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햅쌀밥 그 맛있는 추억

아브라함-la 2023. 10. 6. 15:15

- 꾀꼬리 빛 벼논과 코스모스 -

추석이 지나며 하루가 다르게 들녘이 꾀꼬리 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잘 익은 벼는 꾀꼬리 빛이 나지요. 정오의 햇살아래 빛나는 가을 논도 좋지만, 햇살이 비끼는 시간, 특히 지는 가을 햇살을 환히 받은 벼는 탄성을 올릴 만큼 황홀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때면 지평선이 보이는 툭 터진 너른 들녘에 가고픈 충동을 느낍니다. 꾀꼬리 빛으로 익어가는 벼를 보다 문득 어린 시절 이만 때면 먹던 햅쌀밥의 잊을 수없는 맛이 떠올랐습니다.

 

-꾀꼬리빛으로 물드는 구만리뜰 -

돌아보면 그 시절엔 햅쌀밥을 먹는다는 자체가 감격이었습니다. 망종이 지나 햇보리가 나면서는 긴긴 여름 내내 쌀 한 톨 없는 꽁보리밥만으로 삽니다. 그러니 언제 쌀밥을 먹게 되나 햅쌀이 나오기를 고대했지요. 그러나 가을이 되고 벼가 익어도 금방 햅쌀밥을 먹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벼가 익으면 작은 배미의 벼를 베어옵니다. 베어온 벼를 훌태로 훑어서 몇 날을 멍석에 말려야 하고, 벼가 적당히 마르면 방앗간에 가서 방아를 찧어 와야 비로소 햅쌀밥을 지을 수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첫 햅쌀밥은 의례히 저녁상에 오르기 마련입니다.

 

- 햅쌀을 내려고 수확한 논 벼그루에 새싹이 파랐게 자랐다 -

어머니가 이 갓 찧어와 아직도 온기가 있는 수정 같은 햅쌀로 밥을 지어 저녁상에 올린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햅쌀밥은 희다 못해 약간 푸른 기가 돌았습니다. 어머니는 첫 햅쌀밥을 지을 때는 꼭 양념간장에 겉절이를 내셨습니다.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그 하얀 햅쌀밥의 빛깔이 우선 눈에 맛있고, 그 구수한 밥 냄새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윤기 나는 따끈한 햅쌀밥을 양념장에 비벼서 먹던 그 맛과 햇무를 숭숭 삐져 넣고 끓인 해콩으로 만든 청국장과 먹던 그 맛은 지금도 입에 침이 고이게 합니다.

 

햅쌀하면 우리 집에는 결코 잊지 못할 쓰라린 추억이 있습니다. 어느 해인지 풍년이었습니다. 아버님은 가끔 유난스러우실 때가 있으셨습니다. 그 아버님이 햅쌀을 마련하시려고 작은 배미의 잘된 벼를 한 짐을 베셨습니다. 힘이 장사이신 아버님의 짐은 보통 사람의 짐 곱절쯤 됩니다. 아버님은 그 벼 한 짐을 십리 길을 지고 집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마음 앞을 휘돌아 나가는 냇가로 가셔서 자갈밭에 그 벼를 살뜰히 너셨습니다.

 

- 흔히 황금들판이라지만 잘익은 벼는 꾀꼬리 빛이 난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참깨와 고추나 대추등을 하천 뚝(제방)에서 말렸는데, 아버님은 벼를 잘 말리시기 위해 유별나게 냇가 자갈밭에 널으셨던 겁니다. 그만큼 아버님이 벼를 소중히 여기셨던 거지요. 그런데 그 밤 잠든 사이에 가을장마가 졌습니다. 새벽에 나가보니 냇가 자갈밭에 넌 벼는 몽땅 물에 쓸려가고 하나도 남지 않습니다. 대경실색하셔서 유난을 떤다고 아버지를 탓하시던 어머님의 소리와 멍해진 아버님의 그 쓸쓸한 표정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 시절 쌀은 이런 대접을 받았던 겁니다.

 

지금이야 햅쌀로 밥을 지어먹어 봐도 햅쌀밥을 먹는다는 감격도 없고, 그 시절 그 맛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그렇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쌀이 귀하지 않아서 늘 쌀밥을 먹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 손으로 심고 가꾸고 거두는 수고와 기다림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시절 햅쌀밥의 맛은 햅쌀의 맛만이 아닌 기경의 수고와 거두는 보람의 맛, 기다림에서 오는 맛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수고와 보람, 기다림이 곧 행복이었던 겁니다.

 

- 멀리 하이닉스가 보인다. 도시화, 시설농가로 이젠 벼논만의 들판을 보기 어렵게 되었다-

 

쌀의 풍요가 햅쌀밥 맛을 잃게 한 것 같이 풍요로운 현대인들이 행복하지 못한 것은 귀하고 좋은 것들이 일상이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귀하고 좋은 것도 일상이 되어 버리면 감격과 감사를 모르게 됩니다. 풍요로움이 감격이라는 행복을 잃게 한 셈입니다. 일상적인 것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것, 내 손으로 수고하고 기다리는 것, 이것이 잃은 햅쌀밥 맛을 돌아오게 하고, 밥 맛이 나면 살 맛도 나지 않겠습니까?

 

크리스천들의 말씀의 맛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말씀에 주리고 목마름과 말씀의 양식을 먹으려는 수고와 기다림이 말씀을 마치 햅쌀 밥맛이 되게 할 것입니다. 이 가실, 천고마비의 계절에 말씀의 맛을 찾으면 밥맛도 나고, 밥맛 나니 살맛도 날 것입니다. 가을이 깊어 가는 꾀꼬리 빛 논을 보니 햅쌀밥 한 그릇으로 마냥 행복하던 시절이 그립고, 그 시절 호롱불 아래 먹던 첫 햅쌀밥 맛이 더욱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