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 능소화를 보며
"재능 있고, 준비되었는데도 때를 얻지 못하거나, 여건이 따라주지 못해서 뜻을 펴지못 하는 이를 보는 듯하여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한 육 년 전쯤인가요, 우리 교회 작은 정원에 가꾸는 능소화를 보며 제가 SNS에 올린 글의 한 문장입니다. 우리 교회 능소화는 꽃이 열었다가 피지 못하고 떨어져 버리는 것이 많습니다. 남아서 꽃을 피우건 실적이 좋았을 때는 4활 정도나 될 것 같습니다. 게다 우리 능소화는 늦게 피기 시작해서 빨리 끝나 칠월을 넘지 못합니다.
이렇게 우리 능소화가 피우지 못하고 떨어지는 이유는 토질이 박해서입니다. 우리 정원은 파보면 속이 모래와 쓰레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초봄과 꽃을 맺기 전에 거름을 줍니다만, 그래도 앞에서 말했듯, 성적이 좋은 때가 사할 정도나 핍니다. 이걸 보자니 꼭 재능도 있고, 준비되었는데도, 뜻을 펴지도 못한 채로 지는 이를 보는 것 같아서 가슴이 짠해서 위의 글을 썼던 겁니다.
저는 그래도 거름 주고 가꾸면 나질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좋아지는 게 아니라, 점점 작황이 나빠지다가 지난해는 겨우 여남은 송이가 피었을 뿐입니다. 이러던 우리 능소화가 금년은 제 세상을 만난 듯 만발했습니다. 능소화가 오른 축대 일부는 능소화 꽃으로 가득한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지나는 길손들이 올라와서 사진을 찍는 이들을 종종 봅니다.
해가 갈수록 쇠퇴하던 우리 능소화가 이렇게 금년에 만발하니 그 이유가 궁금해졌습니다. 거름을 준 것은 전과 다름이 없는데 왜 금년은 잘되었을까? 다른 것이 있다면 금년 초봄에 능소화를 올린 고욤나무와 감나무를 고사시키려고 웃동을 잘라버린 것뿐입니다. 윗동을 잘랐을 뿐만 아니라, 싹이 돋아나는 족족 떼여버렸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이 고욤나무가 커지고, 그 그늘이 깊어지자 공들여 가꾸던 잔디는 이미 망했을 뿐만 아니라, 제가 애지중지하는 장미가 해마다 고사하는 가지가 많아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게 우리 능소화를 기를 펴게 한 겁니다.
전에 팔뚝만 하던 고욤나무가 지금은 원두막 기둥을 해도 될 정도로 자랐습니다. 우리 교회 정원은 큰 화분과 같습니다. 여기에 위에서 말했듯이 모래와 쓰레기가 채워져서 토질도 박합니다. 이렇게 자리도, 양분도 한정적인데, 이 생육이 강한 고욤나무가 자랄수록 더 많은 양분을 필요했던 겁니다. 이렇게 고욤나무가 양분을 독점하며 그늘이 깊고 넓어 감에 따라서 장미와 능소화도 해가 갈수록 세력을 잃고 쇠퇴했던 겁니다. 이 고욤나무가 힘을 쓰지 못하게 웃동을 잘라 주니, 우리 능소화가 잘되어 만발한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고는 참 마음이 쓸쓸해졌습니다. “나무는 큰 나무 덕을 보지 못하지만, 사람은 큰 사람 덕을 본다.” 이 옛말이 지금은 무색합니다. 불공정 계약에 시달리는 하도급 업자들, 거대 기업들이 골목까지 잠식하여 불공정한 경쟁을 하는 개인 사업자들도 떠올랐습니다. 더 서글픈 것은 이런 적자생존이 교회에도 통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교회 인터넷 신문에 시리즈로 신도시의 대형건물을 세운 교회들을 연재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신도시에 웅장하게 세워진 교회들은 대형교회들이 지교회로 세운 교회들이며, 그러지 않은 교회는 경매에 부쳐지고 있고, 원주민 교회들은 다 도태되었답니다. 개척교회도 대형교회가 팀을 짜서 하는 교회는 되고, 대형교회 인근의 작은 교회들은 맥을 추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교회의 임지가 나면, 다 대형교회의 부목사들이 청빙을 받는 실정입니다.
이런 현상이 한국교회에 계속되면 결국은 중대형 교회만 남을 것이요, 그 중대형교회에 교인이 유입되는 원천 같은 작은 교회들이 고사하면 결국 대형교회도 문화재로 남아 관광객이나 찾는 유럽의 교회와 같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형편인데도 우리 한국교회는 복지나 나눔, 불공정을 시정하려는 정책을 좌파로 타도하자며, 개발 독재 시대를 동경합니다. 교인들은 큰 교회는 훌륭하고, 작은 교회를 능력 없는 교회로 여기며 작은 교회를 회피하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이렇게 자본주의의 폐단이 한국교회에 깊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공생 공존이라는 우리 능소화가 만발할 수 있게 하는 길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라려는 고욤나무의 윗동을 잘라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개인의 끝없는 욕망이라는 고욤나무 윗동을 사정없이 잘라줍시다. 독점하여 지배하려는 정치와 기업의 탐욕의 윗동을 자르는 것, 이것이 우리 사회를 고르게 하며, 공존케 하는 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욕망과 탐욕의 웃동을 자르는 건 정책도 필요할 것입니다만, 가장 좋은 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하는 것임을 초대교회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은혜받은 초대교회는 단 한 사람도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물질적 가치와 탐욕에서 자유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이게 믿음의 본질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은 그 본질이 자기 부인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야 어떻든 우리네 그리스도인 자신과 우리 교회들은 이 길을 걷고 있는지, 한번 쯤은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