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필/내 영혼의 수상록

누가 이 고양이 좀

아브라함-la 2013. 5. 14. 22:18

 

 

 

 

   장마가 시작되고 나서 골칫거리가 생겼습니다. 고양이 한 마리가 잔디밭에 와서는 볼일을 보고 갑니다. 가물 적에는 이게 금방 말라서 별로 냄새도 없고 치우기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비가 자주오자 이게 마르지도 않고 잡식성으로 먹은 거라 꼭 인분과 같은 냄새를 피우고 치우기도 고역입니다. 게다가 이놈이 계단에서 가까운 곳에서 일을 보아서 교회 현관에서 냄새가 나기 때문에 이걸 치우지 않을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문제는 치워도, 치워도 소용이 없다는 점입니다, 이놈이 교회 잔디밭을 제 화장실로 아는지 계속 일을 보기 때문입니다. 냄새가 없으면 안 올까 해서 치우고 물을 뿌려도 하루만 지나면 보라는 듯이 일을 봐두고 갑니다. 사람 같으면 말릴 수도 있고 따질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타협도 할 수 있고 그러지 말라고 타이르고 설득할 수 있고 가르칠 수도 있지만 이놈의 고양이는 어쩌면 좋습니까? 하도 답답해서 고양이 퇴치법을 검색해 보다 깜짝 놀랐습니다. 저처럼 고양이로 골머리를 앓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줄 미쳐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댓글에 올라온 말처럼 쥐약을 놓을 수는 없는 일이고, 말도 통하지 않는 이놈의 고양이를 어쩌나 이렇게 속을 끊이다가 문득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나야말로 이 말이 통하지 않는 고양이 같은 존재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일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변화되어야 할 부분이 있는데 변화되지 못하는 건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삽은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깨닫기에 더디고 둔한 자기를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시73:22)라고 자신을 짐승으로 느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말이 통하지 않는 욥을 나귀 새끼 같다며 알아듣지 못하는 건 자기들을 짐승으로 여기는 행위라고 규탄했습니다.

 

 

시편은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자는 짐승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깨닫지 못해서 자멸해가는 사람을 지켜보는 국외자의 답답함이지만 아삽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입니다. 깨닫기에 둔한 자기를 우매한 짐승과 같이 인식한 아삽이 얼마나 크게 하나님과 그 하시는 일을 깨닫고 자기를 고쳤는지는 그의 위대한 영혼이 나타난 그의 시편들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듣고 깨닫는 것입니다.(마13:23) 변화되어야 하고 고쳐야할 내 인생의 단골 병을 여전히 가지고 있음은 깨닫지 못해서입니다. 이건 듣지 못함이거나 거울을 보고도 자기를 잊어버리는 것 같이 듣고도 행하지 않기 때문인데 이도 결국은 깨닫지를 못해서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말이 통하지 않는 고양이를 답답해하시고 염려하시겠습니까? 깨닫지 못하는 우리 심령을 염려하십니다.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이는 하나님도 어쩔 수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자신을 아삽과 같이 하나님 앞에 짐승으로 여기는 영성으로 가르침을 받을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복된 줄로 믿습니다. “주여 나로 아침마다 깨닫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영혼의 소유자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깨닫기에 둔감한 자신을 짐승으로 여기는 아삽의 영성이 부러워집니다. 그나저나 오늘도 또 와서 일보고 유유히 사라진 저 고양이 좀 누가 타일러 줄 수 없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