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8, 24, 주일
본문 : 욥36:1-23
말씀 : 라인권목사
어제가 더위가 가시는 처서였습니다. 더위는 여전하나 이제 곧 춥다고 하는 날이 올 겁니다. 세월을 구원하라는 말씀을 가슴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본문은 엘리후의 네 번째 강화의 첫 부분으로 하나님께서 욥에게 재앙을 주신 것이 하나님이 불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우심 때문이라고 하나님의 정의를 편들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 자체는 진리이지만 여기에는 엘리후의 터무니없는 속단이 있습니다. 이런 말이 욥에게는 재앙보다 고통이었습니다. 욥이 생일을 저주하고 낙심한 것은 재앙 때문이 아니라, 친구들의 사랑을 빙자한 터무니없는 충고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은 이들을 일컬어 “쓸데없는 의원”이라고 절규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욥기를 공부하면서 반드시 배워야 할 것 중의 하나가 하나님 편을 들거나 사람을 충고한다면서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더 아프게 만들어 시험에 들게 하는 비인간적인 일에서 자기를 구원하는 일입니다. 욥기를 공부하면서 지금까지 여러 번 이런 잘못과 위험이 무엇인지 공부했지만, 이 본문이 지나면 이 문제를 배울 기회가 없습니다. 본문 이후의 엘리후의 말에는 오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에서 욥의 친구들과 엘리후가 하나님을 편들어 욥을 충고하여 회개시키려다가 빠지는 영적인 병을 종합해서 우리 마음에 갈무리해 두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직업병처럼 하나님을 편드는 일에 따르는 영적 질병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거하는 동안 하나님을 편들고 복음의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충고하고 위로해야만 합니다. 이게 우리의 피할 수 없는 본분이지만, 우리가 이 작업을 하는 데에는 마치 직업에 직업병이 있는 것 같이 하나님 편들어 충고하는 일에 따르는 치명적인 영적 병이 있습니다. 이 병이 무엇인지 재확인합시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이 병에 걸리지 않고 하나님의 진리를 편들고 어려운 사람을 말로 도울 수 있을까요?
자신을 훌륭한 신자로 아는 자기기만이라는 병
첫째, 하나님을 편들어서 사람을 가르치는 일에는 자부심을 느낄 정도로 자기를 훌륭한 신자로 여기는 자기기만이라는 병이 따릅니다. 2절을 보세요. 엘리후가 지금까지 긴 연설을 했음에도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아직도 할 말이 있음이라” 이렇게 욥에게 할 말이 많다고 합니다. 이 엘리후의 말에는 자부심과 긍지가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이 자부심이 어디서 왔습니까? 하나는 자기가 하나님을 편들어 하나님의 의를 변호한 것에서 깊은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엘리후는 하나님의 자존성을 아는 것과 그것을 탁월하게 말했다는 것으로 자신을 탁월한 믿음의 사람으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로 엘리후는 한껏 자만심에 부풀고 교만해졌습니다.
내가 불원천리하여 얻은 지식으로 욥이 떨어뜨린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께 되찾아 주겠다고 합니다. (3) 온전한 지식을 가진 이 사람이 욥 당신과 함께 있다. (4) 자기 지식을 온전한 지식이라고 한 겁니다. 자기가 신학의 종결자라는 겁니다. 이렇게 엘리후가 자신을 훌륭하게 알고 긍지가 하늘을 찌릅니다. 엘리후가 하나님 편들다가 이 자기기만이라는 영적인 병에 걸린 겁니다. 현대교회는 이 병이 코로나처럼 만연되어있습니다. 말씀이 어떻게 자기를 변화시켰는지를 말하지 못하는 이들이 특정 진리나, 정통 교리를 아는 것과 주장하는 것으로 자기를 엘리트 신자로 여기는 자기기만에 빠져 있습니다.
이 자기기만이 치명적인 건 이 병은 천국문에서나 깨어나는 병이기 때문입니다. 행함이 없고, 주님을 닮은 열매가 전혀 없는데도 자기를 훌륭한 신자로 알기 때문에 그런 자기의 영적 실상을 인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잘 믿는 것으로 압니다. 문제가 없는 줄 압니다. 다 잘되고 있는 줄로 압니다. 상 받을 줄로 압니다. 그래서 천국 문에서 우리가 선지자 노릇하고, 많은 권능을 행했다고 천국 문을 열어 달라고 하지만 주님은 모르신다고 하십니다. 천 국문에 이르도록 자기를 속이기 때문에 다시 만회할 기회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진리를 편들어 충고하고 가르치는 일에는 이 자기기만이라는 영 병에 따름을 의식합시다. 그래도 진리를 말하는 자체로 자부심을 느낄 정도로 자기를 훌륭한 신자로 여겨지면 그 자기를 산상보훈의 결론인 집 짓는 비유라는 시금석에 세웁시다. 주님은 듣고 아나 행하지는 않으면서도 자기를 훌륭한 신자로 아는 자기기만에 빠진 자들을 모래 위에 지은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시금석 위에서 하나님 편을 들고, 진리를 말하고 충고합시다. 이것이 진리를 말하는 자체로 자기를 훌륭하게 아는 자기기만을 깨주고, 이 자기기만이라는 무서운 영 병에 ᄀᆞᆷ염되지 않고 진리를 말하고 사람을 세우는 말을 할 줄로 믿습니다.
자기를 절대화하는 독단과 주관주의라는 병이
둘째, 하나님 편을 드는 일에는 자기를 절대화시키는 독단과 주관주의라는 무서운 병에 걸릴 위험이 있습니다. 엘리후도 이 병에 걸려 있습니다. “온전한 지식을 가진 이가 그대와 함께 있느니라”(4) 저는 처음 이 구절을 읽을 때 이 온전한 지식을 가진 이를 하나님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엘리후 자기를 “온전한 지식을 가진 자”라고 했습니다. 자기 지식이 곧 하나님의 진리인 양 절대화 했습니다. 이런 독단이 없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절대화하니 엘리후가 하는 말은 다 단정적입니다. 악인은 살려 두지 않으시고 의인에게는 눈을 떼지 않고 연단 하신다.(6-16) 일반화할 수 없는 이 말을 절대자처럼 단정적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처럼 정죄합니다. 너의 고난을 악인 받을 벌이다. (17,) 뇌물을 받고 쓰지 마라, (18) 욥이 뇌물 받고 뇌물 쓰는 사람입니까? 이건 사실, 즉 객관이 아닌 자기 주관에 불과합니다. 이 주관이라는 병이 자기 말을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는 독단에 빠지게 했습니다.
하나님 편드는 사람이 이 병에 감염되는 이유는 자기가 편드는 하나님이 절대자시고, 교리가 하나님의 진리이기 때문에 그것을 주장하는 자기와 자기 말을 곧 하나님의 절대적인 진리로 압니다. 그래서 누가 자기 말을 부정하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를 부정한 것으로 여겨서 성을 내고 싸우려고 하고 타도하려고 합니다. 이게 극에 달하면 예수님을 십자가로 보낸 자들과 같이 사람을 죽이는 일도 하나님께 대한 봉사로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편을 들 때 항상 자기를 객관화 합시다. 자기를 절대화하고 싶은 이 유혹을 십자가에 못 받아 자기 주관에 빠진 독단이 없이 하나님 편들고, 어려운 사람을 말로 돕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인간성을 잃게 하는 무자비라는 병
셋째, 하나님의 진리를 편드는 일에는 인격성을 상실해서 종교와 신앙을 무자비한 것으로 만드는 무자비라는 무서운 병이 따릅니다.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 편들려고 자식 열을 잃은 욥에게 아직도 덜 맞았다, 더 맞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엘리후는 욥이 끝까지 시험을 받기를 원한다. (34:36) 욥아 입을 열어 하나님을 불의하시다고 하는 건 하나님이 진노로 벌을 주지 않아서라고 지식 없는 말을 한다고 합니다. (35:15, 16) 심지어 본문 15절은 하나님이 욥을 고난의 입에서 건져서 욥이 누린 부를 주셨는데 욥이 이 은혜를 배반해서 악인이 받을 심판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이 말들에는 한 인간에 대한 배려가 없습니다. 한 인간의 상황은 고려의 대상이 아닙니다. 한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고뇌를 보려고도 않고,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무자비하게 됩니까? 욥이 자기 의를 주장하는 건 하나님을 불의하게 만드는 겁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위로의 대상이 아닌 정죄의 대상이 됩니다. 위로가 아니라, 무자비하게 대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는 겁니다. 이게 인간성을 잃게 합니다. 이게 극에 달하면 교리만 있고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신앙으로 압니다. 그래서 인간성을 상실한 무자비한 종교와 신앙이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진리를 편들 때는 자기를 인격이라는 시금석에 세워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격이시며 인격적으로 행하십니다. 따라서 비인격적인 건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에 비인격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고, 신앙과 교리에서 인격성을 상실하면 신앙과 교리가 야만이 됩니다. 인격적이 못하고 인간성을 잃은 건 인격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을 섬기는 겁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말하고 충고할 때 먼저 자기를 인격이라는 시금석에 세우고 말합니다. 이것이 무자비라는 병이 감염되지 않고 이것이 하나님을 편들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고, 사람을 세우고 할 줄로 믿습니다.
상대적 의로움과 행복감을 즐기는 위선적 이기심이라는 병
넷째, 하나님 편을 들어 사람을 가르치고 충고하는 일에는 상대적 의로움과 행복감을 즐기는 위선과 마귀적인 이기심이라는 병에 걸릴 수가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과 엘리후가 욥을 충고하는 일에서 상대적인 의로움을 느끼고 상대적 행복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기쁨을 감추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릿발같이 정죄하기를 마지않아 충분히 비참한 사람에게 비참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었습니다. 로이드 존즈는 이게 들보이며, 이 들보가 악질적이며 악마적인 이기심이라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 편들고, 충고하는 일에 이런 끔찍한 병이 따릅니까?
그것은 우리의 죄성 때문입니다. 죄성이 고난 당한 사람을 나쁘게 보게 하는 외식 주의에 빠지게 합니다. 이 죄가 고난 당하는 자에게서 나는 너보다 옳고 안전하다는 상대적 의와 행복감을 느끼게 합니다. 이 죄는 충고와 훈계로 정죄하고 가르치는 자체로 자부심과 행복감을 느끼게 합니다. 이 죄가 적극적으로 진리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사욕을 취하게 합니다. 한국교회에 목사인 저도 모를 정도로 많은 교단이 생긴 건 진리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사욕을 채우려고 해서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 이기심이라는 영적인 나병에 병에 면역된 신자는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편들고, 사람을 충고하고 훈계하고 싶을 때는 자기를 사랑장에 세웁시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말하기 전에 먼저 자기가 사랑의 막대기 아래 있는지를 살핍시다. 사랑의 막대가 아래 있지 않으면 말하지 맙시다. 사랑의 막대기로 이 들보를 뺍시다. 이 들보를 빼고 들보 없이 말해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편들고 사람을 세우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제 욥기 공부가 욥기의 절정 부분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번 욥기 공부에서 이 병 하나는 고쳐야 합니다. 이번 욥기 공부에서 이것 하나만 배웠어도 큰 소득이요, 행운입니다. 이게 이 땅에서 복음의 진리를 말해야 하고 말로 사람을 도와야 우리가 이 거룩한 일에 따르는 이 무서운 영 병에서 구원이 되게 하고, 이 병에 감염되지 않고 진리를 말하여 사람을 세우게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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