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두개인들의 부활 논쟁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나라 하시니”(마22:32)
사두개인들이 율법의 수혼법의 사례를 따라서 칠 형제가 한 여자와 혼인했는데 부활 때에 그녀가 누구의 아내냐는 질문을 예수님께 제기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부활이 있다고 하시면, 예수님을 한 여자가 천국에서 일곱 형제의 아내가 되게 하는 웃음거리로 만들려는 교활한 질문을 한 것입니다.
이 교활한 질문에 주님은 우선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믿지 못하는 합리적 사고의 틀이 육체라는 한계에 종속된 어리석고 무지한 육신의 생각에 불과함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육체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활을 만화와 같이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육신적인 일로 아는 것이 성경도 하나님도 알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현 육체의 연속이거나 회복 정도가 아니라, 천사와 같이 신령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은 신령계인 천국에 적합한 신령한 몸을 입는 것입니다.(고전 15:35-49) 땅에서는 땅에 최적화된 육신의 몸을 주셨고, 하늘에서 하늘에 최적인 영화靈化 된 몸을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은 부활을 육신적인 것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부활 논의를 합리적 사고의 영역에서 신앙의 영역으로 바꾸셔서 사두개인들의 교활과 불신앙을 정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본래부터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라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논거가 하나님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이 족장들의 뼈가 막벨라 굴에 있지만 하나님은 이들은 생존하여 하나님과 교제 중에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게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실제적 사례입니다. 이렇게 부활은 이스라엘의 본래의 신앙입니다.
이렇게 부활은 신령한 사건이며, 하나님의 능력이며 신앙의 영역에 있습니다. 가끔 사람이 묻히면 풀을 기르고, 그 풀을 소가 먹고, 그 소고기를 사람이 먹으면 부활 때에 어떤 몸이 나오냐는 소리를 듣는데 이게 사두개인들의 이 웃지 못할 질문과 동일한 질문인 것입니다. 육신으로 영의 일을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영의 일은 영으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고는 영적이며 신앙적인 사고입니까? 한 줌도 안 되는 육신적 사고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