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8,31, 주일
본문 : 욥36:1-23
말씀 : 라인권목사
기억력이 좋으시다면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엘리후의 네 번째 연설의 첫 부분의 요지가 “ 욥에게 재앙을 내리신 하나님이 불의한 것이 아니라 의로우시기 때문이다.” 임을 기억할 겁니다. 우리는 이 엘리후의 말에 들어 있는 독단과 그 말에 따르는 치명적인 병이 무엇인지를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게 있습니다. 앞에서 욥이 자기 친구들의 말에 반발한 것을 생각하면 욥이 이런 엘리후의 말에 질색하여 반박할 것 같은데 욥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 욥의 침묵을 헹스텐베르그나 델리취 같은 이들은 욥이 엘리후의 말을 수긍한 것으로 봅니다. 뒤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욥이 입을 가리고 침묵하는 맥락으로 보면 욥이 엘리후의 말을 수긍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면 왜 욥이 이 오만한 엘리후의 말을 수긍했을까요? 그것은 “욥 당신께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신 것은 하나님이 불의한 것이 아니라 의로우시기 때문이다.”라는 이 엘리후의 말의 긍정적인 의미 때문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욥 당신에게 재앙을 주신 것은 벌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유익하게 하시려고 재앙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의로우시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욥의 고난에 대한 엘리후의 최종적인 해석입니다. 이 해석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욥의 고난을 “하나님의 학교”라고 한 겁니다. 고난이 알게 한다, 교훈을 듣게 하고 돌이키게 한다, 귀를 열게 한다는 동사들을 보세요. (9-10,15) 15절을 표준 새 번역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받는 고통은 하나님이 사람을 가르치시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22절의 "그" 즉 "하나님"을 제롬을 비롯한 고대 학자들은 " 선생"으로 번역해서 현대 어 성경들은 다 스승 선생으로 번역했습니다, 엘리후는 욥의 고난을 일컬어 “고난은 하나님의 학교다!”라고 한 겁니다. 이 학교의 위대한 선생은 하나님이시고, 교재는 고난입니다. 위대한 스승 하나님께서 고난이라는 교재로 가르치신다! 이 엘리후의 말이 욥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학교이다
그렇습니다. 고난이 하나님의 학교라는 것은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이요, 성경은 우리 주님도 “그가 아들이시라 도 고난의 학교에서 순종을 배워 온전케 되셨다”고 하셨습니다.(히5:8,9) 이런 고난의 의미를 욥기에서 하나님께서도 설명하시지 않습니다, 따라서 고난이 하나님의 학교라는 엘리후의 해석은 고난의 의미에 대한 욥기의 최종적 해석입니다. 인생은 고난에서 예외가 없습니다. 고난은 인간의 실존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고난은 하나님의 학교다! 라는 말씀은 복음입니다. 이 말씀이 욥기의 마지막 인간 교사인 엘리후의 말의 거의 끝부분에서 나온 겁니다. 그러므로 욥기에서 이걸 꼭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엘리후는 왜 하나님께서 욥을 당신의 고난의 학교에 입학시키셨고, 하나님을 고통이라는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게 하셨다고 합니까?
인간의 도덕적 한계를
첫째 고난은 인간의 도덕적이며 영적인 한계를 가르치는 하나님의 학교라고 합니다.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환난의 줄에 얽히게 하시는 것은 그들의 소행과 악행과 자신들의 교만한 행위를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8,9)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욥이 아무리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라도 죄성이 있어서 도덕적으로 완전할 수 없고, 자기도 알지 못하는 죄가 있는데도 교만해서 죄인에 불과 한 자기를 도덕적 완전자 같이 여기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욥을 환난에 얽히게 하셔서 자신의 도덕적 한계를 깨닫게 해 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엘리후는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고난은 인간의 도덕적 영적 한계를 깨닫고 인정하게 하는 하나님의 학교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욥과 같이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사람들의 교만입니다. 종교적이고 도덕적이기 때문에 자기 안의 죄와 죄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를 도덕적 완전에 이를 수 있는 사람으로, 완전에 이른 사람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성 때문에 도덕적으로 완전해지려고 할수록 불완전해지는 존재입니다. 천로 역정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기독도가 먼지가 하얗게 쌓인 방을 청소하려고 빗자루질을 하니 먼저가 일어나 몸에 달라붙고 숨을 쉴 수 없게 하고 재채기를 하게 합니다. 즉 율법을 지키려고 할수록 율법은 죄가 살아나게 해서 더욱 죄인이 된다는 겁니다. (롬7:9) 이 한계를 인식하고 자기가 죽어야 하나님의 자비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이르는 겁니다.
그러나 종교적이고 도덕적일수록 교만해서 이 한계를 모르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얼마든지 도덕적 완전에 이를 수 있다고 여깁니다. 이교만은 극한 상황에 직면해서야 깨집니다. 고난은 인간의 한계를 절감케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어령 선생은 젊었을 때는 첫사랑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며 믿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생명보다 귀한 딸의 눈과 생명이 꺼져가는 고난을 당하자 딸의 빛을 찾아 주시면 말 잘하는 자신의 능력을 바치겠다고 그리스도께 귀의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하나님의 학교입니다. 고난의 학교에 입학했으면 거기서 인간의 한계를 깨닫고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배우시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자비이신 그리스도께 귀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에 순종하기를
둘째, 고난은 인간의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방법에 순종하기를 배우는 하나님의 학교입니다. 고난은 귀를 열어 교훈을 받아 죄에서 돌아서게 하는 하나님의 학교입니다.(10) 성경은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친다고 하셨습니다.(벧전4:1) “순종하면 형통하고 거역하면 칼에 망하고 지식이 없이 죽는다.” (11,12) 고난은 하나님의 방법에 순종하기를 배우는 하나님의 학교라는 겁니다. 다윗이 이 학교에서 순종을 배웠습니다. 고난으로 주의 말씀을 지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시119:67)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 하나님의 학교였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인 율법에 순종하면 번영했고, 어기고 거역하면 칼이 와서 하나님께 순종함이 사는 길임을 체득하게 하셨습니다.
이게 특히 욥이 배워야 할 과목이었습니다. 욥이 자기 의를 주장한 것은 자기 의가 자기를 살린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은 죽어도 자기 의를 놓지 않겠다며 자기 의를 고집했습니다. 자기 의로 살려고 한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를 거역하고 대적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아들을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신 아버지의 뜻, 즉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에 완전히 반대입니다.(요6:40,3:36) 이 욥의 방법을 포기해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이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방법에 순종하도록 욥을 황무지로 만들어 고난의 학교에 입학시키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의 고난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신 예수께 순종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학교에서 하나님의 방법,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배우시되,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구원에 방법이신 예수 믿음이라는 하나님의 방법에 순종하기를 배우시기를 축복합니다.
성화라는 풍성한 구원의 축복에
셋째, 고난은 성도를 온전케 하는 성화라는 온전하고 풍성한 구원의 축복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학교입니다. 이게 15-16절의 뜻입니다. 악인들은 하나님께 고난을 당하면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분노를 쌓고, 속박해도 하나님께 겸손히 도움을 구치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 하나님의 자녀들은 곤고로 귀를 열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환난에서 끌어내어 넉넉한 곳으로 옮기 시고, 그 상에 기름진 것을 채워주시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고난, 즉 징계를 달게 받아서 온전케 됩니다. 아들의 형상에 이르는 이 온전함이 구원의 목표이고 이 온전함이 풍성한 삶이라는 구원의 축복에 이르게 하는 겁니다.
이게 욥의 고난의 의미입니다. 고난이 자기 의를 버리게 하여 그리스도에게 이르게 했습니다. 욥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이르니 기존의 욥의 경건과 의가 욥의 성화가 됩니다. 이 때에 소위 갑절의 축복 임했습니다. 그리스도에 이르러야 진짜 거룩하고, 하나님같이 거룩해지는 온전한 구원에 이릅니다. 이것이 풍성하고 온전한 삶을 누리게 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하나님의 학교에서 아들의 형상으로 성화되어서 풍성한 구원의 축복에 이르시를 축복합니다.
은혜로 가족 여러분! 고난은 최고 학부 대학입니다. 소천하신 김창인 목사님은 “고생 대학”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대학이 참신자 되게 하고, 순종하고 온전한 사람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고생 대학에 입학했으면 이렇게 잘되게 하신다는 확신과 소망을 가집시다. 이 확신과 소망으로 이 과목을 잘 이수하여 고생 대학을 졸업할 때 순금으로 나옵시다. 이 첩경이 고난으로 순종을 배워 온전해지신 예수님을 따르는 겁니다. 고난으로 순종을 배워 온전해지신 예수, 고난 후의 영광을 보며 십자가를 참으신 주님을 따라서 고난이라는 하나님의 학교에서 주님처럼 순금 같은 신자가 되어서 나오시기를 축복합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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