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9,14, 주일
본문 : 욥37:21-38:7
말씀 : 라인권목사
이제 낮에도 완연한 가을 날씨를 하고 있습니다. 옛사람들은 가을을 등화가친燈火可親이라고 해서 책을 읽기 좋은 때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은혜받기 좋은 시절에 욥기의 해결 부분을 공부하게 된 것도 은혜입니다. 이 욥기의 해결 부분을 공부하면서 우리 마음의 갈등과 문제도 욥처럼 풀리고 해결되기를 축복합니다.
지난 시간에 자연도 경이인 인간이 어찌 그 자연을 지으시고 다스리는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있느냐, 이해 못 할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틀리시거나 잘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외할 하나님이시니, 이해가 안 되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 해결의 길이라는 엘리후의 연설의 결론을 공부했습니다. 이 엘리후의 말이 끝나자 즉시 하나님께서 욥에게 자기를 나타내셔서 말씀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현현과 말씀하시므로 욥의 마음의 갈등이 풀리고 욥의 문제는 해결됩니다. 이제 우리는 38장에서부터 하나님께서 욥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을 공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하나님의 해결을 공부하기 전에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갈 문제가 있습니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욥의 문제
그게 37장과 38장 사이에 당사자 욥의 반응이 없다는 겁니다. 욥은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이 침묵을 욥이 엘리후의 말을 상대하지 않은 걸로 해석할 수도 있고, 엘리후의 말을 수용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욥이 회개할 때에 입을 가렸다는 사실로 보면, 엘리후의 말을 긍정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욥이 엘리후의 말을 수용했다고 해도 엘리후의 뒤에 하나님께서 친히 욥에게 임하셨다는 것은 여전히 욥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엘리후의 말로 욥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하나님께서 직접 임하셔서 말씀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엘리후의 강화로도 욥의 갈등이 풀리지 않고, 욥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려고 임하신 겁니다. 그러면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욥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거듭나지 못한 욥
그게 욥이라는 사람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았다, 즉 거듭나지 못한 상태였다는 겁니다. 앞에서 욥이 그리스도를 고백한 것이 이론적인 신앙이라고 했지요, 이건 욥이 중생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주석가들 중에는 오직 "헹스텐베르그" 만 저와 같이 “욥은 새 생활을 누리는 사람으로 거듭나야만 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1장의 욥의 이미지 때문에 욥이 거듭나지 못한 상태였다는 것은 대부분 그리스도인에게는 쇼크일 겁니다. 그러면 욥이 거듭나지 못했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욥이 거듭나지 못한 증거들
첫째 욥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 거듭나지 못한 까닭입니다. 자기 의란 스스로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 수행했다고 여기는 겁니다. 인간의 힘으로 스스로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이룰 수 있고, 이루었다는 건 은혜에 반하는 반기독적인 겁니다. 이게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특성입니다. 둘째, 그래서 욥은 자기를 가련한 죄인이 아니라, 고상한 성자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경건이 교만하게 한 겁니다. 헹스텐베르그는 욥을 교만한 성자라고 했습니다. 아담에게서 보듯 교만은 죄의 뿌리입니다. 이교만이 중생하지 못한 증거입니다. 셋째 욥의 신앙이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기만 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욥42:5) 요한은 태초에 있는 생명의 말씀에 대하여 우리가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했습니다.(요일1:1) 욥이 이 상태가 아닌 겁니다. 거듭나지 못한 욥의 삶은 종교적이고 율법적이었지 여기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중생치 못한 결정적 증거 회개치 않음
그리고 욥이 거듭나지 못했다는 결정적 증거가 욥이 아직도 자기 의를 회개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엘리후의 말이 끝났어도 욥이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하고 있습니다. 욥의 첫 회개는 40:3-5에 나옵니다. 이렇게 욥이 회개하지 않았다는 건 그에게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가 거듭나지 못했다는 겁니다. 이게 욥 19장에서 욥이 대속자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 보듯 아니하겠다는 놀라운 신앙고백을 한 욥이 곧바로 절망에 빠진 이유입니다. 그리스도에 이른 욥이 이 수준인 것은 19장의 그리스도에 대한 욥의 신앙고백에는 빼진 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회개입니다. 욥이 회개 없이 그리스도를 고백했습니다. 이게 욥이 거듭나지 못한 결정적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문이라고 하셨지요. 예수라는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회개와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회개 없는 신앙이 예수라는 문으로 들어오지 않은 신앙입니다. (요10;1) 회개가 없는 신앙은 수학이나 화학 공식 같은 이론적이고 교리적인 불과합니다. 이게 거듭나지 못해섭니다. 거듭나지 못해서 회개 없이 믿으므로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겁니다. 지금 지상 교회 안에는 회개 없이 양의 우리에 들어온 이들! 도덕적이고 경건하며 고상하나 거듭나지 못해서 이론적이며 교리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게 욥의 문제입니다. 욥이 아직도 거듭나지 못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사람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고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거듭나게 할 수 없다
첫째 인간의 힘과 노력이 사람을 거듭나게 못 합니다. 욥의 세 친구가 욥을 회개시키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욥을 위해서 먼 곳에서 가사 불구하고 왔습니다. 한 사람이 세 번씩이나 욥을 꾸짖기도 하고, 어르기도 하고, 심판으로 위협도 하고, 회개의 축복으로 격려도 했습니다. 엘리후는 삼자에 불과한 사람이면서도 자기 의를 주장하는 욥을 회개시키려고 그렇게 긴 연설을 했지만, 욥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지만, 욥을 회개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인간의 힘과 노력이 사람을 거듭나게 못 한다는 거지요. 사람을 고쳐야 하는 이들은 이점을 잊어선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명심할 게 있습니다. 그게 욥의 친구들이 욥이라는 사람을 바꾸지 못한 것만 아니라, 욥 자신도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욥의 경건, 욥의 의가 욥을 거듭나게 못 했습니다. 나도 나를 바꾸지 못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이 못하고 하나님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욥에 현현하신 겁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의 종교적 추구에 개입하셔서 거듭나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사람의 지혜와 아름다운 말이 사람을 거듭나게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욥의 세 친구가 악인을 벌주시는 하나님의 정의를 얼마나 아름답게 말하고, 인생의 별수 없음과 회개의 축복을 얼마나 아름답게 말했습니까? 엘리후의 연설은 이런 친구들의 말의 꽃과 같습니다. 엘리바스의 하나님의 자아충족성이 엘리후에게서 꽃 피었습니다. 고난이 징계라는 말이 엘리후에게서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고난은 하나님의 학교이다. 얼마나 철학적이고 아름다운 말입니까? 이 아름다운 말에도 욥이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합니다. 인간의 말과 가르침, 사람의 지혜인 철학과 아름다운 말이 사람을 거듭나게 못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사람의 아름다운 말로 하지 않고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한다고 한 겁니다. (고전2:1,4,5) 사람의 말과 가르침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야 사람이 거듭나서 회개하고 변화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게 하나님이 욥에게 자기를 나타내 주신 이유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오직 위로부터 하나님으로만 거듭납니다.
셋째, 인간의 신학과 교리가 사람을 거듭나게 하지 못했습니다. 욥의 세 친구는 다 신학적으로 접근하고 신학의 지존인 양 말했지요. 엘리후의 그 찬란한 하나님의 자존성의 신학과 교리도 욥을 회개시키지 못했습니다. 신학과 교리 자체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이걸 욥이 자증합니다. 욥이라는 사람이 친구들이나 엘리후가 말한 신학과 교리를 몰랐습니까? 욥은 그들에게 그 정도는 나에게 껌이라고 반박했지요, 욥의 신학과 교리가 욥을 거듭나게 못 했습니다. 칼빈주의 삼대 신학자로 불리는 카이퍼는 중생하지 못한 채로 목회를 시작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이게 신학과 교리가 편협해 섭니까? 바른 신학과 교리 자체가 사람을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야만 거듭나는 겁니다. 이게 엘리후의 말이 끝나자 하나님이 개입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당신의 하나님 되심을 욥에게 보이신 겁니다. 이로써 욥이 주-그리스도-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던 이론적 신앙에서 눈으로 보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거듭남은 하나님 임재의 결과입니다. 베드로가 동생 안드레의 소개로 예수님을 따르지만,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깊은 데서의 기적으로 나사렛 사람 예수에게서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때 나는 죄인이라고 회개했습니다. 이게 베드로의 중생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하나님의 영광이신 예수를 보았을 때 거듭나 회심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 중생은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귀로 듣기만 하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되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인격적인 경험입니다. 이 경험 없이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믿게 하신 이유이며,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입니다. 말씀이 육신 되셔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보게 하셨습니다. (요1:18) 이 예수를 보니 독생자의 영광입니다. (요1:14) 이 예수를 본 것이 아버지 하나님을 본 겁니다.
은혜로 가족 여러분! 우리가 경건하다고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로 하나님을 경험해야 거듭납니다. 하나님은 욥이 거듭나 회개하도록 고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힘과 노력, 인간의 아름다운 말과 신학과 교리로 거듭나지 못하는 욥을 거듭나게 하시려고 친히 욥에 당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이 구원을 위해서 이 예배로 당신을 나타내십니다. 욥을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여기서 예수로 당신을 나타내 보이시므로 거듭나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은혜로 거듭나서 귀로 듣기만 하는 이론적 신앙에서 눈으로 보는 실제적인 신앙에 이르시기를 축복합니다. 거듭나야 인생의 모든 갈등과 문제가 풀리고 해결될 줄로 믿습니다. 종교인에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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