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었던 잠언의 기자는 일의 결국은 하나님의 작정대로 된다는 사실을 통감했습니다.(1) 마치 농부가 보의 물을 작물에 적당하게 조절하여 대는 것 같이 하나님은 왕의 마음을 움직여서 내정이든 국제적인 문제이든 하나님의 작정을 이루도록 섭리하십니다.
요셉과 다니엘, 에스라와 느헤미야, 에스더의 경우가 이 하나님의 주권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생각을 하시느냐입니다. 하나님을 중심하여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면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도 움직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에,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단순한 도덕이나 윤리적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문제입니다. 공의는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있으려면 반드시 “공의와 정의‘를 행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3)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무수한 제물을 드리며 사회적 약자들을 착취하고 억울하게 하는 것을 질책했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억울하게 하고 착취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의 나라인 천국의 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사보다 인애를 원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공의와 정의를 외면하고 이웃에게 불의를 행하면서 행하는 예배는 하나님께 가증한 것입니다.(27) 그것은 하나님을 살아계신 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닌 우상 취급하는 일이며, 말하자면 하나님을 가지고 노는 영적인 유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공의와 정의“는 참된 신앙과 예배의 시금석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한국의 장로교를 이 시금석 위에 올리면 우리 한국교회의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이겠습니까? 하나님이 가증이 여기셔서 넌덜머리를 내시던(사 1:13,14)그런 예배, 그런 교회이겠습니까? 진정 형통을 원하십니까? 하나님께 맞추시는 길이 공의를 행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