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9,7, 주일
본문 : 욥36:24-37:24
말씀 : 라인권목사
톨스토이의 인생론 중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두 젖먹이 어머니의 생명을 거두라는 하나님의 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천사의 이야기입니다. 천사는 젖먹이들을 두고 어미의 생명을 거두라는 하나님의 명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아이들의 생명도 함께 거두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 인생의 날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이해 불가한 일들이 일어나서 하나님이 시험이 됩니다. 이게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해 온 욥의 고뇌이며 고통입니다.
욥이 전심으로 여호와를 경외하여 모든 악에서 떠났습니다. 이 욥에게 재앙이 오자 세상의 존경의 대상이던 욥은 세상의 조롱과 말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욥은 자기를 이렇게 만든 하나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께서 나를 원수와 같이 대하신다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무죄한 내게 재앙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선악에 무관심하신 증거라고 항변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런 욥의 잘못에 대한 꾸짖음이자 욥의 고뇌에 대한 엘리후의 마지막 답변입니다.
이해 안 되는 하나님은 경외할 하나님이시다
이 엘리후의 말을 한 줄로 정리하면 ‘당신이 하나님을 이해 불가라며 하나님을 불평하고 원망하지만, 당신이 이해 못 하는 그 하나님은 오히려 경외해야 할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삼위일체 교리와 같이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도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이렇게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 안 되는 하나님은 그것이 불신의 사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외의 대상이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나는 모순되는 고로 믿는다.”는 터툴리안의 말도 이런 뜻입니다. 이해 안 되는 하나님은 경외해야 할 하나님이시다. 이게 엘리후의 논리입니다.
욥을 자연과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 앞에 세움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엘리후가 자연으로 “이해 못 할 하나님은 경외해야 할 하나님이시다!”라는 위대한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겁니다. 엘리후는 욥에게 이해 못 하는 하나님은 경외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가르치려고 욥을 자연과 그 자연에 나타나신 하나님 앞에 세웁니다. 왜 엘리후는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 경외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욥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욥은 자연과 자연에 나타나신 하나님 앞에 세웁니까? 우리가 자연과 자연에 나타나신 하나님 앞에 서면 자연은 어떻게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시험이 되는 하나님이 엎드려 경배할 경외할 하나님이 되게 합니까?
자연보다 크고 높으신 하나님 앞에
첫째, 자연은 만물보다 크시고 높으신 하나님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입니다. 현대의 첨단 과학은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에게 자연은 여전히 경이의 대상입니다. 경이로운 자연은 그 자연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선포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냅니다.”(시19:1) 즉 인간의 경이의 대상인 자연은 나 자연을 내시고 다스리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라고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자연이 ‘하나님은 나 자연보다 크시고 위대하시고 높으시다.’ 이렇게 선포하고 있는 겁니다. 36:24-33절이 이런 뜻입니다.
왜 인생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우러러보아야 하느냐? 물을 가늘게 하늘로 올려 구름 즉 비를 만드시고 구름이 그것을 떨어뜨려 사람에게 비가 되게 하고, 그 구름 속에 천둥과 번개를 두셔서 먹을 것이 풍성하게 하십니다. 이 신비한 자연 현상이 하나님을 세상을 창조하신 크고 높으신 하나님으로 알게 하여 그를 찬송하고 우러러보게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자연의 신비도 다 알지 못하는 인간이 어찌 그 자연을 창조하신 높으신 하나님을 사람의 이성으로 다 알 수 있고, 그 하나님의 나이가 몇 살인지 헤아릴 수 있느냐는 겁니다. (26) 하나님이 다 이해되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심과 그 행하심이 찬란함에 압도되어 경외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겁니다. 이게 신앙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엘리후는 무죄한 내게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이 이해가 안 된다며 하나님이 공의롭지 못하시니, 선악에 무관심하시니, 원수 같으시다는 욥에게 이렇게 말한 겁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내신 자연을 보라! 그러면 피조물에 불과하고 자연의 신비도 다 알지 못하는 당신이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이해 못 함이 당연함을 알게 되고, 당신이 이해 못 해도 천지를 창조하신 크고 높으신 하나님이 하신 일이시니 하나님이 어련하시겠어, 이렇게 잠잠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바라는 것이 해결의 길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일이 이해 안 되어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잘못하시거나 틀린 것이 아니라, 우리 이성이 너무 작고 무지한 겁니다. 참새가 봉황의 뜻을 알 수 없듯 피조물 인간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이해가 안 되어 시험이 될 때는 자연으로 가서 자연을 봅시다. 자연에서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이해 안 되는 하나님을 크신 하나님의 만나서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고 경외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해 안 될 때 잠잠히 그 하나님을 경외하고 바라는 것이 해결의 길임을 확신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자연을 다스리시는 통치의 권능 앞에
둘째, 자연은 자비로우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의 권능 앞에 인간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엘리후는 천지를 지으신 높으신 하나님이 행하시는 찬란함으로 마음이 떨며 심장이 뛴다고 합니다. 엘리후는 비구름, 번개와 추위와 더위가 때를 따라 있게 하는 권능에 사로잡혔습니다. 엘리후는 이 자연 현상들이 정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분명한 사실에 심장이 뛰었습니다. 폭우와 뇌우가 양식을 내게 하고, 징계나 긍휼이라는 목적이 있습니다. 셋째, 이 목적을 이루도록 자연을 통제하십니다. 비도 필요에 따라서 적은 비와 큰비가 내리게 하시고(6) 번개는 목표를 정확하게 타격하고, (36:32) 얼게도 하고 풀리게도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님이 바람과 바다를 다스리듯 하십니다. (12) 이게 크신 하나님의 크신 권능입니다. 인간이 자연 앞에 서면 이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아래 있음을 절감합니다.
이 하나님의 권능과 통치는 주권적이십니다. 엘리후는 이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아주 재미있게 말했습니다. 7,8절은 이런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오늘이나 내일에 이 일을 해야겠다, 계획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가 억수 같이 내리면 포기하고 꼼짝없이 방 안에서 하늘이 하는 일을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겁니다. 인간이 자연도 거슬릴 수 없는데 어찌 주권적 하나님의 통치를 거스를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욥 당신에게 고통을 주신 것을 이해 못 해도 그게 주권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 옳고 잘하시는 일로 믿고 순종하는 것이 신앙이요, 해결의 길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욥 당신이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다 하나님의 자비와 의로우신 통치라는 겁니다. 폭우와 번개가 해로워 보여도 이로 사람과 동물에게 양식을 주고, 징계하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것이니 눈비를 내리시고, 뇌성벽력을 치는 하나님은 자비하시고, 의로우시다는 겁니다. 이렇게 인생에게 환난과 고통이라는 폭우와 뇌우를 주시는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자비하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욥 당신이 하나님이 재앙과 고통을 주신 것을 이해 못 해서 불평하지만, 뇌우가 풍성한 양식을 이루고, 심판과 구원이 되듯이 하나님은 당신에게 주신 고통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고 징계와 구원이 되게 하실 것으로 여기고 잠잠히 경외하고 그를 신뢰하는 것이 해결의 길이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해 못 하는 일이 일어나도 그 일도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안에 있습니다. 하나님 통치는 다 의롭고 선하며 자비로운 겁니다. 비와 번개가 양식을 내고 심판과 구원이 되듯 하나님은 이해 못 할 고통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고 징계와 구원이 되게 하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해가 되어 시험이 되면 자연 앞에 섭시다. 비와 번개도 양식과 구원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당신의 주권적인 사랑의 통치로 구원이 되게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이 믿음으로 이해 안 되는 고통에서 잠잠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바라시기를 축복합니다.
성품상 악을 행하실 수 없는 선하신 하나님 앞에
셋째, 자연은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악을 행하실 수 없는 선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다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습니다. 즉 피조물 자체는 선한 겁니다. 36:24-37:13절에 나타나는 자연 현상들은 다 선한 것들입니다. 폭우나 천둥 번개가 재난이 되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선합니다. 번개가 재앙 같지만, 폭우에 번개가 치면 그 뜨거운 열로 공기 중의 질소를 녹여 비와 함께 내리게 하여 식물이 자라 사람과 동물에게 양식을 주시는 겁니다. 눈, 비, 구름 뇌우와 바람, 추위와 더위 그 자체가 선합니다. 이건 지으신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체가 선이십니다. 선이신 하나님은 악을 행하실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이해가 안 되어 다 선하고 좋은 일입니다.
그러니 욥 당신이 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불평하냐는 겁니다. 지금 이해가 안 되어도 지나고 보면 아! 이래서 그렇게 하셨구나! 이렇게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의 일이 이해가 안 되고 시험이 되면 자연으로 갑시다. 시험이 되는 뇌우에서 선하신 하나님을 봅시다. 신앙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하는 겁니다. 이걸 믿으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이해 못 하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잠잠히 바라는 이 신앙이 해결의 길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 함이 해결의 길이다
그래서 엘리후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해결의 길이라는 결론을 말하기 위해서 14-24절까지 사람의 이성으로 알 수 없는 하나님을 선포합니다. 자연을 명하시는 하나님을 다 아느냐는 겁니다. 하나님처럼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18) 구름이 하늘을 덮어도 구름 위에는 찬란한 빛이 있지만, 인간의 눈은 이걸 보지 못한다, (21) 그러나 하나님이 바람을 명하시면 하늘이 말끔해지면 그 밝은 태양은 너무도 눈부셔서 사람이 감히 우러러보지 못한다, (21) 태양도 직접 볼 수 없는 인간이 어찌 그 태양과 우주를 지으신 전능자를 다 이해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23) 그러므로 이해 못 할 하나님의 통치는 다 선하시고 의로우시니, 불평 말고 잠잠히 하나님을 경외함이 신앙이요, 문제 해결의 길이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크셔서 우리가 그 행하심을 이해하지 못할 뿐이지 하나님이 틀리시거나 잘못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의 구름이 흩어지고 밝은 해를 보기를 원하지만, 맑게 개인 하늘의 태양도 직접 보지 못하는 인생이 어찌 인생의 모든 죄와 고난의 구름을 걷어 내어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크신 구원의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두 젖먹이 어미의 생명을 거두라는 하나님의 명을 이해 못 해서 두 아이의 생명을 함께 거두려고 한 천사처럼 할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그 하나님을 경외하고 잠잠히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 구원하심을 찬란하게 경험하게 해서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게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하시는 일이 시험이 되신다면 기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행을 하고 자연으로 가는 것도 좋습니다. 자연에서 이해 못 할 하나님을 경외할 크신 하나님으로 만나는 삶의 여유가 있는 멋진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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