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8,10, 주일
본문 : 욥35:1-16
말씀 : 라인권목사
기도는 신앙 그 자체입니다. 기도가 바르면 그 신앙이 바르고, 기도가 바르지 못하면 그 신앙이 바르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도는 신앙의 시금석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만약에 ‘당신의 기도는 응답 받을 수 없는 헛된 기도이다’. 라고 한다면 그 말은 당신의 신앙이 진실하지 못하다는 말이 됩니다. 이런 면에서 본문의 엘리후의 세 번째 강화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했다고 자부하는 욥에게는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을 겁니다.
욥이 응답받지 못한 것에 대한 엘리후의 분석
왜냐면 이 엘리후의 셋째 강화는 욥이 전심을 다해서 섬겨온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고난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고통 중에서 부르짖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신다는 욥의 말을 분석하여 욥 당신의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것은 당신의 신앙이 진실하지 못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도에 응답치 않으신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엘리후의 이 말은 욥이 지금까지 들었던 어떤 말보다도 욥의 가슴을 후볐을 겁니다. 이게 다윗의 고통이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호소하신 고통입니다. (시22:1-5)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 같은 저주는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 없이 살 수 없는 우리는 이 엘리후의 말을 경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엘리후가 분석한 욥의 기도가 응답 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공로주의에 빠져서
첫째 욥의 기도가 응답 되지 않는 것은 욥의 공로주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공로주의가 무엇입니까? 공로주의 기반은 자기 의입니다. 자기 의는 사람이 하나님께 대한 모든 의무를 완수 한 것으로 아는 겁니다. 이게 자기를 하나님께 내세울 공적이 있는 사람인 양 자처하게 합니다. 이게 공로 주의입니다. 이 공로주의는 신앙의 상극입니다. 공로주의는 자기를 하나님 덕으로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을 자기 덕을 보는 이로 만드는 겁니다, 자기를 수은자가 아니라, 시은자로 알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연히 자기에게 잘해 주셔야 할 의무가 있다고 여겨서 청구권이 있는 것 같은 태도를 가지게 합니다. 이렇게 공로주의는 은혜를 대가, 즉 행위로 만들고, 당연한 것으로 만듭니다. 이것은 완전히 반기독교적인 겁니다.
엘리후는 욥이 이 공로주의에 빠졌다는 겁니다. 욥 당신은 하나님께서 경건한 내게 고통을 주셔서 하나님 앞에 의롭고 경건하게 산 것이 소용이 없고, 유익이 없다고 하는데, (2-3) 이것은 당신이 하나님을 알기를 당신이 죄를 범하면 하나님이 손해를 보시고, 당신이 의로우면 하나님이 득을 보시는 것 같이 알았다는 겁니다. (5-7) 그러나 자아충족 하시는 자존자이신 하나님이라서 가장 사악한 자가 하나님을 해롭게 할 목적으로 악을 행해도 손해 보시지 않고, 가장 헌신적인 신자가 하나님을 이롭게 하려고 열정적으로 선을 행해도 하나님이 득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행하는 사람 자신만을 해하거나 이롭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즉 욥 당신은 하나님께 공적이 있으므로 하나님께 당연히 주셔야 한다는 태도를 가져서 은혜를 대가로 만들고 있으므로 하나님이 고통 중에 부르짖는 당신의 기도를 상대하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왜 기도에 낙심합니까? 그것은 응답을 은혜가 아니라 내 신행에 대한 보상과 대가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응답하실 것으로 알았는데 응답이 없으니 낙심하는 겁니다. 공로 주의는 이렇게 응답을 은혜가 아닌 대가, 행위로 만듭니다. 이것이 우리 기도가 금 대접에 담기지 못하고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자는 자기를 하나님께 공로가 있는 자가 아니라 수로보게니 여자처럼 자비와 은총으로만 받을 수 있는 자로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주여 옳소이다 만은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15:27)라고 확신과 소망으로 간구하여 들으심을 받는 기도자가 될 줄로 믿습니다.
신앙의 동기가 순수하지 못해서
둘째, 욥의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건 욥의 신앙의 동기가 순수하지 못해서라는 것입니다. 엘리후는 욥의 신앙의 동기가 순수치 못한 걸 기도에 낙심한 것에서 찾습니다. 욥 당신이 고통 중에 부르짖는 자기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고 하나님이 나를 죽이실 줄 알았다고 낙심한 것은 당신 신앙의 동기가 보상이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욥30:20,21,23) 그리고 욥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를 주장하는 것은 보상이라는 동기와 목적에서 하나님을 경외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를 재앙이 아니라 하나님께 당연히 복을 받을 사람으로 알았다는 거지요,
이 엘리후의 말은 사탄이 욥을 참소한 말과 동일한 말입니다.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축복에 있다며 그 축복을 거두면 하나님을 욕할 것이라고 했습니다.(욥1:11) 이런 신앙을 일컬어 상업적이라고 합니다. 신앙이 거래입니다. 받으면 기쁘고, 받지 못하면 고통이 되는 겁니다. 엘리후는 욥의 신앙의 동기가 이렇게 상업적인 천박한 신앙이어서 중심을 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욥의 기도를 상대하지 않으시고 그 기도를 쓰레기 취급하신다는 겁니다. 이 엘리후의 분석이 옳다면 욥의 기도는 응답받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참된 신앙은 보상이 동기가 아니라, 하나님 자체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시는 하나님의 복되심과 그 영광을 사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뼈가 떨리는 환난의 소식 앞에서도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이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 18)라고 찬송했습니다. 하나님을 기뻐했습니다. 이게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요체입니다. 기도는 먼저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게 참 신앙입니다. 이 신앙의 기도를 하나님이 상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사모함으로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하시는 기도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진지하게 기도하지 않아서
셋째, 욥이 응답받지 못함은 그가 진지하게 기도하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학대가 많으므로 부르짖는다고 합니다.(9) 즉 고통은 기도하게 한다는 겁니다. 고통과 위기는 무신자도 본성적으로 기도하게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 고통에서 진지하게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려고 진지하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으로 기도한다는 겁니다. 욥 당신은 고난이라는 밤을 주셔서 하나님을 찾게 하시고, 그 고난의 밤에 구원의 하나님을 만나서 고난의 한밤중에 찬송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진지하게 찾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10) 야생 짐승들이 부르짖는 것 같이(시 104:9) 기계적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1)
그렇습니다. 신앙은 인생의 고통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진지하게 찾는 겁니다. 그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려고 진지하게 기도하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통에서 본능적으로 기도하고, 기독교 미신적으로 기도합니다. 확신과 소망이 없이 중언부언하는 겉치레로 기도합니다. 살아계신 인격이신 하나님은 이런 기도로 만홀히 여김 당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기도는 금 대접이 아닌 쓰레기통에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일이 있으면 진지하게 인생을 걸고 기도합시다. 이것이 우리 기도가 쓰레기통이 아니라, 금 대접에 담기는 향기로운 기도가 되게 할 줄로 믿습니다.
은혜로 가족 여러분! 우리 기도가 금 대접에 담기지 못하는 건 하나님께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 신앙에 문제가 있어섭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인격이십니다. 우리는 자동판매기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인격이신 하나님께 나가는 겁니다. 지금 엘리후는 이걸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기도자가 됩시다. 이때에 우리는 수로보게니 여자 같이 오롯이 은혜에만 의존하고 겸손과 확신과 소망으로 기도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살아계신 인격이신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 인격이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처럼 기도하고, 예수님같이 되기를 기도하게 할 줄로 믿습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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