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강해

욥의 절망과 항변 불신의 표출인가?

아브라함-la 2025. 8. 15. 11:58

024,9,29, 주일

본문 : 욥7:11-21

말씀 : 라인권목사

 

평강입니다. 구월이 가고 시월이 오는 주간입니다. 등화가친, 천고마비의 계절에 성경을 가까이하여 더위로 야윈 영육을 윤택하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지난 시간에 고난의 한가운데 있는 욥의 심정을 살펴보았습니다. 고난의 한가운데 있는 욥은 자기를 품꾼과 같이 내일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자기 연민에 빠져서 자기 생명을 싫어했습니다. 심지어 성도들의 무상의 감격인 하나님의 관심도 견딜 수 없는 영혼의 고통이라며 제발 자기를 놓아달라고 했습니다. 이런 회의, 낙심과 절망, 불평과 원망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욥의 절망과 항변 불신앙의 표출?

고난에 약한 것이 사람입니다. 내 인생의 날이 고난으로 비창하게 되었을 때, 신앙 양심을 따라서 살기를 힘쓰는데도 욥의 고난과 같은 이해 못 할 고난에 직면했을 때 회의에 빠지고, 절망하고, 하나님 앞에 원망하고 항변해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여기에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절망과 항변이 불신앙의 표출이 아니냐는 겁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욥의 이런 절망과 항변은 불신앙의 표출이 아니라, 신앙의 표출이라는 겁니다. 본문의 욥의 절망과 하나님께 대한 불평과 항변이 신앙이라는 증거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상대로 말함

그 첫째 증거가 욥이 이 고통과 절망과 항의를 하나님을 상대로 하나님께 쏟아 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1-10은 답변이나 독백 형식입니다. 독백이지만 상대가 친구들입니다, 그러나 11-21까지는 상대가 사람이 아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제발 자기를 놓아 달라고 항변하고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이게 믿음의 증거입니다. 절망한 것 같아도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가고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 겁니다. 이렇게 믿음은 낙심될 때도 하나님께 향하고, 하나님께 말하는 것입니다, 고통의 한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이 자기 길을 막는 것 같을 때,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신 것 같은 처지가 되었을 때도 믿음은 절망도 하나님 앞에서 하고, 불평과 항의도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 겁니다.

 

그리고 믿음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호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이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내버려 달라는 것은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불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속히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호소입니다, 이렇게 욥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항의하는 건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믿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그가 나를 죽이실 자라도 나는 그를 신뢰하리라”(욥13:15)라는 고백이 나오게 했습니다, 이게 다윗의 신앙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노라.”(삼하24:14) 맞아도 사람이 아닌 자비하신 하나님의 손에 맞겠다는 겁니다. 이렇게 믿음은 하나님께 버림받고 하나님께 맞으면서도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고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입술이 믿음이라고 합니다. 구원받는 믿음도 입술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릅니다. (롬10:10) 이걸 호세야는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린다고 하셨습니다. (호14:2) 결국 신앙은 하나님 앞에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상대로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 회의와 의심과 싸우는 영혼의 부르짖음이요, 영혼의 투쟁입니다. 욥이 이 입술로 회의와 의심의 구름을 헤치고 확신과 소망에 이르고 그리스도께 이르게 했다는 것이 욥기의 메시지입니다.

 

영적 실제가 있는 사람만 아는 영혼의 고통

두 번째 증거는 욥의 고통은 신앙적이고, 영적 실제가 있는 사람만이 아는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욥이 생일 저주한 것은 자기가 하나님께 외면당하고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느낌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은 이 고통을 “내 영혼의 아픔”이라고 했습니다,(11) 하나님께 버림 당한 이 영혼의 아픔을 견딜 수가 없어서 왜 이런 나를 외면하시냐고 항의한 겁니다. 즉 고난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회의를 일게 했습니다. 욥은 이 회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왜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시고 독화살로 쏘시는지 그걸 알려 달라고 하나님께 항변하는 겁니다.

 

이게 선지자 예례미야가 이 영혼의 고통 때문에 절망해서 생일을 저주했습니다. (렘20:14-18)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비리셨나이까” 이게 다윗의 고통 이자(시 22:1)십자가에서 예수님의 고뇌요 고통이셨습니다. (마27:46) 이렇게 하나님께 버림받은 영혼의 고통을 아는 것은 깊은 신앙입니다. 이 영혼의 고통과 회의 없이 확신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 고통과 눈물의 밤을 모르는 하나님을 깊이 아는 아침 해를 볼 수가 없습니다. 이 영혼의 고통과 이 회의를 아는 사람이라야, 귀로 듣기만 하던 주를 눈으로 뵙는 신앙에 이릅니다.(욥42:5) 이 영혼의 아픔과 회의를 아십니까? 하나님께 외면당함을 견딜 수 없는 영혼의 고통을 아는 이 영적 실재가 있는 신앙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불신앙의 절망과 다른 신앙의 절망

세 번째. 증거가 욥의 절망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의 절망과 다른 절망이라는 겁니다. 욥이 생일을 저주하고 죽기를 갈망한 건 분명 절망입니다. 그러나 이 욥의 절망은 하나님이 없는 사람의 절망과 다른 겁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입맞춤으로 팔아넘기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자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만약 욥이 가룟 유다와 같이 절망했다면, 욥의 아내의 말과 같이 욥은 하나님을 욕하고 죽었을 겁니다, 욥이 이렇게 했다면 사탄의 계획대로 된 겁니다, 그러나 욥은 불평과 원망은 해도 하나님을 욕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욥의 절망은 가룟 유다의 절망 같은 불신앙의 절망이 아닙니다.

 

그러면 욥의 절망은 어떤 절망입니다. 이 욥의 절망을 알게 하는 것이 선지자 예레미야의 고통과 절망입니다. 애3:8-10은 하나님은 내 기도를 물리치고, 다듬은 돌로 내 길을 막으시고, 내게 대하여 엎드려 기다리는 곰과 은밀한 곳에 있는 사자 같으시다고 합니다. 이게 죄책을 느끼게 하고, 이 죄책 때문에 낙심했다고 했습니다.(애3:20) 그러나 그것-하나님의 진노, 징치-을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다고 했습니다.(21)그것이 하나님께서 언약에 신실하시다는 증거요, 그것이 주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즉 예레미야의 좌절과 절망은 이 구원의 하나님에 이르는 신앙의 영혼의 투쟁이라는 겁니다. 이 영혼의 투쟁 끝에 예레미야는 낙심과 절망에서 확신과 소망으로 찬란하게 살아나던 겁니다.

 

왜 이렇게 됩니까? 욥의 절망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수용하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생명과 은혜의 원천이신 주권자 하나님이 외면하신다면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수용하는 겁니다. 이걸 인정하고 받아들인 절망은 불신앙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은혜의 얼굴로 대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고 하면 그건 하나님을 모르는 거요, 신앙도 아니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다, 이걸 인정하고, 받아드린 겁니다. 나는 하나님 없으면 죽는다는 겁니다. 나는 하나님 없으면 안 된다는 거지요. 우리가 이 하나님을 인정할 때에 결국은 예례미야와 같이 하나님의 무궁한 자비를 보게 되는 겁니다. 이게 시편이 슬픔과 절망으로 시작하지만, 의심의 구름을 꿇고 확신과 찬송으로 마치는 이유입니다.(시 13:1,2,5,6)

 

따라서 욥의 절망은 믿음으로 살아도 온 고난으로 야기된 하나님에 대한 회의와 의심의 구름을 헤치고 신앙에 이르는 영혼의 투쟁이었던 겁니다. 이 믿음의 절망이 욥처럼 회의와 의심의 구름을 헤치고, 그리스도에게 이르고 주를 눈으로 보는 신앙에 이르게 할 줄로 믿습니다. 괴테가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본 적이 없는 이, 슬픔의 밤을 침상에서 울며 지새운 적이 없는 자는 당신을 알지 못한 다고 했듯, 인간의 고난과 영혼의 고통과 절망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이는 현재적 구원의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환난 날에 돌베개 베고 눈물의 밤을 보낸 이라야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으로 깊이 알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려고 구원받은 우리를 고통하는 이 모순된 세상에 두신 것이 아니겠습니다.

 

하나님께 토로하는 실제적 유익

그리고 욥이 하나님 앞에서 항의한 것의 실제적인 유익을 배워야 합니다. 11-21에서 욥은 자기의 불평과 고통과 영혼의 부르짖음을 숨김없이 적나라하게 토로합니다. 이게 마음의 눌림을 풀어줍니다. 카타르시스가 됩니다. 정서적 안식을 가져옵니다. 이걸 다른 말로 기도라고 하지요. 하나님 앞에서는 기도로 내 심정으로 그대로 다 토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못 할 말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보일 수 없는 내 속을 하나님 앞에 열 수 있습니다. 사람 앞에 열 수 없는 내 심사를 하나님께 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이든지 원하는 데로 구하라고 하신 것이 이런 면도 있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가 위로이고 안식이며 치유가 되는 겁니다. 이게 제가 죽지 않고 살아난 비결입니다. 저는 환난 중에 외로운 참새 같았습니다. 아는 사람들에게 낯선 외인처럼 되었을 때 이렇게 하나님 앞에 토로하여 죽은 자 같이 들어가서 아침 이슬 같이, 불사조 같이 살아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으로 우리의 영혼이 절망하여 회의와 의심의 구름이 쌓일 때 하나님 앞에서 기도로 투쟁해 나갑시다. 의심의 구름에서 벗어나 귀로 듣던 믿음에서 눈으로 보는 데에 이른 믿음은 자동적으로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절망과 회의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는 이 영혼의 투쟁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려고 구원받은 우리를 이 모순된 세상에 두신 것이 아니겠습니다. 이 모순된 세상에서 우리 영혼이 낙심되고 절망하여 회의와 의심의 구름이 덮어 올 때 오트만처럼 기도로 투쟁해 나갑시다. 이 영혼의 싸움으로 하나님을 계신 그대로 만나고 아는 믿음에 이르시기를 축복합니다.

 

험하고 높은 이 길을 싸우며 나아갑니다.

다시금 기도하오니 내 주여 인도합소서,,

내 주여 내 발 붙드사 그곳에 서게 하소서.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