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12,21 주일
본문 :욥42:1-6
말씀 : 라인권목사
이제 나흘이면 성탄절입니다. 구주 나신 성탄절이 욥기의 클라이맥스인 그리스도를 얻은 욥을 공부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찬양과 경배를 드립니다. 지난 시간에 본문의 욥의 회개가 회심이라는 걸 공부했습니다. 욥이 회심했다는 건 그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이르고, 그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소득 했다는 뜻입니다. 본문에는 예수라는 말도, 그리스도라는 말도 없지만, 본문의 욥의 회개가 구원에 이르는 회개와 믿음이라는 증거가 16장과 19장에서 고백한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욥은 16장에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중재할 중보자를 고백했고, 19장에서 그 중보자가 하늘에 살아계시다고 했습니다. 이 고백이 그리스도에 이른 믿음이면 20장이 욥 42장이42 되어야 하지만 욥기는 계속되고, 욥은 여전히 자기를 고집하고 있습니다. 즉 이 신앙 고백들에는 회개가 없습니다. 회개가 없는 신앙은 그리스도에 이르지 못하는 이론적이고 교리적인 신앙일 뿐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회개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와 신앙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다가 이제 눈으로 주를 뵙는다고 한 것이 본문의 회개가 구원에 이르는 회개와 믿음이라는 증거입니다. 16장과 19장의 논리적이고 교리적인 신앙이 42장에서 실제로 그리스도를 믿는 실제적인 신앙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탄절을 앞두고 본문의 욥의 회개를 통해서 실제로 그리스도를 믿는 회개와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공부하여 우리 신앙이 전통이나 교리에 머무는 신앙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얻는 실제적인 신앙이 되는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1, 구원에 이르는 회개와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적 전능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신뢰하는 하나님께 대한 인식의 대 전환입니다. 2절을 봅시다. “주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이 히브리말 “야다”는 과거 완료형으로 단순 지식이 아니라 마리아가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한고 한 말에서 보듯 ‘경험에 의한 확신’을 의미합니다. 욥이 지금까지 지식적으로 알던 하나님의 주권적인 전능을 실제적으로 경험으로 알고 믿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지식의 영역에 있던 하나님이 실제 삶의 영역에 들어온 겁니다.
욥기에서 욥의 친구들의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라면 욥의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13:3은”입니다.13:3은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27:2은 “나의 의를 빼앗으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즉 전능하셔서 다 아시는 하나님이 왜 무죄한 내게 고통을 주시느냐는 겁니다. 이게 욥의 시험이고 실족이며 고뇌였습니다. 이렇게 욥의 하나님께 대한 항변은 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주권자라는 이 사상이 깔려 있는 겁니다.
그런데 왜 욥이 고통의 날에 이 전능한 하나님이 해답이 아니라, 시험이 되어 고뇌하고, 심지어 하나님이 내게 원수 같으시다고 합니까? 그게 하나님을 알되 전통적으로 지식적으로만 알아 섭니다.. 그러면서도 욥은 자신을 친구들보다 하나님 전문가로 자부하고 있습니다. 이 전통적이며 지식적인 신앙은 인간의 한계에서 그 면모가 드러납니다. 욥이 재앙을 당하자 하나님이 주권적 전능자시라는 것이 자기 이성과 지식으로 이해가 안 되고 납득이 안 됩니다. 자기 이성으로 하나님을 판단한 겁니다. 하나님보다 이성이 컸습니다. 그래서 항변하고 낙망합니다, 즉 고난이 선이 되게 하는 하나님의 전능을 실제로 믿지 못한 겁니다. 이게 중생하여 회개하고 믿지 못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가끔 믿던 사람이 낙심해서 하나님을 믿어도 소용이 없다고 세상으로 돌아가지요. 이게 믿음이 작아서가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 구원받지 못해섭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자신을 구원하신 구원의 하나님으로 만났을 때 그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사람은 실제로 하나님의 전능 믿지 못합니다.
이 욥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현존 앞에서 세우시고 “네가 하나님이 될 수 있느냐”라고” 도전해 주십니다. 이 하나님 앞에서 욥의 자기 의가 붕괴되고, 자력 없는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겁니다. 도덕적 죄가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의 믿지 못한 자기와 불신을 회개한 겁니다. 이게 구원에 이르는 회개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에 이르자 “주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이 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나”라고” 실제로 하나님의 주권적 전능을 수용하고 전적으로 신뢰하게 된 겁니다. 주권자 하나님이 전능하시니, 고난을 주셔도 하나님은 옳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니, 고난도 선이 되게 하신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겠다는 겁니다. 이렇게 욥에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아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대 전환이 일어났습니다. 이게 회개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이른 겁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천지를 만드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찬양합니다. 소요리문답 제4문을 암송합니다. 하나님의 4대 절대 속성도 압니다. 그래서 자기를 하나님 전문가 엘리트 신자로 압니다. 그런데도 인생이 위기와 한계에 직면하면 하나님이 시험이 되고 낙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예수를 그리스도, 즉 하나님으로 만나지 못해섭니다. 전통적으로 신학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실제로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해섭니다, 이걸 예수님은 거듭나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거듭나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은 자기의 구원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그 전능한 하나님이 천국에 이르도록 구원하시고 아들을 아끼지 않으신 이가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실 것을 주시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확신합니다. 이게 구원받는 믿음이며 그리스도에 이른 믿음인 것입니다.
2, 구원받는 회개와 믿음은 자기 인식에 대한 대 전환입니다. “내가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을 했다고 합니다.(3) 이 깨닫는다는 히브리어 ”아빈”은 ‘지성적 이해’가 아니라, “통찰, 해석의 능력”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욥이 하나님의 현존과 말씀 앞에 서니 그동안 자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무죄한 내게 재앙을 주시는 것이 공의롭지 못하시다고 한 것이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선하심을 모르고 한 말이요, 피조물 주제에 하나님의 행하심을 판단하는 자리에 선 교만한 죄임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델리취의 해석이 핵심적입니다. “욥은 이 순간 하나님을 판단하던 자리에서 내려 하나님께 판단받는 자리로 이동한다.” 이 전환이 회개와 믿음입니다. 이 전환이 없이는 그리스도는 언제나 객관적 진리로만 남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알게 되자 자신을 바로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기를 아는 지식이라고 한 겁니다. 이렇게 자기를 알자 하나님을 판단하던 듣고 가르침을 받는 자가 됩니다.(4) 그리고 의롭고 중하던 자가 티끌과 재가 됩니다, 자기 부정입니다. 이게 그리스도에 이르는 회개와 믿음입니다.
이걸 예수님이 착하고 좋은 마음 옥토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전에 자기를 죄인이라고 회개하라고 충고할 때 못 참고 받아치던 욥이 이제 주장할 자기 지킬 자기가 없어진 겁니다, 가르침 받지 못하던 욥이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된 겁니다. 이게 회개하고 믿은 겁니다. 지금도 주장할 내가 있고, 지킬 내가 있고 나를 틀렸다는 말이 달지 않고 아프면 이 자기를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자기를 하나님의 심판자처럼 아는 이, 나를 죄인이라는 말이 달지 않고 아픈 이는 예수를 그리스도도 만나셔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를 의로운 자기를 죄인으로 이해하는 자기 인식의 대 전환이 일어나고 이때 그리스도가 필요하고 그리스도가 의원이 되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3, 구원에 이르는 회개와 믿음은 자기를 버리고 그리스도께로 방향을 전환하는 의지적 결단입니다.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거둔다는 “에므아스” 나를 버린다, 포기한다, 싫어한다”는 뜻입니다. 자기에게 선한 것이 없고 자기가 죄라서 자기를 미워하고 그 자기를 한하여 자의지로 자기를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게 회개입니다. 그리고 회개한다는 “나함”은 방향을 전환하다는 뜻입니다. 마치 방탕한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오듯 인생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전환하는 겁니다. 이게 회개요 믿음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회개합니까? 계명을 지키지 못한 겁니까? 욥의 회개는 죄가 아닌 자기를 회개하는 겁니다. 자기가 싫어서 그 자기를 한하고 자의지로 원수같이 미워하는 거요, 그래서 그 자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의 소망은 하나님의 자비이신 그리스도뿐이시므로 그리스도께로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겁니다.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회개한 거요, 이게 믿는 겁니다. 이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 그리스도를 얻는 믿음입니다. 이때에 귀로 듣던 믿음이 눈으로 주를 뵙는 실제적인 믿음이 되었습니다. 6절의 “주”는 문자적으로는 “당신”입니다. 해석적으로 주 즉 아도나이, 퀴리오스로 번역한 겁니다. 이 욥의 회개와 믿음이 그리스도를 얻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로 가족 여러분, 16장과 19장에 고백한 그리스도는 교리적으로 틀린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교리적 신앙이 그리스도를 얻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회개 이전의 고백은 아름답지만, 사람을 살리지는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얻게 하는 건 교리가 아니라, 자기를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는 회개입니다. 회개하고 믿는 영혼 속에서 그리스도는 교리가 아니라 생명이 됩니다. 욥이 전무가 되었다가 마지막에 가장 소중한 자기 자신을 싫어 버릴 때 전부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얻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교리보다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개입니다. 이 회개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얻으십시오. 이것이 귀로 듣는 교리적 신앙이 눈으로 보는 실제적인 구원의 신앙이 될 줄로 믿습니다. 이게 본문의 욥의 회개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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