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강해

자기 의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식

아브라함-la 2025. 10. 14. 13:56

025,10,12, 주일

본문 : 욥38:1-41

말씀 : 라인권목사

 

평안입니다. 폭풍은 하나님께서 무죄하고 의로운 자기에게 고난을 주신 이유를 대답해 주시기를 바라는 욥의 간구에 대한 응답과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불의하게 만든 욥의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과 부당한 정죄와 비난을 받는 욥의 변호자와 구원자 되심에 가장 적합한 형식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폭풍 중에 욥에게 임하신 것이 욥의 구원에 가장 적합한 형식이었다는 것은 그것이 자기 의를 주장하는 욥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식이라는 뜻입니다.

 

자기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식

지금까지 공부한 욥기를 정리하면 1장에서 37장까지의 욥의 재앙과 세 친구와 엘리후의 말은 욥의 자기 의를 깨 주시는 하나님의 간접적인 은혜였습니다. 이 은혜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도록 욥의 마음을 기경했지만, 이로써 욥이 회개한 것은 아닙니다. 욥은 친구들에게는 죽어 자기 의를 놓지 않겠다고 했고, 엘리후의 말에는 침묵했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욥을 거듭나게 하지 못했습니다.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 십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셔서 폭풍 중에 임하셔서 말씀하심으로 욥의 자기 의를 깨 주시고 있습니다. 38장에서 41장은 한 사람의 자기 의를 깨 주시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은혜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사람이 거듭나고 변화됩니다. 오늘부터 이 부분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의에 빠진 사람을 어떤 방식으로 다루어 주시는지, 자기 의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공부합니다.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세우심으로

첫째,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기 의를 다루시는 방법은 자기를 의롭게 여기는 사람을 당신의 거룩한 현존 앞에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폭풍 중에 임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폭풍 중에 임하신 것은 자기 의를 주장하는 하나님 당신 앞에 서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은혜로 욥이 하나님의 거룩한 현존 앞에 서자, 욥이 그 하나님 앞에서 대답하기를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라고 교만한 성자 욥이 비천한 죄인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했습니다. (40:4) 여기서 하나님은 욥의 고난의 이유를 설명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욥에게 재앙을 주신 당신의 행위를 해명하시거나 변명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단지 욥을 하나님 당신의 거룩한 현존 앞에 세우셨을 뿐입니다. 자기로 충만한 한 사람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의를 다루시는 첫 번째 방식입니다. 이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설 때만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면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자기는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주재이시고 나는 그 하나님의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여기서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넘나들 수 없는 간격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 간격은 욥의 의와 경건으로도 넘을 수 없는 겁니다. 이 자기를 몰라서 자기를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 수행할 수 있는 사람으로 압니다. 이교만이 자기 의의 본질입니다. 이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서야만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할 수는 없는 죄인이 됩니다. 이게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사야가 그랬습니다. 이사야는 고상한 사람입니다. 그는 왕족입니다. 이사야의 문체는 구약에서 가장 고상한 문체입니다. 이 고상한 선지자 이사야가 웃시야 죽던 해에 이사야가 성전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 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하고 스랍들이 얼굴과 발을 가리고 날며 하나님을 거룩하다고 화창할 때 성전 문지방의 터가 진동하고 연기가 충만했습니다. 이때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라고 했습니다.(사6:5) 고상한 이사야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입술이 부정한 죄인 중의 죄인이 된 겁니다. 하나님을 가타부타하고, 자기를 꽤 괜찮은 사람으로 알고 고상과 교만을 떠는 건 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섭니다.

 

이런 욥을 구원해 주시려 하나님께서 자기를 굽혀서 폭풍이라는 형식으로 임해 주셨습니다. 이 은혜로 고상하고 의로운 욥, 할 수 있다는 욥은 죽고 비천한 죄인이 되어 실제로 그리스도를 의뢰하는 믿음에 이른 새로운 피조물 욥의 살아난 겁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혜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불신자들, 신앙과 하나님을 철학으로 만드는 영적 실제를 모르는 이론적인 신자들, 교회 안에서 자기 의를 주장하는 이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 시간 성령께서 자기 의로 충만한 자신과 이웃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세워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며 질문하심으로 

둘째로 하나님께서 자기와 자기 의로 충만한 사람을 다루시는 방식은 자기를 의롭게 여기는 사람에게 당신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해 주시며 질문하시는 것입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폭풍 중에 임하셨습니다, 이건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그래서 욥은 이제 하나님이 자기의 고난의 이유를 설명해 주실 것으로 알았을 겁니다. 아니 무죄한 자기에게 재앙을 주신 것을 해명하실 것으로 알았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욥의 기대와 달리 설명하시거나 해명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십니다. 대답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너는 허리를 묶고 대장부처럼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하라고 하십니다. 본문 4-41을 정리하면 내가 땅을 어떻게 창조했는지, (4-7) 어떻게 피조세계의 질서를 정해 주셨는지,(8-11) 비, 구름, 바람, 이슬과 서리와 눈과 더위와 추위로 피조세계에 생명을 주시는지를 대답해 보라는 겁니다. 이 하나님의 물음 앞에 욥은 입술을 가리고 회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째 이 하나님의 반문이 욥의 지식의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신비, 우주의 질서를 보여주시며 “너는 이것을 아느냐?” 물으십니다. (1-7) 욥은 이 하나님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습니다. 자기 지식의 한계가 드러나고 무지함이 드러난 겁니다. 이 하나님의 질문 하나로 욥의 욥을 죽이고도 남았습니다. 욥의 지식이 죽으니 욥의 교만이 죽은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게 욥이 진짜 모른 것은 인간의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을 몰랐다는 겁니다. 이 욥의 무지가 의로운 자기에게 재앙을 주시는 하나님을 납득하지 못하게 한 겁니다, 자기 의는 자기 이상으로 이해 못 하는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겁니다.

 

이런 욥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을 나타내시며 네가 내 창조를 신비를 아느냐고 질문하시자 욥은 이 질문 앞에 “나는 내가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는 말을 했다”라고 회개했습니다. (42:3) 하나님의 이 질문 하나로 욥은 하나님이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경외의 대상임을 인식하고 겸손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지식의 한계를 인식할 때 내가 안다는 교만이 붕괴됩니다. 자기 의는 사람의 아는 것으로 하나님을 재단할 때 일어나고 믿음과 은혜는 내가 모른다는 무지에서 시작되는 줄로 믿습니다. ‘네가 내 창조의 신비를 아느냐?’ 나를 아는 사람으로 여긴다면 이 하나님의 질문에 답하셔야 합니다.

 

둘째 이 하나님의 반문은 욥이라는 사람의 위치를 드러내 주었기 때문입니다. 8-11절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피조 세계의 질서를 정해 주셨는지를 네가 아느냐 질문입니다. 한계를 정하셨다는 말씀에 주목합시다. (10) 바다와 파도가 이 한계를 넘지 못하는 것 같이 만물이 다 하나님이 창조 시에 부여한 한계, 즉 질서에 순종합니다. 너 내게 이렇게 되게 했는지 대답해 보라는 겁니다. 이 질문에 자기 의를 주장하는 욥은 죽고 비천한 죄인이 되어 입술을 가리고 회개했습니다, 왜 이렇게 됩니까? 이 하나님의 질문은 욥 너도 이런 내 피조물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나는 창조주이고 너는 피조물이요 내 주권 아래 있다는 겁니다. 이게 네 위치, 네 자리라는 겁니다. 이걸 몰라서 내게 재앙을 주신 것이 옳으니 그르니 하며 자기를 하나님보다 높이고 하나님보다 의롭게 여긴 겁니다. 자기 위치 파악이 안 됐다는 거지요. 이런 욥이 이 질문 하나로 오로지 경외하고 예배하고 순종할 자리에 있음을 파악을 한 겁니다. 이게 욥의 자기 죽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은 하나님 되게 하고 사람은 사람 되게 하는 겁니다. 자기 의는 하나님을 피조물 인간의 기준으로 끌어내리고 자기를 하나님 위치로 올리려는 데서 일어납니다. 이것이 혼돈이 제 자리를 찾는 건 내가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걸 인정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걸 인정하는 겁니다. 그 주권이 언제나 옳음을 믿는 겁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고 신뢰는 자리에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것이 피조물의 행복이요, 영광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고상한 한 인간 욥을 피조물 중 하나가 되게 한 것은 인격의 강등이 아니라 진정한 사람이 되게 하는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셋째, 이 하나님의 치열하고 집요한 반문은 “나는 누구며 너는 누구냐?”는 물음이기 때문입니다. 38:4절에서 41장까지는 한 마디로 “나는 누구며 너는 누구냐”는 질문입니다. 여기에 답하라는 겁니다. 나는 창조한 하나님이다. 하늘에서 땅까지, 하늘 위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 땅과 바다에 사는 그것들 심지어 인간이 다스리고 길 릴 수 없는 야생과 괴물까지 다 내게서 나오고 나로 말미암고 산다, 네가 이것을 아느냐? 21절은 이걸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유머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너는 그때 이미 태어난 몸이니 물론 알겠지 네가 살아온 날이 얼마나 많으냐”고 번역했습니다, 네가 나이가 아주 많아서 내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할 때 네가 있어서 창조의 내력을 다 알고 있냐는 거지요. 네가 나처럼 자존자 즉 무시간적 존재가 아니라, 온 시간과 가야 할 시간 속에 존재하는 유한한 피조물인 줄 아느냐는 겁니다. 이 질문 앞에 욥은 입술을 가리고 회개했습니다.


너는 누구냐? 이 질문이 욥으로 자기 주제를 파악하게 했습니다. 이 질문이 하나님의 하나님의 되심과 인간의 인간 됨을 알게 하여 하나님께 대한 경외를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인생이 하나님께 의문을 제기하고 가타부타하는 것은 그가 이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만나지 못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을 가타부타하는 주제넘은 욥에게 고난의 이유나 칭의론을 길게 설명해 주신 것이 아니라 단지 당신의 현존하심을 나타내시고 당신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시고 나는 누구며 너는 누구냐고 하신 겁니다. 자기 주제 파악이 안 돼서 하나님께 옳으니 그르니 하고 자기를 옳게 여깁니다. 이렇게 한마디로 자기 주제 파악이 안 돼서 까부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즉효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혜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불신자에게 하나님이 임하시도록 기도합시다. 신앙과 하나님을 인간의 철학으로 만드는 자칭 엘리트 신자들, 교회 안에서 욥처럼 자기 의를 세우며 중생하지 못한 이들이 하나님을 만나도록 기도합시다. 신자이면서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로 사는 사람이 하나님으로 살도록 하나님 앞에 세우시기를 기도합시다. 믿음은 주재되신 하나님의 현존하심 앞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부이고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이 하나님 앞에 섭시다, 그리고 질문합시다. 하나님은 누구시며 나는 누구인가? 이것으로 자기와 자기 의는 죽고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은혜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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