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la
2022. 8. 28. 21:50
022,8,28, 주일
본문 : 에 4:7-174:7-17
말씀 : 라인권목사
평강입니다. 다음 주가 추석입니다. 지구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들 열심 내시고,, 명절은 시험 들기 쉬운데 기도하셔 은혜 많은 명절 되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은 에스더서에서 우리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에스더서는 유대인들의 명절이 된 부림절의 유래를 알려 주는 성경입니다. 이 에스더서는 하나님의 성호가 단 한 번도 안 나옵니다.. 그래서 루터는 에스더서가 정경에 든 것을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이 에스더 서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어느 성경보다도 드라마틱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스더서는 원수 마귀를 멸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승리의 영광을 보게 합니다만은 오늘은 한 사람을 하나님께 나가 간구하는 기도자가 되게 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유다인의 곤경과 인간의 곤경
오늘의 본문의 유다인들의 곤경은 하나님께 나가야 할 우리 인간의 곤경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문지기 유다인 모르드게가 총리 하만에게 절하지 않아서 하만은 모르드개 만이 아닌 모든 유다인을 멸절하려고 했지요, 이 유다인들을 언제 멸하면 좋은지 길일을 택하기 위해서 제비를 뽑아서, 아달월 십삼일을 얻고, 왕 아하수에로에게 뇌물을 바치며 유다인을 모함해서 아달월 십삼일, 즉 12월 13일 하루에 멸하게 왕의 조서를 받아내서 전국에 반포했습니다.(에3:6,,7,9,13)모든 유다인들이 아달월 십삼일 하루에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이 멸망을 막을 길은 오직 왕 밖에 없습니다. 왕후 에스더가 왕 앞에 나가서 간구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이게 우리 인생의 곤경입니다.
우리 인생은 멸망에 직면한 유다인들 같이 죽음에 직면합니다. 아무리 건강관리를 하고, 보약을 먹고, 치료해도 결국은 죽음과 대면해야 합니다. 이 죽음이 사람의 힘으로 못하고 어쩌지 못하는 일을 산출합니다. 치료 안 되는 병은 죽음 때문에 있습니다. 왜 이어령 같은 교만한 사람이 하나님께 왔습니까? 잘 나가던 딸이 자꾸 안 되다가 시력을 잃어가는 병이 듭니다. 이게 현대 의학으로 안됩니다. 그래서 딸을 살리시면 내 재주를 드리겠다고 한 겁니다. 죽음이라는 것에서 내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곤경에 처하게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결국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나가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곤경이 처험 동족을 위하여 에스더가 왕 앞에 나가는 것은 어떤 일이었습니까?
에스더가 왕 앞에 나가는 일은
첫째 목숨을 거는 위험한 일입니다. 왕의 부름을 받지 않고 왕의 어전에 들어 가면 죽이게 되어있습니다. 암살로 죽은 왕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를 방지하려고 부름이 없이 왕을 가까이 하면 죽이게 한 것입니다. 예외로 왕이 홀을 내면 살립니다. 둘째, 에스더는 이미 30일이나 왕이 부르지 않았습니다.(11) 왕이 한달을 금욕했겠습니까? 이건 왕의 마음이 에스더에 대하여 전과 같이 않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부름받지 않은 에스더가 갑자기 왕께 나가면 죽을 수 있는 겁니다. 셋째, 왕 앞에 나가기 위해서 삼일을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그러고도 확신 할 수 없어서, “죽으면 죽으리이다”고 목숨 걸고 나갑니다. 그리고 왕께 구하는 것도 한 번에 구하지 못하고 뜸을 들이며 기회를 찾습니다. 이게 꼭 인간이 하나님께 나가는 것 같습니다.
죄인인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가면 죽습니다. 마치 춥다고 불속에 들어가면 불타 죽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사는데 하나님께 앞에서면 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물을 가지고 오게 하신 겁니다. 제물이 대신 죽은 것을 치고 그 사람을 하나님이 받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재물을 가지고 나간다고 해도 두렵습니다, 제사를 잘못하면 죽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은 마치 삼십일 동안 왕을 보지 못한 에스더 같습니다. 살다보면 마음이 하나님을 떠납니다. 자신이 부정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거리감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용납하신다는 확신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여 기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하나님이 내신 하나님께 가는 길
우리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 가야 하나 갈 수 없고, 하나님께 간구할 수 없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고 기도 할 수 있게 예수라는 은혜의 길을 내셨습니다. 죄로 하나님과 원수 된 것을 화목케 하시기 위하여 아들 예수를 화목제물로 보내셨습니다.(롬3:23,25)이 피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하셨습니다.(롬5:10,1) 이 예수의 대행과 대형으로 사죄와 칭의와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롬5:8) 이 예수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종의 영이 아니라, 아들의, 영 양자의 영을 주어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때를 따라서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감을 얻었습니다.(히4:16) 사람의 경건이나 공로가 아닌 예수의 피가 성소에 들어갈 담력입니다.(히10:19) 이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이나 구하게 하셨습니다.(요14:13,14)
사람보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더 쉽게 하심
이렇게 예수는 사람이 사람을 만나고, 친구를 만나는 것보다 하나님과 친구와 같이 말하는 것이 더 쉽게 하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시면 사람을 만나는 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을 눈치챘을 겁니다. 에스더는 왕비인데도 남편 왕을 만나는 것이 어렵고 그 왕에 말하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이게 곤궁에 빠진 사람의 고통이고 고독입니다. 어려워지면 사람들이 나를 낯설어합니다.. 만날 사람이 없고,, 있어도 찾아가기 어렵고, 만나도 말을 못 합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친구에게 말하는 것보다 하나님과 친구와 같이 말하는 게 더 쉽습니다.
우리 교회가 환난 중일 때 제가 사람을 만나러 나갔다가 결국 청계산으로 갔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건 부담이나 하나님을 만나는 건 부담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구하는 건 부끄럽지만 하나님께 말하는 건 부끄럽지도 자존감이 상하지도 않습니다. 친구는 물론 부모에게도 못하는 말이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무슨 말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 건 모멸감이라는 세금을 내야 하나, 하나님께 백번이고 천 번이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모세가 친구와 같이 하나님과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에게 이렇게 하나님과 친구처럼 말할 수 있게 한 예수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곤경에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께 갑시다. 예수로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에 들어가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구합시다. 하나님과 친구와 같이 말합시다. 사람에게 가지 못해도 하나님께로 나갑시다. 사람들이 외면하고 외인과 같이 여길 때에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친구처럼 기도하여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입고, 그 사랑의 풍성함으로 응답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죄 중에서 담대히 회개하러 나갈 수 있어
예수는 우리가 죄에 빠졌을 때에도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가 회개할 수 있게 하는 은혜의 길입니다. 이게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잘 못하고, 죄를 지었어도 예수의 피 공로로 용서해 주실 것을 확신하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복하는 것입니다. 요즘 손녀를 보면 배변할 때는 방에 들어가 저 혼자 합니다. 배변이 끝나면 좋은 일 한 것 같이 나옵니다, 그러면 엄마가 더럽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칭찬하고 갈아주고 씻어 줍니다. 이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육신인 줄 아시므로 사유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죄에 빠져도 예수의 피공로 담대히 회개하면 기쁨으로 용서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를 죄에서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9) 죄에 빠져 스스로 가증할 때에 예수의 십자가를 붙잡고 하나님께 담대하게 죄를 고백합시다. 이 믿음의 회개기도로 하나님을 만납시다.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합시다. 이 회개 기도로 삶을 회복할 줄로 믿습니다.
은혜가 필요한 때마다 담대히 구하게
뿐만 아니라 예수는 어려울 때마다 은혜의 보좌 앞에서 담대히 구하여 얻게 하는 기도의 응답의 보증이시고 능력이십니다. 때를 따라서 돕는 은혜라고 했습니다.(히4:16) 이때가 무슨 뜻입니까? 이 주석이 오늘 본문의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14)고 하신 “이 때”입니다. 하만의 음모로 모든 유대인들이 한날에 죽게 되어 전능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능력이 필요한 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되는 때를 말합니다. 이때가 은혜를 구할 때입니다. 이때가 기도할 때입니다. 그래서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시 50:15)
왜 이때에 담대히 나가 구하라고 하십니까? 그것은 “이때”는 시험이 되기 때문입니다. 환난 당하면 죄 감이 느껴집니다. 징계받았다는 인식이 듭니다. 은혜를 구함이 가증해집니다. 돈 문제는 기도해도 소용없다, 이렇게 됩니다. 이때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가 구하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겁니다. 이 피 공로로 은혜가 절실하면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께 나가 구하게 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시행하신다고 하셨습니다.(요 14:13,14)예수가 응답의 보증수표입니다. 믿음으로 어렵고 힘들 때 이 기도라는 수표를 끊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 기도가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대책입니다. 세상에 있는 성도가 이 기도로 예수님 안 계신 세상에서 은혜가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입어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난 중에서 부끄러워하지 말고, 담대히 예수의 이름으로 구합시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필요할 때마다 담대히 나가 구합시다. 그리하여 인생의 곤고한 날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는 풍성한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은혜로 가족 여러분! 곤하고 막막하십니까? 우리에게는 이 예수가 계십니다. 이 예수로 담대히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이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 기도할 수 있는 이는 전부를 가진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그는 이 곤한 세상에서 때마 하나님을 경험하고 알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진리를 아일랜드의 스크라이븐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주께 고함 없는 고로 복을 받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르나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 진자 누군가
피난처는 우리 예수 주께 기도드리세
세상 친구 멸시하고 너를 조롱하여도
예수 품에 안기어서 참된 위로받겠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