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비 대면 예배 탄압인가?
2020,9,6,주일강론
본문 : 마12:9-12
말씀 : 라인권목사
평안들이시지요.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우리 사회에 생각지 못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중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기독교회들에 대한 대면예배금지일 것입니다. 저도 우리교회가 주일예배를 비대면 온라인예배로 드리는 게 마음이 괴롭고 불편하고 어색하기만 합니다. 이 현장예배금지를 두고 교계에 “신앙의 자유”를 운운하며 “종교탄압”이라며 반발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형편입니다.
그치지 않는 복음에 대한 박해
돌아보면, 우리 기독교회는 독재자나 폭군, 그리고 제국이나 국가로 부터 기독교의 신앙고백과 예배를 반역으로 금지 당하고 박해를 당해왔습니다. 저 로마의 300여년에 거친 박해를 필두로, 우리 한국교회도 조선의 신유박해와 가까이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6,25로 인한 공산주의자들의 기독교탄압과 박해가 있었습니다. 지금 현재도 이슬람지역은 물론이요, 심지어 카토릭 국가에서까지 개신교 교회가 불태워지고, 살해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코로나19로 현장예배 금지 탄압인가?
만약 현 정부가 이렇게 우리 기독교신앙을 탄압하여 교회를 해체하려는 의도로 기독교회의 공예배를 금지하고 있다면, 이는 명백히 신앙의 자유를 말살하는 종교탄압이며, 우리나라의 헌법은 물론, 우리의 양심과 성경의 가르침에 반하는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말살하는 비인도적이고, 반문명적인 야만으로 정죄 받고, 탄핵되어야 하며, 우리 기독자들은 신앙양심을 위하여 굽히지 않고 공예배를 사수해 나가야 마땅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우리 정부가 코로나 방역을 위해서 현장예배를 금지 시키는 것이 합당한지,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현장예배를 양보하고 온라인 예배를 드려도 되는 것인지, 아니면 이것이 신앙의 자유를 탄압하는 것인지를 성경과 교리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을 믿음으로 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행치 않는 것은 죄”입니다.(롬14:23) 이 믿음, 확신을 결정하는 것이 성경과 교리입니다. 만약 성경과 교리가 이 대면예배금지를 탄압으로 가르치고 있다면, 우리는 탄압과 박해로 확신하고 현장예배를 감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로 인한 어떤 불이익도 감수해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하늘의 상을 크게 할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것입니다.(마5:10,12)따라서 현장예배금지를 종교탄압이라고 믿는 사람은 전광훈 같이 해야 맞습니다. 종교탄압이라고 정부와 위정자를 욕하면서도 현장예배가 아닌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목사와 교인과 교회는 스스로 자기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확신하는 바를 행하지 않는 불신앙이며 비겁한 일입니다. 하나님보다 정부가 무서워서 못합니까? 교인들이 무서워 못합니까?
그러나 코로나 방역으로 현장예배를 온라인으로 드리는 것이 성경적이라면 우리는 정부의 방역지침을 적극적으로 준수하고, 온라인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 하고, 온라인 예배로 인한 교회적인 어려움이 있다면, 교중은 그 짐을 서로 나누어지므로 교회를 세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내가 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교리적이라는 확인하고, 확신을 가지고 사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자세라고 믿습니다.
둘째, 우리 기독자들은 자신이 행하는 일을 믿음으로 확신해야 할뿐만 아니라, 그 일을 성경과 교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확신을 가질 수가 있고. 확신으로 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일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때에 설명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방역 상 교회의 대면예배를 금지하는 것이 탄압이라면 그걸 성경으로 설명해야 하고, 아니면 그걸 성경과 교리로 입증해야 합니다. 이런 필요 때문에 지금 정부가 코로나 방역 상 교회의 현장예배 금지하는 것이 종교탄압이거나 반 교회적인지를 성경과 교리적으로 점검해보려고 합니다. 이 문제를 성경과 교리적으로 검토하면 신앙의 자유와 교회탄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일 뿐 만아니라, 이 형편에선 교회가 현장예배를 양보하는 것이 오히려 성경적입니다.
첫째, 교회들이 코로나19가 창궐하는 이때에 코로나 방역을 위해서 공예배를 양보하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인의 본분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본분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규정한 것이 율법의 강령이지요.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와 같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마22:37-40) 즉 그리스도인은 이기적으로 자신이 아니라, 이타적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이것이 천국 사람, 참사람이며, 참사람의 삶의 방식입니다.
이런 본분의 교회가 공예배를 모이는 것이 우리 사회에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원이 되어 건강과 생명과 경제를 해롭게 한다면 그 예배는 오히려 이 본분! 이 존재의 목적과 방식에 위배되는 비기독교적인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제일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그 예배로 이웃의 건강과 나라의 안녕을 위태롭게 하여 세상이 하나님과 교회를 저주하게 하는 일은 신앙적이 아니라, 비 신앙이요, 불신앙입니다. 따라서 우리 한국교회는 정부가 방역을 위해서 현장예배를 금지하기 전에 교회가 먼저 자제해야 했습니다. 정부는 이런 한국교회에 이웃에 대한 봉사의 본분을 하게 한 겁니다. 이게 왜 신앙의 자유와 교회를 탄압하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이때 우리는 이 봉사의 본분을 이행하기 위하여 우리의 특권인 공예배를 양보하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이웃과 세상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둘째,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제자도와 기독교 정신으로 보아서 코로나 방역상 예배를 양보하는 것은 오히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요, 우리 기독교정신을 실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라는 잔이 지나가기를 원하셨지만,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자신을 십자가의 제단에 희생하시므로 세상의 구원이 되셨습니다. 이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이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 “제자도”입니다.(마16:24) 이것이 기독교정신이지요. 교회는 이익집단이 아니라, 자기를 희생하므로 세상의 구원이 되어야 할 밀알 집단입니다. 이런 교회가 예배라는 성도의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 이웃과 사회와 국가의 건강과 생명과 경제에 해를 끼치는 것은 제자도도 아니고, 기독교 정신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 정신이며, 나만 좋고, 잘되려는 마귀성입니다. 사랑제일교회와 광장에서 증오에 가득차서 신앙의 자유를 외친 사람들은 이 마귀성을 드러내서 교회를 사회악으로 규탄 받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코로나가 창궐하는 이 때에 교회들이 이웃과 사회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서 생명 같은 예배를 양보하는 것은 비 신앙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것이며 주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십자가 정신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교회가 감염원이 되어 정부로부터 교회에 예배금지를 요구받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지금 일부 교회들은 이걸 신앙의 자유와 종교탄압이고, 교회를 해체시키려는 음모라고 주장하며 광장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있습니다. 이게 지금 우리 한국교회 수준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걸 부끄럽게 여기고 우리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제자도, 십자가의 길을 회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셋째 “덕”이라는 그리스도인의 목회적 자세와 의무로 보아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고유하고 당연한 자유와 권리도 양보할 수 있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자신의 복음의 자유과 사도의 권리를 주장하고 누릴 수가 있었지만, 덕을 세워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기 위하여 먹을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복음의 자유과 사도의 권리를 양보하고 희생하므로 덕을 세웠습니다.(고전8:9,13,9:5,12) 사도는 한 영혼이라도 얻기 위해서 율법 있는 자에게는 율법 있는 자같이 되고, 율법이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가 되고, 유대인에게 유대인 같이 되고 이방인에게는 이방이 같이 되었습니다.(고전9:19-22)우리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주님은 성전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성전세 반 세겔을 납부할 의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에 이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서 성전세를 내셨습니다.(마17:26,27)이게 목회적인 태도입니다.
이 세상은 전도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구령의 대상으로 안다면 당연히 우리는 이웃과 사회에 대하여 목회적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대중이 모이면 코로나19가 확산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교회를 주시하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과 정부를 탓하고 욕하며 대면예배를 강행하는 것은 목회적이 아니고, 덕이 안 됩니다. 세상을 구령의 대상으로 안다면 목회적이 되어야 합니다. 이 사회에 덕을 세우고, 전도가 되게 하기위해서라도 한국교회는 선제적으로 이 코로나시대에 우리의 생명인 예배를 양보함이 옳았습니다. 이 목회적인 태도로 덕을 세우시고 전파와 간증이 되는 교회로 서시기를 축복합니다.
넷째, 계명의 정신과 요구로 보아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코로나19 방역상 주일예배를 양보하는 것은 계명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명의 정신을 이루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 때문에 주일예배를 모이지 않는 것은 예배라는 첫 돌비의 요구에 반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적지 않은데, 이것은 계명의 원리를 반만 아는 겁니다. 성경은 첫돌비의 예배의 요구가 둘째 돌비, 즉 이웃에 대한 계명과 상충할 때는 순전히 도덕적 차원에서는 첫돌비가 우선하나, 안식일이라는 예배 일의 경우에는 둘째 돌비의 요구를 따르는 것이 첫돌비의 요구를 이루는 율법의 정신이라고 하셨습니다. 일례로 우양이 길을 잃었거나, 넘어졌거나, 구덩이에 빠져 죽게 되었으면 그것을 찾아주고, 풀어주고 살리라고 하신 것입니다.(신22:4)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면 고발하려고 감시하고 있을 때에 이 원리로 안식일에도 병을 고치셨습니다. 오리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율법을 이루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일에 이웃집이 불이 났는데 못 본체하고 성경책을 끼고 교회로 가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까? 그것은 오히려 둘째 돌비를 어기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그때는 예배가 아니라, 불을 꺼주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청년 때의 일입니다. 지금은 오래되어서 주일인지 수요일인지 잘 구별이 안 되는데, 교회가려고 씻고 옷 싹 갈아입고 성경찬송 들고 나서려는데, 이웃 집 할아버지가 소 끌러 나가셨다가 소에 받쳤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성경찬송을 내려놓고, 달려가 보니 소가 할아버지를 뿔로 뭉개고 있었습니다. 이 소를 쫓고 그 할아버지를 업고 달리는데 제 등에서 운명하시는지 소변을 하셨습니다. 옷이 흠뻑 젖었습니다. 그 집이 저를 참 고마워하셨습니다. 그 이웃집은 제가 어떤 일이 있어도 예배에 빠지지 않는 것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래서 더 고맙게 생각한 겁니다. 누구네 와 같으면 교회 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만일 제가 예배가 우선이라고 교회로 갔다면 그게 계명을 순종한 것입니까? 그것을 둘째 돌비의 요구를 불순종한 것이고 덕이 안 전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덕을 세워야 할 교회들이 종교탄압, 교회탄압 운운하며 현장예배를 강행해서 코로나19를 전국으로 확산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이 교계목사들을 청와대로 초청해서 대면예배를 금하는 것에 양해와 협조를 구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교회단체 장이라는 목사가 대통령에게 “정부가 신앙의 자유를 명령하는 것 같아서 놀랐다”며, “교회를 사업체 취급하지 말아 달라.”고 대통령을 훈계했습니다. 이게 계명을 지키는 겁니까? 부끄러운 줄 모르고 오히려 의인의식을 가진 것입니다. 지금 일부의 교회들이 대면예배를 강행해서 우리 사회에 감염을 확장하고 있는 것은,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고 있는 행위요, 비인격적이며, 비상식적입니다. 비인격적이며 비상식적인 것은 정상적인 신앙이 아니라, 광신이거나 미신입니다.
따라서 이런 우리교회들에게 현 정부가 현장예배를 금지하는 것은 탄압이 아니라, 도리어 코로나19의 바이러스로부터 우리 교회와 예배를 보호하는 행위입니다. 만약 정부가 코로나가 창궐하는 지금 대면예배를 금지시키지 않고, 방역지침을 준수하여 예배를 드리게 하지 않았다면, 사랑제일교회와 같이 교회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온상이 된 경우가 더욱 많았을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왜 기독교만 예배를 금지 하느냐는 항변도 부질없습니다. 사랑제일교회를 비롯하여 교회들에서는 코로나가 발생하고 있지만, 천주교나 불당에서는 발생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8,15광화문 집회로 코로나19가 전국적으로 환산되자 수원의 한 가계는 “교회 다니는 사람 당분간 받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라는 계시 문이 제 톡에 왔습니다. 저는 이 사진을 보며 한참 동안 기가 다 빠졌습니다. 어쩌다 우리 사회에서 교회와 성도가 이렇게 되었는지 저 자신이 부끄럽고 무력감에 빠져있었습니다.
은혜로 가족여러분! 우리가 이런 수치를 어떻게 씻고, 전파가 되게 할 수 있을까요? 지금, 이 풍랑! “요” “나”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 교회가 믿음으로 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본분과 제자 도를 따르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성전을 닫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지금 우리 조국교회는 베옷을 입고 재에 앉을 때입니다. 그런데 우리 목회자들이 모임만을 중요시하고, 교중의 수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게 위협을 당하니 화가 난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내 교회에 모이는 교중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도록 해산의 수고를 해야 할 때입니다. 이것만이 이 코로나사태로 불신세계에 만연한 반교회정서를 해소하는 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를 본 받는 것, 이것이 예배를 회복하고 이 땅을 치료하는 길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