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7,19주일
본문 : 잠21:2-3
말씀 : 라인권목사
평안들 하셨지요. 삼복더위 중에 한 주간 하나님의 평강이 넘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은 의가 하나님의 기쁨이요, 그 의를 구하고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사실 이 주제는 이번 강해의 뒷부분에서서 계획했던 것입니다만, 앞당긴 것은 우리나라의 사회적인 이슈들에 대하여 교회들이 하나님의 뜻을 밝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비 성경적이고 비기독교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향마저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치 기준이 혼돈된 정의의 춘추전국 시대
제가 이번 수도원에서 놀란 점이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분이 강론 중에 전에 외국에 나가보면 우리 한국이 잘 사는 나라이었는데, 지금은 한국이 중국을 닮아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중국 같은 공산주의 국가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제가 두 목사님과 한 방을 썼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은 백씨 되는 목사님과 함께 동성애 반대운동을 사역으로 삼은 분이신데, 이분은 이 정권이 “동성애전재주의”로 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 보수적인 교회들은 차별금지법이 청소년 가정을 타락시키며, 학문과 종교의 자유를 침해는 법이라고 반대서명운동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동성애는 분명히 성경이 정죄하는 간음죄입니다. 그래서 동성애 합법화를 반대하는 것은 이해 할 수 있지만, “동성애 전제주의”라는 말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작년에 조국장관을 두고는 100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서초동과 광화문에서 집회를 할 때에 이런 이슈들을 내세우며 우리 기독교인들이 성조기와 태극기를 들고 앞장을 섰습니다. 지금은 코로나 방역 때문에 예배를 제한하는 것을 두고도 이 정부가 교회를 해체하려고 하는 반 기독적인 집단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지난주는 박원순 시장의 조문과 장례방식을 두고 논란이 뜨거웠습니다. 그가 퀴어축제를 허가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고 올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지금 우리 사회와 교회는 말하자면 정의의 사도들로 넘쳐나고 있는 실정이라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섭니다. 누구나 정의의 사도 같다는 겁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 한국의 사회적 현상만이 아니라 세계적 현상입니다. 하바드대의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지요. 제가 그 책을 2011년도에 샀는데 그해까지 우리나라에서만 1판을 121쇄나 찍었습니다. “정의가 무엇이냐?”가 지금 세계적인 이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사회는 정의를 외치는 이들로, 정의의 사도 인 냥 하는 사람들도 가득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이 사회에 정의의 가치 기준이 혼돈상태라는 증거입니다. 한쪽에서 차별금지가 불의라고 하고, 한편은 정의라고 합니다. 한편은 시회복지가 정의이고, 한편은 사회주의 악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공의며 정의인지, 정의의 가치기준이 혼돈된 현상입니다. 말하자면 지금은 정의의 춘추전국시대입니다.
공의와 정의를 행함을 제사보다 기뻐하심
그러나 이렇게 우리 사회가 정의를 부르짖고, 정의의 사도들로 넘쳐나는 것 같은 현상은 긍정적으로는 보면 참 감사하고 바람직한 일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 땅에 정의의 사도들이 넘쳐나야 한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공의가 강같이 흐르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오늘 본문이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의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을 제사 드리는 것 보다 기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 같이 제사는 여호와종교의 근본입니다. 제사가 없으면 여호와의 종교는 없습니다. 예배가 이렇게 중요한 겁니다. 이 예배가 없으면 기독교는 없습니다. 이렇게 제사가 중요한데 이 제사보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을 제사보다 기뻐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는 무엇일까요? 오늘은 이 주제를 살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는 결국은 같은 뜻이지만 결이 다른 말입니다. 이 공의, "미슈파트"는 재판, 심판 통치를 뜻하는 말로 절대적 의이신 하나님의 공변된 다스림과 심판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이 하나님의 공의를 요구하실 때에 공의는 법적이며 공적인 사회적 덕목입니다. 그리고 정의란 “체다카” 옳다는 뜻으로 공적인 사회적 관계의 덕목이라고 정리됩니다. 즉 정의란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가 사회적 관계에서 공적으로 이루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의무를 개인적으로 이행하는 것을 “의”라고 하는 것이요, 우리 개인과 공적 사회적 관계에서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와 심판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요, 정의라는 것이지요.
이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와 심판이 이루어지는 곳을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의 첫 특성이 의입니다..(롬14:17) 천국은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의가 기반입니다. 이 의가 있을 때에 평강과 희락이 따라오는 겁니다. 천국에는 눈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계21:4) 천국에 왜 눈물이 없겠습니까? 8절과 27절이 보여주는 대로 죄악의 사람들이 유황불에 던져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억울함이 없어 서지요. 그곳은 불의를 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공정이 없어서 분한 일이 없기 때문에 눈물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 하나님의 공의가 강같이 흐르는 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를 통해서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소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공의 사회적 약자를 배려함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공의를 행하기를 요구하시는 우리 하나님의 취지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은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하는데 있습니다. 이의 성경의 대표적인 사례가 성경의 토지법과 안식년과 희년의 규례입니다. 안식년과 희년이 되면 빚을 탕감하고, 종에게 자유를 주고, 토지를 원 소유주에게 돌려주게 하셨지요.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이스라엘이 똑 같이 기업을 받아서 출발했지만, 사람은 능력의 차가 있고, 환경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경쟁에서 탈락해서 가난해지고, 파산에 이르게 됩니다. 이게 세상에는 항상 가난한 자가 있는 이유입니다. 이런 경제적 약자들에게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고 공평하게 경쟁할 수 있게 빚을 탕감하고, 자유를 주고, 토지를 돌려주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공평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토지를 당신 것을 규정해서 원칙적으로 매매를 금지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토지제도 토지 공 개념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공의, 정의입니다. 따라서 경제정의는 사회적 약자들이 경제적 불공평을 당하지 않게 사회적 배려를 받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공의요, 정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한 것임은 이스라엘이 망할 때에 선지자들이 꾸짖은 사회적 불의라는 죄가 입증합니다. 성경 두 군데만 보겠습니다. 사1:13에 성회와 함께 악을 행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사하며 무죄한 피를 흘리고,(15)사회적 약자를 학대하고 억울하게 한 것입니다.(17)약자들이 불공평을 당하지 않고 법적으로 억울함을 당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요 정의입니다. 사5:8에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이 땅 가운데 홀로 거주하려는 자들은-이는 부동산투기를 말합니다. 가진 사람들이 안식법을 지키지 않고 도리어 자본으로 모든 토지를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아닌 토지로 살려고 한 것입니다. 토지를 섬기는 것이 바알 숭배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동산 투기를 이세벨주의, 바알주의라고 합니다. 이 불의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포로 되게 하신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는 사회적 약자를 배려한 것입니다. 사실 법 철학에서 법은 강한 자가 아닌 약자를 고려한 것입니다. 약육강식의 밀림이 되지 않게 하려는데 법 정신이 있습니다. 강한 자들, 있는 자들은 자기 권리를 지키기 때문에, 자기 권리마저도 지킬 수 없는 사회적 약자를 배려토록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서양의 기사도와 신사도가 나왔습니다. 이것을 정의라고 하는 겁니다. 자기 권리를 지킬 수 없는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이 존중 되면 그 사회의 인권은 온전한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이 존중되는 사회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이지요, 따라서 율법의 요구는 법은 만인이 공정하고, 경제는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여 특혜를 주게 한 것입니다. 복지사회가 정의요, 토지 공 개념이 성경적이고, 기독교적입니다. 그러므로 부동산 투기 억제하여 집 없는 이들을 배려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인 줄로 믿습니다.
공의는 사랑의 원리에서 나오는 행동
따라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는 그 근본이 사랑이며, 이 사랑의 원리에서 나오는 행동이 공의와 정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하면 법에 따라서 반드시 벌을 받게 하는 법적인 엄격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아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공의는 율법적이고, 무자비한 것이며, 사랑에 반하고 비 복음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완전히 오해한 것입니다. 오히려 공의는 사랑의 원리에서 나오는 행동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사회적 약자를 배려해서 빗을 탕감하고, 토지를 돌려주는 것, 가난한 자와 과부와 고아 나그네들이 억울함을 당하지 않게 하고, 구제하는 것은 긍휼이 여기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의는 사랑에서 나오는 행동이기 때문에 사회적 불의를 행하는 선민에게 “나는 제사보다 인애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호6:6)가난한 자의 판결을 굽게 하는 것, 사회적 약자들을 착취하고, 학대하는 것은 그 마음에 사람에 대한 인애와 긍휼이 없어서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정의의 사도인냥 정죄하기에 바쁜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하신 뜻입니다.(마9:13) 그렇습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다고 했습니다.(고전13:5,6)사람을 사랑하면 그 사람에게 악을 행하지 않고 착한 일을 합니다. 이 사랑의 원리에서 나오는 행동을 공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공의는 사랑의 행동이요, 사람을 보호하고, 살리는 것이 공의입니다. 우리가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천국의 삶의 방식이 사랑
그러면 우리 하나님은 왜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의 원리에서 약자를 배려하기를 원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사랑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천국인 것은 천국은 자기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행복을 섬기는 사랑의 방법으로 사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천국의 삶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참 사람이요, 참 사람들의 생존 방식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천국이 이 세상나라와 같이 생존경쟁으로 적자 생존하는 곳이라면 이 세상나라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본디 천국은 은혜라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그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의 빚이 있기 때문에 서로 불쌍히 여기고 긍휼을 나타내야 합니다. 천국은 노고라는 생존경쟁이 아닌 은혜와 축복으로 사는 곳입니다. 그러니 생존경쟁에서 탈락한 약자들에게 경제적 배려를 해야 합니다. 천국은 자기를 위해서 사는 이기적인 나라가 아닌 봉사의 나라이기 때문에 어렵고 약한 사람을 돌보아야 합니다. 천국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방식으로 살기 때문에 이웃을 억울하게 하거나 불의를 행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가정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형제로 대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의 원리를 행동하는 것이 공의입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으면 공의와 정의는 따라 오는 것입니다. 이게 천국이요, 천국백성들의 삶이요, 삶의 수준이며, 사회적 수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실정
그런데 이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이 망할 때 이스라엘은 어떤 실정이었습니까? 위에서 본대로 제사하며 성회와 함께 악을 행했습니다. 그 악이 무죄한 피를 흘리고,(사1:15)사회적 약자를 학대하고 억울하게 한 것입니다.(17) 마치 이 세상에서 자기 혼자 살 것 같이, 아니 온 세상을 자기것으로 만들려는 듯, 가옥에 가옥을 연하고 토지에 토지를 연하는 부동산 투기로(사5:8) 가난한 자를 삼키고, 힘없는 자를 망하게 했습니다.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 찌꺼기 밀을 팔았습니다.(암8:4,6) 이렇게 강포와 불의를 행하며 무수한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호6:6) 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인 마태를 제자로 삼고 마태의 집에서 세리들과 함께 먹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불의한 자들과 함께 하는 것은 공의롭지 못하고 불의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때 주님이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하셨습니다.(마9:13)무슨 말입니까? 바리새인들은 공의를 가혹하게 죄를 정죄하고 심판하고 벌주는 것만으로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공의가 사랑에서 나오는 행동임을 몰랐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사람을 긍휼이 여기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겁니다. ‘세리와 죄인과 함께 잡수신다,’ 이 말을 듣는 세리들의 마음이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인애가 없는 공의는 공의가 아닌 폭력입니다. 이 마음 이 행위는 하나님 성, 천국성이 아닌 사탄성이지요.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를 행함을 제사보다 기뻐하시고, 제사보다 인애를 원하십니다.
우리 사회에서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하는 은혜로 가족여러분 지금 우리가 이 기준을 우리 사회와 교회에 적용하면 무엇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의와 정의인지 분명해집니다. 국정원과 기무사가 선거에 개입한 것을 수사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 정부가 고위권력기관이 이런 불의를 하지 못하게 공수처를 만들어 검찰과 사법을 개혁하는 것은 불의입니까?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복지정책은 사회주의 공산당입니까? 평화 통일을 위해서 북한 동포에게 형제애로 퍼주는 것은 불의입니까? 공정한 거래와 경쟁을 위해서 재벌을 개혁하는 것은 사회주의입니까? 지금 이슈인 차별금지법, 동성애를 성적 취향이라고 한 것은 죄를 죄라고 하지 않고, 동성애를 합법화 시킨 불의입니다. 죄를 죄라고 하지 않고 취향이라고 한 것은 마치 독약을 약이라고 하거나 드링크제라고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동성애자라고 직업이나 사회에서 차별하는 것은 비 인간적인 것이지요.
한 사람이 평생을 공정한 시민사회를 위해서 바치다가 성추행으로 이 세상을 스스로 떠났습니다. 이 사람의 죄는 죄라고 해야 정의입니다. 그러나 그 정죄는 무엇에서 나와야 하나님의 공의요 정의 입니까? 긍휼에서 나와야 하지요? 사랑에서 나온다면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망친 죄를 미워할 것입니다. 죄가 한 사람, 한 인생을 망친 것을 안타가워 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같이 나도 그렇게 넘어질까 두려워할 것입니다. 이게 기독교적이며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런데 마치 그 사람이 죄를 짓고 망하기를 기다린 것 같이, 그 사람의 범죄와 망함을 기뻐하는 것은 공의 입니까? 불의입니까? 그게 사랑에서 나오는 행동입니까? 이런 위선을 주님은 "제 눈의 들보"라고 하셨습니다. 남이 안 되고 망하는 것을 은근히 원하고 즐기는 것이 "제 눈의 들보"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위선과 공의를 잘 대조합니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 자기 보기에는 자기 행위가 정직한 것- 공의 정의- 같지만, 정의를 주장하며 폭력을 행하는 건 사욕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로 정의를 외치지만 실은 자기 이득이라는 이기적인 동기를 가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마음을 감찰 하십니다. 하나님은 속이지 못합니다. 우리가 동성애를 정죄하고 반대하는 것도 이 사랑과 긍휼에서 나와야 합니다. 이 긍휼이 없으면 폭력이요, 불의입니다. 비 인격적으로 정의의 사도인냥 하는 것은 이기적인 동기와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제 눈의 들보입니다. 이게 지금 우리의 실정입니다. 이런 우리 교회를 보시며 우리 하나님이 제사보다 인애를 하시고, 공의를 기뻐하신다고 한탄하고 탄식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이 하나님이 탄식, 한탄이 들리시지 않습니까? 이 하나님의 열망을 모르고 사회적 의에 무심한 이 비정함을 회개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줄로 믿습니다.
은혜로 가족 여러분! 이렇게 지금은 정의의 가치가 혼돈된 정의의 전국춘추시대이지만, 오늘 우리 하나님께서 이 말씀으로 오셔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공의와 정의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붙잡게 하셨습니다. 이 기준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분별합시다. 이 기준으로 이 혼돈의 땅을 밝히는 등불이 됩시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이 마음으로 사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요, 하나님을 닮는 내 의, 내 구원이 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하나님의 기쁨이요, 제사보다 기뻐하셔서, 우리 조국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와 심판이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는 복을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