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7,27, 주일
본문 : 욥33:1-33
말씀 : 라인권목사
더위가 해마다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습니다. 이게 온난화의 현상임을 다 아는 사실이지만, 미국과 지난 정부에서는 온난화에 역행을 했습니다. 존 스토트는 환경을 보존하는 것이 제자도의 하나라고 했습니다. 주께서 이 폭염에도 그늘이 되어 주시고, 우리 교회가 환경에 대한 의식을 깨우는 교회가 되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설익은 메신저 엘리후의 첫 연설로 욥의 고난에 대한 엘리후의 해석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의 고난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욥이 반발해서 형벌이 아니라고 자기를 의롭다고 반박했지만, 세 친구들은 답변을 못 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엘리후가 자기에게 정답이 있다는 듯이, “내 말을 들으며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로 욥의 고난을 해석하는 일장의 연설을 합니다. 엘리후는 이 작업을 욥의 문제를 진단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엘리후는 욥의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 냈습니다.
엘리후가 진단한 욥의 문제
첫째,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의롭게 여기는 죄를 정확하게 짚어 냈습니다. (9) “이르기를 나는 깨끗하여 악인이 아니며 순전하고 불의도 없다 하거늘” 이것은 자기 의가 무엇인지의 사전적 정의와 같습니다. 이 말은 자신이 하나님께 대한 모든 의무를 다 수행했다는 뜻입니다. 마치 부부가 다툴 때에 내가 당신에게 할 만큼 했다는 것 같이 자신이 하나님께 대한 도리를 다했다는 것이 자기 의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 수행했는 건, 인간이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하나님께 대한 도리를 다 할 수 있는 뜻입니다. 이 사상이 은혜를 대적한 펠라기안 주의의 핵심입니다. 엘리후는 이 교만이 욥의 죄라고 한 겁니다.
이게 죄라는 것을 증거하는 말씀이 12절의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첫째, 욥 네 말대로 네가 무죄하고 의롭다는 걸 인정해도, 그걸 하나님 앞에 자랑할 수 없음은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의는 하나님 앞에서는 정오의 햇빛 아래 촛불 같고 더러운 옷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주권자시니 의로운 욥에게도 재앙을 내리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피조물 인간이 가타부타할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오, 인간은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결정적으로 욥이 자기 의를 주장하면 하나님을 무죄한 자를 벌하는 불의한 하나님이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욥은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불의하게 만들고 자기를 하나님보다 더 의롭게 여긴 겁니다. 이게 자기 의라는 죄입니다. 이 자기 의가 하나님의 은혜를 부인하고 받지 못하게 하여 인간을 하나님의 구원에서 떨어지게 하는 결정적인 죄악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세웁시다. 그러면 내 안에 고착된 이 자기 의라는 무서운 죄를 인식하게 되고, 이 죄를 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둘째, 엘리후는 고난으로 인한 욥의 고통과 마음의 시험을 정확하게 짚어 냈습니다. (10-11) 나는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충분히 했는데, 하나님은 이런 내게 왜 재앙을 주셨나? 이것은 필시 하나님께서 내게 악의를 가지셔서, 벌주시는 것을 즐기시려고, 내가 어렸을 때 참외 설외 한 죄까지 찾아내시고, 나를 원수처럼 대하신다고 했다는 겁니다. 이건 지금까지 욥이 자기가 받는 재앙은 형벌이 아니라고 강변해 왔지만, 그 마음으로는 하나님께 벌을 받고 있다고 여긴 겁니다. 이게 시험이 되어서 "원수 같은 하나님"이라는 있지도 않은 망상의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고민하고 고통하고 있다는 겁니다. 고난의 깊은 자리에 있어 본 이는 다 이 말에 공감할 겁니다. 욥처럼 있지도 않은 망상의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고통했기 때문입니다.
셋째, 엘리후는 하나님의 침묵으로 인한 욥의 당혹과 고통을 정확하게 짚어냈습니다. 정죄하는 친구들에게 하나님께서 자기가 무죄하다고 말씀해 주시면 끝나는데, 다 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잠잠하시기만 합니다. 그래서 의로운 내게 왜 재앙을 주시냐고, 자기 입에 변백할 말을 채우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변백 하고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대답하시지 않고 침묵하십니다. 이게 욥의 당혹이요, 고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죽이실 것을 안다고 낙심한 겁니다. 고난의 깊은 자리에 있어 본 분들은 이게 욥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이야기고 자기 심정임에 공감하실 겁니다.
이 부분을 정리하면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의롭게 여기는 이 교만이라는 죄가 그 마음에 고착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욥에게 재앙을 주셨다는 겁니다. 죄 때문에 재앙을 받았다는 건 욥의 친구들과 동일합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이 재앙을 세 친구들과 같이 형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욥의 교만을 고쳐 주는 하나님의 선한 뜻과 목적이 있는 고난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엘리후는 욥의 고난에 어떤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있다고 합니까?
욥의 고난에 대한 엘리후의 해석
첫째, 엘리후는 욥의 고난과 고통은 욥의 마음에 고착된 교만이라는 죄를 경고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14) 하나님은 꿈과 환상으로 말씀하십니다. 꿈은 내적인 압력의 결과입니다. 고난과 고통은 경고로 두렵게 하고, 악한 행실을 버리게 하며,(16,17) 교만을 막고 죽음과 멸망의 구덩이를 피하게 하는 하나님의 경고라는 겁니다.(18.19) 즉 욥 당신이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고통스러워하고 낙심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교만을 경고하시려고 고통으로 거듭거듭 말씀하시고 있는데, 욥 당신이 관심이 없어서 듣지 못하면서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괴로워하고 낙심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CS루이스가 고통은 하나님의 확성기 라고 한 겁니다.
그렇습니다. 욥처럼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의 치명적인 대적은 자기를 의롭게 여기는 교만입니다. 욥은 교만한 성자지만, 자기가 교만한 걸 모르는 것 같이 우리가 경건하고 의로울수록 자기를 의롭게 아는 교만이 빠집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의 대적 교만의 위험을 아십니다. 이 죄에 빠지지 않게, 이교만을 깨닫고 버리도록 재앙과 고통으로 경고해 주신 겁니다. 그러나 타이태닉호가 부몰선이기 때문에 빙산의 경고를 무시했듯이 경건해서 교만을 모르고 사건과 환경으로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 망합니다. 이게 자기 의의 치명성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에서 하나님 경고를 듣는 복 된 귀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엘리후는 욥의 고난과 고통은 하나님의 징계이자 연단이며 훈련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엘리후는 사람의 병과 병상의 고통을 하나님의 징계라고 합니다.(19) 엘리후가 여기서 뼈를 쑤시는 병과 그 고통을 나열하는 것은 30:16,17, 30,31절의 욥의 말을 복창한 것과 같습니다. 욥의 병과 그 병의 고통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징계라는 것은 욥이 재앙을 받은 순서가 입증입니다. 하나님은 욥의 자기 의라는 교만을 죽여주시려고, 먼저 욥의 재물과 자녀를 치게 하셨습니다. 이 재앙은 욥의 교만을 경고하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욥은 이 경고를 듣고 자기 의를 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배로 자기 의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징계로 욥의 건강을 치게 하셨습니다. 욥의 고통이 하나님의 징계, 즉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겁니다.
이게 욥의 세 친구들과 엘리후의 차이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 너 죄가 있어서 하나님께 재앙을 받았다’고 정죄하므로 욥에게 굴욕을 주어서 욥을 회개시키려 했습니다. 그런데 엘리후는 욥이 받은 재앙과 욥의 병과 그 고통 자체가 욥을 회개시키는 말씀이요, 하나님의 징계라고 한 겁니다. 징계는 당신의 백성을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원의 완전한 축복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발로한 은혜라는 것이 엘리후의 해석입니다. 엘리후가 욥에게 이걸 가르친 겁니다. 고통은 당신의 교만을 깨닫게 하여 회개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겁니다, 이제 남은 일은 회개입니다. 그래서 엘리후는 이 욥의 고난의 문제에 회개라는 처방을 내립니다.
엘리후의 회개라는 처방
이걸 말씀하는 것이 23,24절입니다. 위에서 말한 대로 욥이 깨닫지 못한 채로 무덤 직전에 이릅니다. 여기서 회개해야 하는데 사람이 깨닫고 회개하려면 사람의 힘이 아니라, 초인적인 존재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죽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일천 천사 중의 하나를 해석자로 보내서 그 사람에게 마음을 바로잡으라고, 마땅히 할 일을 일러 주시는 자비를 베풀어서 무덤에 들어가지 않게 하여라, 내가 속전 대속물을 받았다고 말씀해 주시면 하나님께 기도-회개-하면 하나님은 회개한 욥에게 청년 같은 건강을 축복하시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하시고 영혼을 멸망의 구덩이에서 끌어내고 생명의 빛이 빛 추게 하신다고 찬란하게 회개의 축복으로 회개를 격려했습니다.
이 마땅히 할 일, 속전, 대속물이 회개입니다. 회개라는 속전 대속물을 내야 구원에 이르게 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이루는 축복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과 자녀들을 이렇게 만드시고, 이 사람 만드시려고 하나님 재삼 꿈으로 고통으로도 병으로도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이 고난에 대한 엘리후의 해석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고난은 위장된 하나님의 은혜” 라는 겁니다. CS 루이스 <고통의 문제>에서 “고통은 위장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해서, 고난은 축복이다, 고난은 위장된 축복이다, 이렇게 전해졌지만, 고통이 은혜라는 말의 저작권은 이 설익은 메신저 엘리후에게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엘리후는 의기양양해서 자부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다시 내 말을 귀담아들으라 듣고 잠잠하라 내가 지혜로 가르치다는 말로 첫 연설을 끝냈습니다.
이 29-33과 1-7은 엘리후가 하지 말아야 했을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메신저의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메신저는 오직 하나님과 그 메시지만 드러나게 자기는 감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고난이 “위장된 하나님의 은혜”라는 이 엘리후의 메시지는 고난의 한가운데 있는 이들의 한 줄기 빛입니다. 자기 의가 하나님의 은혜를 대적하는 하나님께 대한 교만한 죄요, 고통은 그 교만을 경고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교만을 깨주시는 하나님의 위장된 은혜라는 이 엘리후의 말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는 애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하신 예수님도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 예수님처럼 되게 하시려고 지금도 거듭거듭 우리에게 고통으로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 이 하나님의 위장된 은혜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귀가되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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