야 행동하는 것이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찬송은 영적 감정을 움직이는 것

이게 찬송의 중요성입니다. 찬송은 영적인 정서를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시 노래라는 것은 인간의 감정,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지요. 지난번 판문점에서 남북의 정상이 만나서 만찬을 할 때에 제주소년 오연준이 고향의 봄을 불렀습니다. 그때 피곤한 모습이던 김정은의 얼굴이 밝아졌습니다. 고향의 봄이라는 노래가 우리민족의 정서를 흔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통한 것입니다. 이렇게 찬송은 그 자체가 정서적이고 영적인 정서를 움직이는 것입니다. 찬송은 가장 빠르게 우리의 영혼을 덥히고, 하나님을 향하게 하는 영적인 연료와 같은 것입니다.


이게 찬송의 중요성이고 필요성입니다. 찬송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넘어서 우리 영적 체온을 덥히고, 예배를 뜨겁게 합니다. 찬송은 삶에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찬송은 우리의 삶의 긴장과 위기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입니다. 찬송은 우리의 영적인 정서를 풍요롭게 해서 우리 삶에 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영적 감정이 순종의 동력입니다. 이렇게 찬송이 중요합니다.

 

찬송은 본분이자 특권

저는 이것이 오늘 본문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라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이기 때문에 찬송은 믿는 자의 당연한 일이요, 본분입니다. 그래서 찬송은 정직한 자이 마땅히 행할 바라고 하신 것입니다.(33:1)구원 받은 성도가 구원의 감격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구원의 축복을 즐거워 노래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찬송은 성도의 의무이자 특권입니다. 찬송은 하나님께 대한 경이와 경탄과 감격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본분을 다하고 이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겠습니까? 저는 이것을 가장 잘 가르치는 성경이 시편이라고 믿습니다. 시편은 찬송 시이기 때문입니다.

 

찬송은 영혼으로

우선 시편은 영혼으로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송한다고 합니다.(103:1) 찬송은 영혼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혼으로 찬송한다는 것은 위에 말한 것 같이 전인격을 다해서 찬송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TV에서 미스터 트롯이인기입니다. 그 프로를 보면 가수의 노래에 흥겨워 하는 정도가 아니라, 눈물을 감추지 못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누가 이깁니까? 흥겹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노래의 정서에 푹 빠지게 해서 눈물을 흘리게 하는 가수가 이기지요, 이 사람은 그 곡의 가사와 곡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해서 자기감정을 다 쏟아 냅니다. 그 감정이 전이되어 관객이 울기도 합니다. 사람을 상대하는 노래는 이렇게 감정을 다 쓰면 됩니다. 그러나 찬송을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그래서 찬송은 영혼으로,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게 영혼으로 찬양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혼으로 찬송해야 하나님께서 그 찬송을 열납 하십니다.

 

가끔 우리는 영혼이 없이 찬송하는 때가 있습니다. 예배시간에도 찬송을 영혼이 없이 하는 경우가 보입니다. 저는 이런 걸 금붕어 찬송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금붕어는 입만 벙긋거리고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찬송할 때에 입술만 벙긋하고 소리가 없는 찬송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다해서 찬송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다해서 찬송해야 나도 뜨거워지고,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찬송은 확신과 감격과 결단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혼이 없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입니다. 그러므로 찬송은 온 마음 다해서, 온 영혼으로 합시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것이 영혼으로 찬송하기를 익히고 훈련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의 회중에서

그리고 시편은 이렇게 영혼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본성이 된 성도는 성도의 회중에서 찬양하기를 열망합니다.(149:1,150:1) 이것은 신약교회에서도 동일합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고 하셨습니다.(4:19) 이것은 구원은 새로운 공동체 교회가 되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 구속으로 된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는 홍해가의 이스라엘과 같은 하나님께 대한 감격과 구원의 감격에서 나오는 찬송이 있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구속으로 교회가 되게 하신 것은 찬송하게 하심이고, 찬송이 되게 하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6,14,12) 그러므로 찬송은 공 예배에서 온 영혼으로 찬송하고 화답하는 찬송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우리 영이 온전히 하나님을 향하게 하는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모여서 찬송하는 것이 마치 민방위훈련에서 노래하는 것 같아선 안됩니다. 훈련으로 강요해서 마지 못해서 부르니 생경스럽고, 어색하고  멋적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의 감격의 찬송이 있는 공동체입다. 저는 지금도 신학을 할 때 채플시간의 찬송을 잊지 못합니다. 소명 받은 사람들이 한 자리에서 하나님을 찬송할 때 대 강단 천정이 들려올라가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우리 예배가 이런 분위기가 될 때에 예배의 감격이 넘치고, 부흥이 오는 줄로 믿습니다.

 

스스로 영혼을 격려하면서 찬송

그리고 시편은 의지를 발동해서 영혼을 격려해가며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하십니다. 42:1-5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무슨 말입니까? 환난이 오래 계속되면 영이 침체하여 찬송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때에 다윗은 의지를 발동해서, 영혼을 스스로 격려해서 찬송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영혼을 소생케 하고 고난을 이기는 능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도 이 방법으로 환난의 때를 승리했다는 간증을 여러 번 했습니다. 갈 곳이 없고 말할 곳이 없을 때에, 그 침잠하고 상한 심령으로 의지를 발동해서 예수, 예수 늘 살아 계서서 주 동행하여 주시고 늘 말씀 하시네를 부르고 또 부르고 부를 때에 침잠한 영이 소생하고, 소망이 살아나고, 곤하지 않게 하는 능력이 임했습니다. 형통의 날, 즐거워할 때도 하나님을 찬송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고난의 날에는 침체해서 찬송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때는 의지를 사용해서 찬송해야 합니다. 이런 때는 자기가 자기 영혼을 격려해서 찬송하는 것이 찬송하는 비결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울 때에, 고난 중에 스스로 영혼을 격려해서 찬송합시다. 그러면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리고, 사슬이 끊어지는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도가 노래가 되게

그리고 시편은 하나님이 노래가 되게 하라고 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노래가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할 것이라고 합니다.(69:30) 내가 항상 종일토록 찬송 한다고 합니다.(35:28.71:6) 하나님의 율례가 노래가 되었다고 합니다.(119:54)노래는 소원입니다. 노래는 모토입니다. 세상 사람 돈이 노래가 된 것이 이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례가 노래가 되어야 할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노래가 되어 항상 찬송하는 것이 정상적인 영혼의 상태입니다. 좋을 때, 무슨 노래가 나옵니까? 세상노래가 아니라, 찬송이 나와야합니다, 힘들고, 외롭고 슬플 때 장탄식이 아니 찬송이 나와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 입에서 찬송이 끊이지 않을 때에 하나님의 임재하심 안에 항상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찬송할 때 땅에 있는 영혼이 하늘에 오를 것이요, 하나님 앞에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게 우리 은혜로교회가 매일 찬송 1,1,1번을 은혜생활 지표로 삼고 있는 이유입니다. 아침에 한번, 점심때에 한번, 저녁에 한번 찬송하는 것, 이게 쉬운 것 같지만 돌아보면 종일 한 번도 찬송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날은 하나님도 천국도 까맣게 잊고 산 날입니다. 세상 근심걱정이나, 세상 재미로 하나님과 천국을 잊은 날입니다. 그날은 영적인 수입은 없고, 영이 메말랐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찬송1,1,1번을 훈련해서 정착합시다. 이를 위해서 이 달의 찬송을 주보에 실습니다. 이것으로 매일찬송 1,1,1번을 정착합시다. 저는 이게 우리 영혼을 건강하고, 부요케 하고, 삶속에서 하나님을 만나 삶을 승리케 하며, 우리 예배를 뜨거운 은혜의 도가니가 되게 하고, 부흥을 가져올 줄로 믿습니다. - 할렐루야!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