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11,30, 주일
본문 : 욥40:10-41:34
말씀 : 라인권목사
벌써 대림절 첫 주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중계획안에서 올겨울 강건하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대림절에 욥이 자기 의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에 이르는 욥기의 해결 부분을 공부하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닙니다. 이 부분의 말씀이 성탄의 주를 맞는 실제적인 준비되기를 축복합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욥의 자기 의를 다루시는 방식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공부한 하나님의 질문의 요지는 “욥 네가 하나님이 될 수 있냐는 겁니다. 네가 하나님이 될 수 있다면 내가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인정하겠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자기를 구원할 능력이 있다고 믿는 것이 자기 의의 본질이라고 하신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욥에게 자기 의가 무엇인지를 깨달아 양심에 정죄를 받게 해 놓으시고는 너는 하마를 보라! 네가 리워야단을 잡을 수 있느냐고 욥을 하나님의 거대한 피조물 하마와 리워야단 앞에 세우셨습니다.
이 하마와 리워야단을 피조물 중에 가장 거대한 피조물로 보거나 용과 같이 신화적이고 상징적인 존재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개역 성경이 “하마”라고 한 것은 실재하는 거대한 피조물로 보기 때문이고, 개역 개정이 “베헤못”이라고 한 건 신화적이고 상징적인 동물로 보기 때문입니다. 어떤 쪽으로 보던 의미는 다 같이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통제 불능의 압도적인 존재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하나님이 될 수 있느냐고 물으신 후에 욥을 이 거대한 피조물 앞에 세우시자, 욥이 드디어 재 가운데서 회개했습니다. 따라서 이 방법은 욥기에서 자기 의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마지막 방식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욥을 하마와 리워야단이라는 압도적이며 통제 불능의 피조물 앞에 세우셨을까요? 왜 이것이 욥을 회심하게 했을까요?
첫째, 자기 의를 주장하는 사람에게 이 압도적인 피조물은 인간이 하나님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실물교재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의 본질은 자기 힘으로 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력으로 모든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다는 건 하나님의 기준에 이를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이른다는 건 자기가 하나님 수준이라는 겁니다. 이게 자기 의입니다. 이 욥에게 하나님께서 “네 팔이 하나님의 팔과 같이 능력 있느냐?(9) 네가 하나님이 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인정하겠다.”(14) 고 질문하시므로 자기 의가 자기를 하나님 수준으로 여기는 것임을 깨닫게 하시고는 그 욥을 “네가 하마를 보느냐고 이 압도적인 통제 불능의 피조물 앞에 세우셨습니다.
내가 너를 지은 것 같이 내가 하마도 지었다. 너 피조물이 나처럼 저 하마를 만들 수 있어? 그 거대한 피조물이 풀을 먹고살게 할 수 있느냐? 너는 그걸 잡거나 통제할 수 있냐고 하십니다. 나 하나님처럼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하마를 자기 의를 주장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실물교재로 쓰신 겁니다. 내 피조물 중에 가장 거대한 피조물 하마와 악어도 어쩌지 못하는 존재가 자기를 하나님 수준으로 알고 하나님과 같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느냐는 거지요. 여기서 욥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를 주장한 것이 자기를 하나님처럼 안 무서운 교만임을 깨닫고 재 가운데서 회개한 겁니다.
따라서 이 회개는 도덕적인 죄가 아니라, 자기를 하나님 수준으로 안 자기를 회개한 존재론적인 회개입니다. 이 거대한 피조물 앞에 압도 당해 어찌 못하는 인간이 피조물 인간이 자기를 조물주 하나님같이 알고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것을 회개했습니다, 나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일을 말했습니다.”(욥 42:3) 이 자기 죽음을 고백한 겁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되시고 인간은 인간이 되고 은총을 받아야 하는 인간의 자리로 돌아온 겁니다. 이게 욥의 회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자기를 자력자로 알고, 자기를 하나님인 양 아는 이들은 고상한 도서관이나 강의실 수준이 아니라, 동물원 수준임을 알고 도서관이나 강의실을 찾을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이 동물원으로 갑시다. 동물원의 그 압도적인 피조물 앞에서 인간을 하나님 수준으로 아는 그 자기 존재의 죽음을 경험하여 회심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둘째, 이 압도적인 피조물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자기가 자기를 구원할 수 있다는 자기 의를 뿌리까지 뽑아내 주는 도구요, 시청각 교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욥이 19장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했지만 여전히 자기 의를 고집했습니다. 이렇게 욥의 자기 의의 뿌리가 깊었습니다. 이 압도적인 피조물이 이 뿌리를 송두리째 흔드는 건, 우선 인간은 이 거대한 동물과 갑자기 마주치면 그 동물에게서 자기 생명을 지키고 구할 능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밀림이나 강에서 갑자기 악어와 조우했다면 용사의 창칼도 무용지물이라서 도망치는 게 상책입니다. (41:25-29) 인간은 거대한 피조물에서 자기 생명을 구원할 능이 없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작은 곤충 파리와 메뚜기도 재앙이 되는 존재가 아닙니까? 악어는 이걸 일깨우는 하나님의 시청각 교재요, 자기 의의 뿌리를 뽑는 도구가 된 겁니다. 악어 앞에서 악어에게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존재가 자기를 하나님 수준으로 여긴 자기 의의 깊은 뿌리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뽑힌 겁니다.
그리고 이 거대한 피조물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습니다. 네가 이 하마와 악어를 길들여서 애완동물처럼 만들 수 있느냐는 겁니다. 이 말씀은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 즉 죄는 누른다고 죽지 않습니다. 수양한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수행한다고 순화되지 않습니다. 누를수록 강해지고 살아납니다. 이렇게 죄는 세력입니다. 이걸 인간이 어쩌지 못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한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롬8:24) 악어를 길들여 애완동물로 만들지 못하는 인간이 야수보다 무서운 죄라는 리워야단을 이겨 길들일 능력이 있다는 건 코미디도 못 된다는 실증으로 욥을 하마와 리워야단 앞에 세우신 겁니다.
여기서 욥의 전적 부패와 전적인 무능이 드러났습니다. 할 수 있다는 자기가 뿌리째 흔들렸습니다. 여기서 욥이 자기는 자기 안의 죄와 죄성에서 자기를 구원할 능이 없는 죄인임을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만이 소망이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자기를 살리는 길임을 확신하고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께 투항한 겁니다. 이게 회심입니다. 사람이 수양과 수행하고 종교를 하는 것은 자기 능으로 선에 이를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게 자기 의입니다. 그러므로 수양이나 수행을 하고, 종교를 하며 자기 의를 주장하는 이는 수도원이 아니라, 사파리로 가야 합니다. 거기서 갑자기 하마와 악어와 조우하는 것만으로도 할 수 있다는 자기가 죽고, 하나님의 자비이신 그리스도께로 돌아서는 회심에 이를 줄로 믿습니다.
셋째, 이 파괴적이며 통제 불능의 피조물은 고난에 대한 욥의 고뇌와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입니다. 욥이 재앙을 당하자 왜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은 고난을 받고 불의한 사람은 형통하느냐는 고뇌에 빠졌습니다. 이 욥의 고뇌와 항변과 물음은 내가 옳다는 바탕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자기 고난을 부당하게 여깁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잘못 판단하시고 나를 잘못 다루신다는 항변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나훈아가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라고 한 것처럼, 욥이 하나님 세상이 왜 이렇습니까? 왜 하나님은 의인은 고난 받고 악인이 형통하도록 방치하십니까? 하나님이 선악에 무관심하신 것이 아닙니까? 내가 하나님 당신이라면 세상이 이렇게 되지 않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게 자기 의입니다. 자기 의가 이렇게 무서운 겁니다. 그렇습니다.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 이 물음에는 나는 착하고 성실하고 옳다는 자기 인식이 깔려 있습니다, 이렇게 고통으로 시험 들고 고뇌하는 욥을 하마와 악어 앞에 세우신 겁니다.
그것은 이 동물들의 존재가 왜 있는지 이해 불가이기 때문입니다. 이 하마와 악어는 통제 불능이라 길들일 수 없습니다. 애완동물로 만들어 데리고 놀 수도 없고, 소처럼 밭을 갈고 추수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41:1-5) 이것들은 풀만 축내고 약한 동물을 잡아먹을 뿐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 고통이 이 하마와 악어 같은 겁니다, 대체 왜 하나님이 고통을 내시는지 이해 불가입니다. 그러나 그 하마와 악어도 하나님이 내셔서 하나님의 선한 목적이 있습니다. 심지어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지으셨다“고 합니다.(잠16:4) 대통령 윤석열이 이 구절의 주석입니다. 그는 소명이 없고, 민주적 훈련이 안 되고, 경륜이 없는 자는 결코 지도자가 되어선 안 된다는 걸 배우게 했습니다. 고난이 그렇습니다. 고난은 존재하는 게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악어를 내신 것 같이, 그 고통도 하나님 내셨고, 하나님의 선한 목적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빛도 지으시고 어둠도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틸리히는 ”하나님은 암도 지으셨다“고 했습니다. 이걸 깨닫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욥을 하마와 악어 앞에 세우신 겁니다.
그리고 이 거대한 압도적인 동물은 인간의 통제 밖에 있습니다. 설득할 수도, 계약할 수도, 애완동물로 만들 수도, 강제적으로 잡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시고, 그렇게 되도록 하신 겁니다. 이 통제 불능의 하마와 악어 앞에 욥을 세우셨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욥 너 세상이 왜 이래! 왜 의인은 고난을 받고 불의한 악인들이 잘만 살게 하시는 거야? 하나님이 이렇게밖에 못하셔! 라고 했지? 너 한번 하마와 악어를 볼래? 하마와 악어는 네 통제 밖이지? 하마와 악어도 통제 못 하는 네가 나보다 더 악인을 벌할 수 있다고 여기냐는 겁니다.(욥40:1-14) 인간에게는 통제 밖의 세상과 세상일이 있다는 겁니다. 이게 우리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생은 아무리 의롭고 능해도 어쩌지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마와 악어를 내 통제 아래 두듯, 고난만이 아니라, 야수보다 무서운 세상의 모든 악인을 완전하게 통제해서 선하신 공의를 이룬다는 겁니다. 이걸 보여주시려고 하마와 악어 앞으로 데려가셨습니다,
여기서 욥42:1-6의 회개가 나왔습니다. 주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다, 나는 나도 알지 못하는 말을 했다, 듣기만 하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았다며 재 가운데 회개했습니다, 여기서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라는 자기 의가 드러나고 자기 의가 깨진 겁니다. 여기서 욥의 고뇌와 질문이 한꺼번에 풀리고 해결된 겁니다. 이렇게 욥이 회심한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짚고 깊이 생각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이 하나님의 방법이 유치하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하마에게 데려가서 너 하마를 만들 수 있어, 악어에게 데려가서 너 악어를 통제할 수 있어 나는 다 해! 이거 하나님 수준이 아니라, 어린아이 수준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의를 고집하는 욥을 강제로 해체시키고 굴복시켜 버린 것이 아니라, 욥을 어린아이 달래고 가르치듯 하신 겁니다. 욥을 회개와 믿음에 이르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 유치한 수준까지 낮추신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욥을 강제한 것이 아니라, 이토록 인격적으로 설득하시고 설복하셨습니다. 이 하나님 사랑의 설복에 욥이 감복해서 회심하여 믿음에 이르렀습니다.
은혜로 가족 여러분! 이 하나님의 설복의 절정이 당신의 아들 예수를 주신 거지요. 우리 인간은 이 하나님의 사랑의 설복이신 예수 앞에서야 비로소 자기 의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에 이르는 존재입니다. 그리스도를 고백하면서도 자기 의를 놓지 않는 욥처럼 아직도 자기 의의 뿌리가 뽑히지 않아서 자기가 할 수 있다는 작은 하나님으로 있다면, 이제 동물원에서 골고다로 가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십자가 앞에 섭시다. 거기서만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기가 해체되어 하나님은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인간의 자리에 서서 경배자가 될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아들을 아끼지 않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시던 좋은 것으로 주시는 것을 믿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 믿음이 이 고통하는 부조리한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될 줄로 믿습니다. 자기를 신뢰하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를 신뢰하십시오, 이것이 구원에 이르는 참된 회심이라고 믿습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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