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곤경에 충족하신 예수
022,7,17, 주일강론
본문 : 왕하13:20-21
말씀 : 라인권목사
더위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연세 높은 어르신들은 한낮에는 출입을 삼가시고, 휴가철에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시고 상식과 예절을 지키셔서 탈 없이 더위를 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번 달에 우리 기술만으로 누리호를 우주 괘도에 성공적으로 올렸습니다. 우주선은 인간의 추구와 지식과 기술의 결정체일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지식과 기술과 능력의 결정체가 우주선이라면, 이 우주선을 만드는 우리 인생의 곤경과 무력을 고스란히 노출하는 것은 인간의 백골일 겁니다. 허사가의 한 구절입니다. “년년 춘색 오건만 어이타 인생/한 번 가면 못 오니 한이로구나/금일 향원(今日香園) 노든 객(客)/ 내일 아침에 청산 매골 마른 뼈 한심하구나/ 이렇게 청산의 백골이야말로 인생무상이자 무력의 결정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무력함과 소망 없음을 “에스골 골짜기의 마른 뼈”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 백골이 나옵니다.
선지자 엘리사의 백골
먼저 병들어 죽은 엘리사의 백골이 나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인데 이 엘리사의 병과 죽음과 백골은 왠지 우리에게 부자연스럽습니다. 엘리사는 그의 스승 엘리야를 통해서 부름을 받은 선지자입니다. 엘리야는 불 수레와 불 말을 타고 승천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이 엘리야의 제자로 엘리야의 영감을 갑절로 받은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엘리야보다 많은 이적을 행했습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 때에만 사역했으나 엘리사는 아합 왕 때에 부름 받아서 오모리 왕조-오므리, 아합, 아하시야 요람-가 예후의 혁명으로 망하고, 예후 왕조의 3대 왕 요아스 왕 때까지 적어도 50여 년을 사역했습니다, 삼십 세에 부름을 받을 것으로 치면 80세 고령입니다. 이 긴 세월에 엘리사는 기름 부 음 받은 자라는 말 그대로 이스라엘의 메시아였습니다.
이 메시아 엘리사가 병듭니다. 그 병으로 죽어서 장사되어서 묘실에 백골로 있습니다. 엘리사는 선지자, 즉 메시아로 “이스라엘의 병거이며 마병”이었지만 죽음을 막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엘리사의 영력과 이력도 병과 죽음을 어쩌지 못한 겁니다. 엘리사의 권력으로도, 명성으로도, 죽음을 막지 못해 마른 뼈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엘리사의 병을 노환이라고 하지 않고 “죽을병”이라고 한 것입니다. 질병은 죽음에 이르는 통상적인 방법인데, 이를 인생이 어쩌지 못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따라서 엘리사의 백골은 인간의 곤경과 무력함과 무상을 그대 노출하고 있습니다.
마른 뼈 같은 왕과 왕국
그리고 본문은 마른 뼈와 같은 왕과 한 왕국의 곤경과 무력함을 그대로 노출합니다. 이때 북방 이스라엘은 아람의 속국에 다름이 없었습니다. 7절을 보면 아람은 이스라엘에 마병 오십, 병거 열 대, 보병 만 명만 존속케 했습니다. 그래서 20절에서 보듯 심지어 하잘데 없는 모압의 약탈에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얘기냐면 그동안 엘리사가 있어서 아람을 막아왔는데, 하나님의 종 엘리사가 부재하니 북방 이스라엘이 마치 목자 잃은 양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왕과 왕국은 있는데 그 왕과 왕국이 나라와 백성을 지킬 수 없어서 도탄에 빠진 것입니다. 이게 꼭 에스골 골짜기의 해골 떼와 같지요. 왕권과 국가의 권능이 마른 뼈와 같이 된 것입니다.
마른 뼈 같은 백성의 참상
이 국가의 곤경은 개인의 곤경과 불행이 됩니다. 이때 북방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느 정도 도탄에 빠졌습니까?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장지로 가다가 모압의 도적 떼가 몰려오는 것을 보고 다급해서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던져 넣었습니다. 모압 도적 떼를 어쩔 수 없습니다. 장사도 지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는 겁니다. 북방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른 뼈 백골같이 되어버린 겁니다. 지난봄, 코로나로 기저 질환을 가진 분들이 많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화장장을 잡지 못해서 난리였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인간의 무력의 절정입니다. 이 죽음을 처리할 장사도 지내 수 없는 것은 죽음보다 비참한 것입니다. 이런 걸 참상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본문은 백골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죽어서 마른 뼈로 남았습니다. 왕도 왕국도 이 마른 뼈와 같이 무력합니다. 한 개인도 이 마른 뼈와 같습니다. 심지어 장례도 치를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입니다.
엘리사의 백골에서 부활의 기적이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이런 인간의 곤경과 약함에서 가장 강력하고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장사 지내러 가는 사람들이 도적 떼가 몰려오는 것을 보고 급해서 길가의 무덤 문을 열고 몇 사람이 시체를 들어 묘실에 던져 넣어 버렸습니다. 그 무덤은 마침 엘리사의 무덤이었고, 죽은 자가 이 엘리사의 뼈에 떨어지자 곧 회생하여 살아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엘리사의 마른 뼈 백골에서 죽음에 정복당한 시체가 닿자 죽은 자가 살아난 것입니다. 이 이적을 두고는 엘리사가 엘리야 보다 더 큰 영감이 있었다는 증거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른 뼈에 무슨 영감이 있고, 무슨 능력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모세의 지팡이가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낸 것 같이, 엘리사의 뼈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이 엘리사의 마른 뼈를 통해서 나타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은 인간의 능함으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음, 약함으로 하시고 그 역사를 하나님의 말씀과 선택된 것을 통해서 하신다는 뜻입니다. 백골은 인간의 곤경과 무력의 결정체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백골이 된 엘리사의 뼈가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나타낸 것입니다. 강한 것이 아닌 약한 것, 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엘리사의 생명과 능력이 아닌 엘리사의 죽음과 백골이 하나님의 구원을 나타낸 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전형입니다. 이게 우리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입니다.
강함이 아닌 약함으로 구원
우리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함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구원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이 되심은 강함이 아닌 약함입니다. 엘리사가 선지자- 메시아-이며 엘리야의 영감이 갑절이 있었으나 백골이 된 것 같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우리 주님도 죄인들에게 팔 리우 시고, 체포당하시고, 능욕을 당하시고, 불의한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어서 장사되었습니다. 이게 유대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메시아, 그리스도는 강하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알았습니다. 원수를 쳐부수고 굴복시킬 줄로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맥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무덤에 장사된 것입니다. 예수는 모든 것에서 연약한 우리와 같이 되시고 죄인처럼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약함이 부활이 되었습니다. 이 약함이 죽음을 죽였습니다. 이 약함이 구속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강하심이 아닌 십자가에 죽으신 그 약함으로 마른 뼈와 같은 인간을 살리는 충족한 구원의 능력이 되셨습니다.
인간의 곤경에 충족한 구원이신 예수
예수는 예수의 말씀에만 접촉해도 모든 사람을 살리는 충족한 구원이 되셨습니다. 하셨습니다. 엘리사의 뼈에 접촉한 죽은 사람이 살아난 것은, 마른 뼈와 같이 된 북방 이스라엘이 아람을 세 번 치게 된다는 19절의 엘리사의 예언이 요아스와 그의 아들 여로보암 2세에 성취될 것을 예표 합니다. 이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져서 여로보암 2세 때는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바다까지 회복합니다.(14:25) 엘리사는 죽어서 백골이 되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에 접촉하는 사람은 살아납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4-25)엘리사의 말씀이 역사하는 것 같이 예수님의 말씀은 듣는 모든 자를 살게 합니다. 에스골 골짜기의 해골 떼가 말씀을 대언할 때에 살아나는 것 같이 예수의 말씀은 듣는 모든 자를 살아나게 합니다. 이 말씀이 인간의 곤경에 대한 하나님의 방안입니다. 내 인생의 곤경과 무력에서 예수의 말씀에 접촉합시다. 예수의 말씀에 내 영혼을 닿게 하고, 내 질병을 닿게 하며, 문제를 닿게 하면 살아날 줄로 믿습니다.
예수는 엘리사의 뼈에 닿는 죽은 자를 회생케 한 것 같이 예수님께 닿는 모든 자들을 살게 하십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요1:12) 영접은 믿음으로 예수께 접촉하고,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을 신비적 연합이라고 합니다. 주님과 믿음으로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믿음은 예수님과 관계입니다. 생명이신 예수님과 관계를 맺으면 삽니다. 그래서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다“하셨습니다.(요일5:12)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접촉하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는 생명이시고 살리는 능력이십니다.
예수는 예수님께 닿는 자들의 모든 인생 고의 곤경과 무력함에 충족한 구원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닌 예수님의 옷 가를 믿음으로 만진 여인의 38년 된 유출병이 낳았습니다.(마9:20) 예수님이 만져 주신 자는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소경이 눈을 뜨고 말 못 하는 이가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들고 축복하신 떡은 오천명을 먹고 남게 했습니다. 예수는 죽은 영을 살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인생 고의 곤경과 무력에 구원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인생 고의 곤경과 무력함에 낙심할 것이 아니라 그 곤경으로 예수께로 갑시다. 예수님의 옷 가를 믿음으로 만집시다. 그러면 예수는 인간의 모든 곤경과 무력에서 충족한 해결이시며 구원하심을 경험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는 인간의 곤경과 무력의 절정인 질병과 죽음과 무덤이 부활과 천국의 삶에 이르는 가장 분명하고 안전한 통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엘리사의 뼈가 죽은 자를 살게 했으나, 엘리사의 뼈도 부활이 필요한 뼈입니다. 이 죽음과 무덤은 이 인간의 곤경과 무력의 절정입니다. 그러나 이 죽음과 무덤에 예수께서 이르셨기 때문에 그 죽음과 무덤은 매튜 헨리의 해석과 같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는 생명으로 이행해 가는 안전하고 행복한 통행로“가 되었습니다. 질병, 죽음 무덤은 인간의 곤경과 약함의 절정이지만, 그 인간의 모든 약함이 되신 예수님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로 인간의 질병과 죽음과 무덤이 영생에 이르는 안전하고 행복한 길이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질병과 죽음을 해가 아니라, 부활의 생명에 이르는 길일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폴리갑과 같이 생명을 위협하는 것과 죽음에도 담대함과 평안을 경험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일이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 자체만 죽음과 무덤에서 살리는 능력이 되시는 것 만이 아니라. 그 예수를 따르고 전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예수의 구원하시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일도 하리니”(요14:12) 베드로가 주님이 하신 것과 같이, 앉은뱅이를 걷게 하고,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에 삼천 명이 그의 말씀에 회개했습니다. 해골 떼 같은 영혼들이 살아났습니다. 주님보다 더 큰 일 한 것입니다. 죽어 무덤에 갈 인생이, 마른 뼈와 같은 자들이 세상을 살리고 부요케 했습니다.
이것이 저의 감격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야말로 마른 뼈입니다. 그러나 지금 저 같은 사람을 통해서 영혼이 살아나고, 은혜가 임하고, 이렇게 위로와 격려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이게 우리 기독교, 즉 예수의 능력입니다. 유럽의 대성당들은 다 사도들이나 성인들의 뼈가 있는 곳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사도들의 복음이 서양 문명의 바탕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마른 뼈와 같지만, 구원이신 주님의 손에 잡히면 그 마른 뼈 같은 인생이 인간의 곤경을 해결하는 세상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는 충족한 구원이십니다.
은혜로 가족 여러분! 이 예수이면 마른 뼈와 같은 우리가 살뿐 아니라, 이 세상의 곤경에 구원의 빛이 될게 하실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의 곤경과 약함으로 십자가 앞에 나갑시다. 믿음으로 죽으시고 무덤에 내려가시고 부활하신 주님께 접촉합시다. 이 믿음으로 접촉으로 우리의 곤경에서 충족한 구원이신 예수를 만나시고, 이 곤경에 처한 이 세상에 복음의 빛이 되는 것을 경험해 나가시기를 충족한 우리 구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