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10,19, 주일
본문 : 욥39:1-30
말씀 : 라인권목사
오늘은 로마서의 이야기로 말씀을 엽니다. 로마서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설명하는 성경입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이루신 의와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무죄로 판결해서 의인으로 간주해 주시는 “칭의”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께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설복하려고 죄론으로 시작해서 그리스도의 구속과 이를 믿는 믿음으로 죄인이 의롭게 된다는 창의론을 성경과 신학과 경험을 동원해서 논리적으로 자명하게 설파했습니다.
그래서 이 로마서를 편견 없이 열린 마음과 탐구하는 자세로 읽는다면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성경입니다. 루터가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이 로마서의 말씀에 회심했고, 이 말씀으로 종교개혁의 봉화를 올렸습니다. 이로써 세계사의 물길이 바뀐 겁니다. 오늘 제가 이 로마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사람을 설득하는 하나님의 방식이 사람과 다르다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섭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쓰는 목적과 같이 자기를 하나님께 대한 모든 의무를 다할 수 있는 사람으로 알고, 다 했다고 믿는 욥의 자기 의를 깨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이르도록 욥을 설복하시기 위해섭니다.
사람을 설복하는 하나님의 방법은
그러면 하나님은 자기 의에 빠진 욥을 어떻게 다루셔야 합니까? 인간은 인격적 존재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처럼 칭의론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셔야 하지만, 하나님은 바울과 같이 칭의론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욥을 당신의 면전에 세우시고 대답하신 것이 아니라, ‘너는 내가 어떻게 만물을 창조하고 그 만물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 피조물을 살게 하는지 네가 아느냐?’고 대답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질문에 욥이 대답할 수 없습니다. 이로 고상한 욥은 비천한 죄인으로 죽었습니다. 이게 인간과 하나님의 다른 점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설복할 때는 논리가 필요하나,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므로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의 현존을 나타내심 만으로 충분합니다, 이것으로 자기 의를 주장하는 욥은 한번 죽은 겁니다. 여기까지가 지난 시간에 공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야생 앞으로
그런데 이렇게 욥을 한 번 죽여주신 하나님은 그 욥을 이제 하나님 당신 앞에서 야생의 세계로 데려가십니다.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그 새끼가 야생에서 어떻게 성장해서 독립하는지 네가 아느냐?’ 네가 독수리를 창공을 날게 하고 높은 곳에 둥지를 짓게 했느냐? 이렇게 욥을 야생 앞에 세우시자 욥은 나는 비천하오니,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라고 회개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은 논리가 아닌 당신의 면전에 세웠다가 야생 앞에 세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당신은 면전이 아니라 야생 앞에 세우는 것만으로 어쩔 수 없는 죄인이 되고 남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게 욥기에서 자기 의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두 번째 방법입니다. 왜 하나님은 욥을 당신의 면전에서 한낱 야생 앞에 세우십니까? 왜 고상한 욥은 이 야생 앞에서 비천한 죄인이 됩니까?
첫째,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야생 앞에서도 생존능력이 야생만도 못한 약하고 별수 없는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1-4절은 산양과 사슴이 야생에서 새끼를 출산하고도 건재하고 출산한 새끼가 태에서 나온 즉시 걷는 것과 가혹한 야생에서도 살아남아 강해져서 독립하는지를 네가 아느냐는 겁니다. 이 질문은 생존하는 능력에 대한 것입니다. 1-4절을 뒤집으면 사람이 사람의 손길, 즉 인간의 문명과 문화가 마치 못 하는 야생에서 출산하면 출산한 어미와 자식이 산양 같이 생존할 수 있느냐는 거지요. 인간은 문화와 문명으로 야생을 정복한 것 같지만, 문명을 떠나면 야생보다 훨씬 약한 존재입니다. 추위 앞에서 사람은 옷이 있어도 얼어 죽지만 동물은 털 하나로 생존합니다. 굶주림 앞에 인간은 도구 없이는 사냥할 수 없지만, 짐승은 본능으로 생존합니다. 인간은 병원과 약국 없이 살 수 없지만, 야생은 약국이 없어도 삽니다. 이렇게 인간이 강한 것 같으나 야생 앞에 서면 야생보다 약한 별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이 인간이 약함이 서물을 숭배하는 웃지 못할 자리에 이르게 만들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야생에서는 스스로 생존도 불가능한 인간 너 욥이 어찌 너를 나 하나님께 대한 모든 의무를 다할 수 있는 사람으로 알며 다 했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네 힘으로 나 하나님께 이르기 전에 야생에서 네 힘으로 네 생명을 지켜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욥을 야생 앞에서 세우시자 할 수 있다는 욥이 할 수 없는 비천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야생보다 약한 인생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수준에 이른다는 것은 넌센스에 불과 합니다. 자연과 야생을 아는 이는 그 앞에서 겸허해집니다. 그러므로 자력으로 할 수 있다는 사람은 칭의론 이 아니라, 야생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 면전이 아닌 야생 앞에서도 자력으로는 자기 생명도 유지할 수 없는 존재임을 절감하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둘째,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야생 앞에서도 만물보다 부패한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귀여운 산양과 사슴보다 더 크고 강한 들나귀나 들소들을 보라고 하십니다. 이것들은 구속되거나 구애받지 않는 삶을 삽니다. 사람이 그것을 잡을 수 없고 길들일 수 없습니다. 환경에도 구애받지 않습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광야와 소금땅에서 생존하며 매이지 않는 자유를 누립니다, 야생의 이 매이지 않고 메일 수 없는 자유는 방종 같지만, 방종이 아니라, 창조주가 부여한 본능에 충실한 겁니다. 이 본능이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나타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이 야생 앞에 서면 어떤 존재가 됩니까?
하나님의 형상인 존귀한 피조물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 능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대적해서 우상을 만들고 하나님의 형상을 동물의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습니다. (롬1:21-23)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렘17:9) 그래서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한 다고 한탄하셨습니다. (사1:3) 구스인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바꿀 수 없는 것 같이 이 타락한 본성을 바꾸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렘13:23) 그렇습니다. 인간이 이성적 존재며 도덕적 존재라고 하지만 사실은 마소만도 못한 만물보다 부패하고 더러운 것이 인간입니다.
욥 네가 이걸 아느냐는 겁니다. 이런 인생이 어찌 스스로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할 수 있고 다 한 성자로 아느냐는 겁니다. 네가 네 타락한 본성을 길들일 수 있느냐는 겁니다. 이 질문에 고상한 욥이 비천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지성인이니,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사람이니,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이니, 이렇게 자기를 고상하게 알고 고상을 떠는 이는 하나님 앞이 아니라 야생 앞에 서는 그것만으로 하나님의 자비이신 그리스도가 아니면 소망이 없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 되어 하나님 투항케 될 줄로 믿습니다.
셋째,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야생 앞에서도 돌보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못하는 불신적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욥에게 네가 타조를 아느냐고 하십니다. 타조는 날개가 있고 날개를 치나 날지 못합니다. 타조는 모성이 없습니다. 알을 낳아서 버려둡니다. 흙과 모래의 열기로 부화해도 제 새끼가 아닌 것 같이 모질게 대합니다. 이렇게 무지하고 어리석은 타조가 날개를 들고 달리면 말 탄 자를 우습게 압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알과 새끼를 방치해 두어도 사는 건 하나님이 그런 생존력을 주셨고, 생존하도록 하나님이 돌보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타조는 알이 어떻게 될지, 새끼가 어떻게 살지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도록 설계된 걸 불평하거나 원만하지도 않습니다. 이걸 욥 네가 아느냐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타조는 나 창조주가 부여한 운명에 불평이나 원망하지 않는데, 너 욥은 내가 네게 재앙을 준 것을 잘했느니 못했느니 하느냐는 겁니다. 내가 네게 재앙을 준 것이 선한 뜻이 아니라, 해하는 것으로 알아서 나를 원수 같은 하나님이라는 망상에 빠져 있느냐는 겁니다. 이러고도 네가 어찌 믿음 좋고 신앙생활 잘했다며 자기를 의롭다고 주장할 수 있는지 한번 말해보라는 겁니다, 타조 앞에서 욥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과 은혜를 원수로 아는 배은망덕이 폭로된 겁니다, 여기서 고상한 욥이 천해진 겁니다. 이렇게 야생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못하는 인간의 불신앙을 정죄합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도 염려하는 인생에게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돌보심을 가르치실 때에 “공중 나는 새를 보라”라고 야생 앞에 세우셨습니다.(마6:26)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대개의 헌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믿음이 좋고 잘 믿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막상 고난이 오고 삶이 위기에 직면하면 걱정이 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지 못해서 하나님이 시험이 됩니다. 이렇게 어려우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못하여 스스로 살길을 찾으려는 사람이 신앙생활 잘한다고 자기를 의롭게 여고 공로 의식을 가지고 있으니 이 얼마나 웃을 일입니까? 그러므로 내가 믿음 좋다, 신앙생활 잘한다, 그런데 왜 내게 축복이 아니라 고통을 주시냐? 이렇게 자기 의를 주장하는 이는 야생 앞에 서면 거기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 못 하는 내 불신앙을 깨닫고 비천한 죄인이 되어 엎드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넷째, 인간은 하나님 앞이 아닌 야생 앞에 서기만 해도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패역한 존재가 됩니다. 군마의 힘을 사람이 따를 수 없습니다. 만일 말이 그 힘으로 주인을 거스르면 제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군마는 주인의 뜻에 따라서 전쟁을 두려워 아니하고 복종합니다.(19-25) 이렇게 말은 주인을 알고 주인에게 복종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이성으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자기 뜻에 맞으면 순종하고 아니면 불복합니다. 이게 욥의 패역입니다. 욥이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이성으로 의로운 내게 재앙을 주시는 하나님을 판단한 겁니다. “욥 네가 이러고도 너를 의롭다고 하느냐? 네가 말보다 나은 게 있느냐는 겁니다. 여기서 욥이 비천한 죄인으로 죽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순종해서 하나님께 대한 모든 의를 다 이룬 것처럼 아는 사람은 야생 앞에 서는 그것만으로도 하나님을 거스른 패역한 죄인이 되고 남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욥을 땅에 있는 것에서 높은 하늘을 나는 매와 독수리 앞에 세웁니다. 매가 높이 떠 방향을 잡는 능력을 아느냐고 하십니다. 네가 독수로 창공을 날게 하고 험준하고 높은 곳 즉 사람이 이르지 못하는 곳에 둥지를 짓고 살게 했느냐는 겁니다.(26-30)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도달할 없는 높이”입니다. 이 경이가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게 하여 하나님에 대한 경외에 이르게 하고 이 경외가 욥을 비천한 죄인으로 죽게 했습니다. 야생의 경이는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장엄하게 찬양하게 만듭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을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주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먼저 주께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11:33-36) 이게 하나님께서 욥을 거룩하신 하나님의 면전에서 야생 앞에 세우신 이유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욥이 야생 앞에서 서자 고상하고 품위 있는 교만한 성자 욥은 죽고 비천한 죄인 되어 회개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야생 앞에서도 야생보다 약하고 도덕적으로는 만물보다 더럽고 욕되며, 신앙적으로는 야생보다 불신앙적이고 불순종한 죄인이 됩니다. 책임적 존재니, 도덕적이고 경건하고 신앙적이라고 고상과 교만을 떠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이 방식으로 벌레만도 못한 존재가 되게 하여 십자가를 붙잡게 하십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하여 큰 해 받으셨나” 왓츠의 이 고백을 함께 할 수 있도록 하나님과 야생 앞에서 이중적으로 죽여 주셔서 그리스도에 이르시기를 축복합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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